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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하 6:22-42

 

 

지난번 설교에 이어서!

솔로몬의 기도 두 번째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지난주에 우리는

솔로몬의 성전 봉헌식 기도가!

참 성전이신 예수님을 향하고 있다는 걸 확인했습니다.

 

다윗에게 약속하신 성전 건축은 약속 성취의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솔로몬의 기도에 의하면!

다윗을 향한 하나님의 남은 언약이 있습니다.

그것이 영원히 이어질 다윗의 왕권이었습니다.

 

그 영원한 왕권을 완성 시키실 이가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제사로 인해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이 가능해지고!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는 은혜가 임하게 됩니다!

 

솔로몬은 예수님을 분명하게 알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예수그리스도의 그림자요, 모형인성전을 바라보면서도

이렇게 기뻐하며 감격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마땅히 참 성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분명히 바라보며

그를 의지하는 온전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3:1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여러분!

갈라디아 교인들이라고 예수님 십자가를 직접본게 아니었거든요!

 

눈으로 봐서 보인다고 하는게 아닙니다.

우리가 복음을 듣고 믿고 구원을 받았다면!

그는 이미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보는 자라는 겁니다.

 

이런 전제 속에서!

오늘 계속 이어지는 솔로몬의 기도를 살펴보겠습니다.

 

이스라엘과 하나님 사이를 막는 것이 라고 했습니다.

그 죄 문제를 해결하는 곳이 성전이죠!

성전 제단에서 피흘림이 있기 때문에!

그 은혜로!

이스라엘의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 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이스라엘의 기도는 항상 성전을 향해야 하고, 성전 중심이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성전을 향해야 하는가?”

 

솔로몬은

7가지 성전을 향하는 기도의 상황들을 상정합니다.

 

지금부터 하나하나를 살펴볼께요!

 

첫째는

22~23절 이웃에게 범죄했을 때! 또는 잘잘못을 따져야 할 상황일 때!입니다

그 때에!

주님! 나도 나지만, 저 사람에게도 어느 정도 잘못이 있습니다!”

억울한 마음이 있다면!

맹세하라는 겁니다. 맹세라는 게 어떻게 이뤄집니까?

주여! 저는 이 사건에 대해 억울한 부분이 있습니다.”

모든 것을 아시는 주님!

만일 이 범죄가 오로지 나의 죄악이라면, 내게 벌을 주셔도 마땅한 일입니다!”

이렇게 기도하는 거죠!

대표적인 표현이! “내게 벌위에 벌을 주시기 원한다하는 내용입니다.

구약에서 굉장히 많이 나오는 표현이지요!

열왕기상 2:23

여호와를 두고 맹세하여 이르되 아도니야가 이런 말을 하였은즉

그의 생명을 잃지 아니하면 하나님은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심이 마땅하니이다

 

공의의 하나님께 모든 판단을 맡기는 기도입니다.

오늘을 사는 신앙인들 중에 이렇게 기도하시는 분들이 얼마나 있을까요?

법정 다툼 등이 있을 때!

그저 이기게 해주십시오!”, “형벌은 감하게 해주십시오라고는 해도!

하나님의 공의에 자신을 맡기는 일은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와 같은 기도를 할 때 핵심은

22절 하반절에

이 성전에 있는 주의 제단 앞에서! 맹세 하거든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로운 판단을 요청하는 것, 성전과 제단 앞에서! 입니다.

 

둘째 24~25절 하나님께 범죄해서 전쟁에 패하는 벌을 받았을 때입니다.

마땅히 성전과 제단 앞에 나아와야 하겠지요!

그런데 24절 후반절에는 이 성전에서 주께 빌며 간구하거든!”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는 제단이 빠져 있습니다.

아마도...전쟁 중에는 시체를 만지게 되는 일이 있다보니까!

부정해져서 성전 안까지는 들어오지 못하는 상황을 염두한 것 같습니다.

 

만일에 그렇더라도, 성전 문 앞에서의 기도도 들어주시기를 간구하는 겁니다.

이런 개념이 세 번째에서는 더 크게 확장됩니다.

 

셋째 26~27절 하나님께 범죄해서 이스라엘에 여러 가지 재해가 임했을 때입니다.

하늘이 닫히고 비가 내리지 않아서 소출이 없을 때에요!

백성들이 굶주려서 움직일 힘조차도 없다고 생각해보시지요!

이정도 라면 성전에 나아오는 것도 어려울거라 예상할 수 있겠습니다.

이런 상황이라면, 있는 그 자리에서 기도할 수 밖에 없겠지요!

,

성전을 향해서 기도하라는 겁니다.

26절 하반절에 이곳을 향하여 빌며라고 말합니다.

성전에까지 나아가지 못하더라도, 있는 자리에서 성전을 향한다면!

동일한 응답과 회복을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그렇게...이후부터 일곱째 까지는 성전을 향하는 기도입니다.

 

넷째 28~31절 여러 가지 재앙이 일어나서, 부지중에 지었던 죄를 깨달았을 때입니다.

이스라엘이 부지중에 범죄했습니다.

그 죄악이 땅을 더럽혔고,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초래했습니다.

기근이나 전염병, 흉년이나 전쟁의 패배를 당했는데도!

공동체는 왜 우리가 이런 환난을 겪는지 몰라요!”

그러다가~

29절 보시지요!

한 사람이나, 혹 주의 온 백성 이스라엘이~~~

자기의 마음에 재앙과 고통을 깨닫게 됩니다

그렇게 깨달은 대로!

온 이스라엘이 회개하면 좋겠지만, 혹 한 사람만이라도 깨닫고!

주의 성전을 향해서 기도한다면!”

그 한 사람의 기도를 통해서도 이 땅을 회복시켜 달라는 간청입니다.

한 사람의 기도를 통해서도 민족이 사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한국교회가 문제다’ ‘교회가 썩었다고 비판하는 사람은 넘쳐납니다.

그러나...

썩은 한국교회 때문에 자기 가슴을 치며 우는 사람은 얼마나 있을까요?

이건 우리 각자가 자신을 돌아봐야 할 일입니다.

 

이제 나머지 세 개의 상황입니다.

이 상황들은 이스라엘 영토 바깥에서의 상황입니다.

 

다섯째 32~33절 이방인들이 하나님께 기도할 때!

여섯째 34~35절 이스라엘이 원정 전쟁에 나가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할 때!

일곱째 36~39절 죄악이 관영하여 결국 이방에 포로로 끌려갔을 때!

 

이스라엘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이니

성전에 나오지 못하고, 그저 성전을 향해서 기도할 수 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특히 마지막 일곱 번째, 이방 땅에 포로로 끌려간 상황에서라도!

그 적국의 땅에서 성전을 향해 기도하면!

그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회복시켜주시기를 간구합니다.

 

이 기도의 역사를 경험한 사람이 다니엘입니다.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포로로 사로잡혀 가기 전에!

선지자 예레미야는, ‘그 백성이 포로생활 70년이 차면 돌아오리라고 예언했습니다.

 

70년이 차는 때,

노년의 다니엘이 예레미야의 글을 읽다가 이 예언을 발견한 겁니다.

다니엘 9장에는,

다니엘이 이 약속을 의지하여 이스라엘의 회복을 구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다니엘이 어떤 모양으로 기도했는가...가 의미심장합니다.

 

다니엘 610절은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니엘이 이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다니엘은 예레미야를 통한 하나님의 약속과

솔로몬을 통한 성전에의 언약 두가지를 다 기억한 겁니다.

 

물론!

이스라엘이 70년만에 포로회복을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이루실 일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 역사를

다니엘 한 사람의 신실한 기도를 통해서 이루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이렇게 7가지 기도의 형태를 살펴보았습니다.

어떤 기도이든지!

모든 기도의 핵심에는 성전이 있었습니다.

 

성전 안에 들어오든지, 성전 앞에 서든지, 심지어 성전을 향하여 기도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기도에 응답하시리라 하십니다.

 

왜냐하면!

성전은.... 성전 제단에서 이뤄지는 제사는!

하나님과 그 백성 사이의 중보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신약의 성도들도 예루살렘을 향해서 기도해야 할까요?

심지어 어떤 기독교인은 통곡의 벽에서 기도하는 느낌이 특별하더라고 하던데요...

과연 그럴까요?

또는,

구약에는 성전을 향해서 기도했으니까!

신약 시대의 사람들은 교회를 향해서기도하면 될까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역대하 6장에서는 하나님의 이름이라는 표현이 13회나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이 성전에 자신의 이름을 두신 것과 기도응답은 중요한 관련이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요한복음 16:23-24절 말씀에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날 밤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이 중요합니다.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니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내 이름으로 구하면 주신다약속하신 이유는!

예수님이야 말로

하나님의 이름이 거하시는 참성전이시오, 참 중보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이나, 심지어는 우리가 속한 교회 건물도 아닙니다.

신약을 살아가는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며!

응답과 회복, 공급의 은혜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성전을 통해 주시는 기도의 특권에 압도되어서!

큰소리로! 마음껏 하나님을 향해 외치게 됩니다.

40나의 하나님이여!”

41여호와 하나님이여!”

41절 중반에도 여호와 하나님이여!”

42절에도 여호와 하나님이여!”

이렇게 하나님의 이름을 부릅니다.

 

이어지는 말씀에는!

솔로몬의 불같은 기도에

하나님께서 불로서 응답하시지요!

 

7:1

솔로몬이 기도를 마치매 불이 하늘에서부터 내려와서 그 번제물과 제물들을 사르고 여호와의 영광이 그 성전에 가득하니!”

 

오늘 참 성전되신 예수 그리스도!

우리의 눈 앞에 선명하게 보이는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바라보시고,

그 이름으로 기도하심으로 응답의 복을 누리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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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3:7-13

 

오늘은 요한계시록 본문으로 빌라델비아 교회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우선,

요한계시록이 어떤 책인지부터 생각해보시죠.

 

여러분은 요한계시록 하면 퍼뜩 어떤 생각이 드세요?

1. 재미있다.

2. 무섭다.

3. 모른다.

 

아마 대부분은 모른다고 답할 거에요.

저도 그랬어요.

요한계시록에 대해서 누가 알려주지도 않았고, 관심도 없었지요.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생긴 감정이 무서움이었어요.

 

교회 연합수련회로 어떤 교회를 갔는데!

교회 로비에 거대한 그림이 있었어요.

제목이 내가 속히 오리라라고 빨강색으로 쓰여있었고!

거기에는!

흰 말을 타신 예수님이 하늘에서 내려오고!

그옆으로는 무수한 천사들이 나팔을 불고...

그리고 지상에서는 영혼 같은 것들이 빨려 올라가는 느낌이었고!

그 밑에는 지옥불이 타고 있는데!

비행기가 떨어지고, 건물이 불에 타고... 자세히 보면 미사일이 날아가고...

사람들이 고통스러워하는...

그런 그림이었어요.

 

예수님의 재림’(다시 오신다)을 표현한 건데,

어릴 때 저는

그 그림이 너무너무 무서웠어요.

 

그 충격이 가시기도 전에!

이번에는 한 영화를 교회에서 틀어줘서 봤는데요.

미국 영화였고, ‘휴거라는 영화였을 거에요.

이끌 휴, 들 거를 써서 휴거라고 하는데...

예수님이 공중에서 재림하시는 날에,

예수 믿는 사람은 부활의 몸이 되어서 공중으로 들림받는다고 해서 휴거라 해요.

휴거 후에는!

지상에서 7년 대환란기가 있을거라고 하는데...

이 영화는요!

휴거 못받은 사람들에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보여주는 영화였어요.

 

보세요.

비행기가 날고 있는데 비행기 조종사가 휴거되었어요.

그러면 그 비행기 어떻게 되겠어요?

떨어지겠죠?

도시에 달리는 자동차에서 사람이 없어졌어요. 무슨일이 벌어지겠어요?

지상은 아수라장이 되는 겁니다.

그리고 핵전쟁이 일어나요.

그런 무시무시한 내용들이 나오는데...

 

그런 영화를 보고나니!

정말 너무너무 무서운거에요.

밤에 잠들기 전에는 그 장면들이 계속 머리에 떠올랐습니다.

나 휴거 안되면 어떻게 하지?’이런 고민이었어요.

 

그렇게 신학대학교를 갔고!

요한계시록을 제대로 대면하면서!

계시록이 전혀 그런 책이 아닌 걸 알았어요.

 

성경을 해석하는 원칙 중에 제 1 원칙이 있어요.

바로!

이 책을 읽는 1차 독자를 생각하라는 거에요.

 

빌레몬서를 예로 들어볼까요?

빌레몬서는 사도 바울빌레몬에게 보낸 편지에요.

빌레몬서를 해석하려면 제일 먼저해야할 일이 뭐겠어요?

빌레몬이 누구냐?’

빌레몬에게 무슨 문제가 있었느냐?’

그래야 왜 빌레몬에게 편지를 썼는지가 나오고!

그 이야기를 우리에게 적용할 거 아니에요.

빌레몬을 거치지 않고, 다짜고짜 우리 이야기로 가져오면!

거기서부터 해석이 꼬이는거에요.

 

요한계시록도 마찬가집니다.

요한계시록의 1차 독자는 오늘날 우리가 아니에요!

본문에 정확하게 제시되어 있어요.

요한계시록 1:4절 보세요.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교회에 편지하노니!”

당시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가!

이 편지의 1차 대상자였어요.

 

물론 하나님의 말씀이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이죠.

그러나

그 말씀은 그 시대상황 속에서 주시는 말씀이기 때문에!

여러 해석의 과정을 거쳐서!

하나님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본의를 찾아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려는 말씀도 확실하게 알게 되는 거에요.

 

그래서 성경을 해석하고 설교하는 목사가 되기 위해서는!

그냥 교회생활 열심히하고, 성경 좀 열심히 보면 되는게 아니라!

대학을 신학대학교를 가야 되는 거에요.

대학에서!

성경의 언어인 히브리어’ ‘헬라어를 배우고!

성경 해석 시대의 언어인 라틴어를 배우고!

해석학을 배우고, ‘고고학을 배우고, 신약학, 구약학, 사본학...

온갖 과목들을 공부하고서야!

목사로 안수하고, 강단에서 설교할 수 있는 강도권을 주는 거에요.

 

약간 이야기가 옆으로 샜는데요!

중요한 건 이거죠!

성경을 해석할 때는 누가 중요하다고요?

‘1차 독자가 중요하다!

요한계시록의 1차 독자는 누구라고요?

소아시아 일곱교회다!

, 여기서 생각해볼게 있어요.

 

오늘날 성경을 잘못해석하는 예 중에 이런게 있어요.

요한계시록 8:7

첫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피 섞인 우박과 불이 나와서 땅에 쏟아지매

땅의 삼분의 일이 타 버리고 수목의 삼분의 일도 타 버리고

각종 푸른 풀도 타 버렸더라

이 말씀을!

그대로 우리 시대로 가지고 와서 해석해봅시다.

! 피섞인 우박과 불이 하늘에서 쏟아지니!

땅의 삼분의 일이 타고, 수목의 삼분의 일이 탈거라고?”

그래서 뭐라고 해석했을까요?

지구상에 이 정도의 피해를 끼치는 무기가 있다면요?

핵무기겠죠!’

그래서 이 구절을 핵전쟁이라고 해석하는 사람이 많았고요!

지금도 많습니다.

 

여러분!

1차 독자인 로마 시대 사람들이!

이 본문을 읽고 과연 핵전쟁을 떠올릴 수 있었을까요?

아니지요!

이 구절이 무슨 뜻인지 알려면!

당시 사람들에게 이런 말씀들은 어떤 의미인지!

당시 사람들이 읽었을 때는 어떻게 이해되었을지를 찾는게 우선이겠지요?

 

요한계시록 해석이 그래야 한다는 겁니다!

 

생각해보세요.

사도 요한이

이 계시록을 썼을 때!

그 당시는 이미,

기독교는 대 박해를 받던 시대였어요.

 

유대인들은 예수 믿는 사람들 돌로 쳐죽이려들었고요.

로마황제는 예수 믿는 사람들을 이잡듯이 잡아서 화형시켰던 때입니다.

예수 믿는다고 하면

직장에서 짤리고, 전재산 빼앗기고, 사자밥이 되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자기가 당해보지도 않은 7년 대환난을 두려워 하지만 말입니다.

당시에 예수님 믿는 사람들은요!

자기들의 일상이 ‘7년 대환난이었어요.

 

요한계시록은!

그렇게! 엄청난 고통 받고 있는 일곱교회에 보낸 편지에요!

그러면 그 내용은 뭐겠어요?

이미 엄청난 고통 당하고 사람들에게!

너희는 더 걱정해라. 더 두려워해라.

나의 어려운 글을 읽고 더 더 더 혼란에 빠져라

그런 내용이었을까요?

그럴 수가 없습니다.

요한계시록의 핵심이 뭐냐!

하나님이 이기신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이기시고 자기 백성을 고난에서 건지신다는 거에요.

 

힘내라!

걱정마라!

두려워마라!

이게 요한계시록의 주제에요!

 

한 단계 더 들어가 볼까요?

이 당시에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하면!

거의 대부분이 가난한 사람, , 하층민의 사람들이었어요.

,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 대다수에요!

이런 사람들에게 어려운 신학 개념이나 풀어야 하는 암호체계가 있는

그런 편지를 썼을까요?

아니지요!

요한계시록은!

오히려 그림책인 겁니다.

이 나오고 하늘을 나는 백마가 나옵니다.

실제 용이 있나요?

없어요. 상상의 동물이에요!

요한계시록은 이런 그림 언어를 통해서!

당시 배우지 못한 교인들을 격려하고’ ‘응원하려했던 겁니다.

힘내! 좀 더 용기를 내! 하나님은 반드시 이기실거야!”

하나님이 승리하실거야!”

 

그러니까...

여러분이 요한계시록을 무서워할 필요가 있겠어요? 없겠어요?

전혀 없어요!

오히려 재미있는 동화책 읽듯이, 즐겁게, 기대감을 가지고 열심히 읽으시면 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이죠!

소아시아 몇 교회?’ 일곱교회 중에 빌라델비아 교회입니다.

이 일곱교회가!

각각 칭찬도 듣고, 책망도 받거든요!’

그런데 빌라델비아 교회책망은 없고, 칭찬만 있는 교회에요!

 

왜 칭찬만 있을까요?

38절에 그 답이 있어요.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

빌라델비아 교회가 칭찬받은 두가지 행위!

뭐에요?

내이름을 배반하지 않았다! - 끝까지 믿음 잘 지켰다는 이야기고요!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켰다!

이게 정말 대단한거에요.

하나님은요!

우리에게 뭔가 위대한 일을 요구하지 않으세요!

위대한 일은 주님이 다 행하셨어요.

주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건!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입니다.

매일...

우리의 습관 하나를 바꾸는 것.

우리의 생각을 조금씩 고쳐나가는 것.

하나님의 뜻을 찾으며 하나님 뜻대로 살아가려는 것!

 

하나님은 그런 모습을 귀하게 보셨어요.

정말 보잘것없은 노력들이지만!

주님은 그 교회에게 엄청난 것을 약속하세요!

9절입니다.

보라 사탄의 회당 곧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그렇지 아니하고 거짓말하는 자들 중에서 몇을 네게 주어

그들로 와서 네 발 앞에 절하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

정말 작은 교회...

힘이 없는 교회였지만!

이 교회를 통해서!

대적이 무릎꿇게 만들겠다 하셨어요.

 

결국 요한계시록이 말하는 건!

언젠가 있을 재림, 휴거, 핵전쟁, 종말이런거에 매몰되지 말고!

지금 주신 일상을, 하루 하루를,

믿음을 가지고 충실하게 살아가라는 격려인거에요!

 

여러분 중에서!

요한계시록 잘 못해석하는 이단에 빠지는 사람이 아무도 없기를 바라고요!

오히려 요한계시록 말씀을 통해서!

믿음의 큰 걸음을 떼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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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신' 또는 '하나님'이라고 할 때
그 '신'은 '마땅히 어떤 존재여야 하는지'
꼭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몇가지만 이야기해볼까요?
첫번째는 '전지함'입니다. 
'전.지.' 모든 것을 안다는 말이죠.
마땅히 신이라면 '모든 것을 알아야' 합니다.
모르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 만으로
그에게는 신의 자격이 없습니다. 
 
두번째는 ‘편재성‘입니다.
’편재‘라는 ’모든 곳에 존재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곳에는
하나님의 숨결이 닿지 않는 곳이 없을 터입니다.

세번째는 ’전능함으로 주관하심' 입니다.
’전!능!’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말입니다.
‘불가능’이야 말로 신에게는 어울리는 말이
아닐 것입니다.
그 전능하심으로 

세상을 ‘주관하십'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만 하고서
세상을 그냥 방치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세상이 유지, 발전하도록
직접 운영하십니다.
참새 한마리도 하나님의 허락이 없으면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말씀은
주관의 실체를 잘 보여줍니다.

적어도 제가 믿는 하나님은
이러한 존재이고요, 그래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은 신이라면
저는 믿지도 따르지도 않았을 겁니다.

자,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이 철학적 믿음을요!
개인에게 적용한다면 어떤 느낌이 될까요?
전지, 편재, 전능, 주관의 하나님이
나랑 어떤 상관이 있는가!

그 말씀이
바로 시편 139편입니다.

이 말씀은 따로 설명할 것도 없습니다.
이 배경을 알고 본문을 읽으면
그 자체로 은혜입니다.

먼저 ’전지‘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이
나랑 어떤 상관인지 볼까요?
1절~6절입니다.
“1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2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3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4 여호와여 내의 말을 <알지 못하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이렇듯 하나님은 ‘나의 존재’와 ‘나의 일거수일투족’
‘심지어 내 생각과 말까지‘ 속속히 알고 계십니다.

다만 그 앎은, 나를 정죄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내 잘못을 캐내기 위함이 아닙니다.
5,6절을 볼까요?
“5 주께서 나의 앞뒤를 둘러 싸시고
내게 안수하셨나이다.
6 이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하나이다”

’안수하셨다‘ 다른 말로는
’손바닥으로 나를 붙드신다‘는 뜻입니다.

 

잘 생각해보세요!

누군가 내 일거수 일투족

심지어 내 생각까지 꿰뚫어보는

그런 사람이 있다면

어떠실 것 같습니까?

두려울겁니다. 

그에게 약점을 잡혔다는 생각이 들거고

그 사람을 피해다니게 될 겁니다.

우리는 불완전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분명 우리의 약점과 

부족함 범죄를 알고 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내게 안수하신답니다. 

나의 편에 서서 나를 지켜주신답니다. 

그러니 6절이죠!

"이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하나이다"

 

모든 것을 아시는 전지하신 하나님은

'나의' 모든 것도 아십니다.

나의 형편과 처지도 아시고

연약함도 잘아십니다. 

내가 기도하기 전에도

'안다 아들아 내가 잘 안다' 

말씀하시는 우리 아버지 이십니다. 

 

둘째, 편재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어디에나 존재하시는 하나님은

'내가' 어디에 있을지라도

'거기에' 함께 하십니다. 

 

7절에서 12절까지 

주욱~ 읽어보겠습니다. 

"7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8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9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10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11 내가 혹시 말하기를 

흑암이 반드시 나를 덮고

나를 두른 빛은 밤이 되리라 할지라도

12 주에게는 흑암이 숨기지 못하며

밤이 낮과 같이 비추이나니

주에게는 흑암과 빛이 같음이니이다"

 

내가 세상 어디에 있을지라도

하나님은 거기에 계십니다. 

그냥 계시면서 지켜보시기만 하지 않죠.

10절 '나를 인도하시며, 나를 붙들어' 주십니다.

 

 그 자리가 

혹, 절망의 자리라서!

'흑암'처럼 느껴지는 자리일지라도!

하나님에게는 '흑암이나 빛이나' 

차이가 없으시기에!

하나님은 그곳에서도 함께 하시며

우리이게 빛을 비추어주십니다. 

 

지금 여러분이 이 글을 읽고 있는

그 자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절망가운데 있을지라도!

하나님은 곁에 계시며 

붙들고 인도하실 것입니다.

 

셋째, 전능함으로 주관하시는 분입니다. 

'모든 것이 가능하신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것 처럼

'여러분을' 친히 만드셨습니다. 

여러분은 우연의 존재가 아닙니다. 

 

우선 13절~15절을 보시죠.

"13 주께서 내 내장을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만드셨나이다

14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하심이라 

주께서 하시는 일이 기묘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 

15 내가 은밀한데서 지음을 받고 

땅의 깊은 곳에서 기이하게

지음을 받았을 때에

나의 형체가 주의 앞에

숨겨지지 못하였나이다"

 

네!

하나님만큼 나를 잘 아시는 분은 없습니다.

그분이 나를 친히 '나'라는 존재를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저 만드시기만 한게 아닙니다.

내가 살아갈 인생도 설계해 두셨습니다.

16절입니다.

"내 형질이 이루어지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루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

하나님은 내가 태어나면서 죽을 때까지

삶의 행적과 행보를 다 알고 계십니다. 

다 설계하셨습니다. 

내 인생이 어떻게 흘러갈지!

하나님은 아신다는 겁니다. 

 

내 인생의 책임을!

하나님이 지신다는 말이기도 하죠.

최선의 삶을 살도록 인도하신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시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17,18절

"17 하나님이여 주의 생각이 

내게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그 수가 어찌 그리 많은지요

18 내가 세려고 할지라도 

그 수가 모래보다 많도소이다 

 내가  깰 때에도 여전히 주와 함께 있나이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이 계획과 섭리는

우리가 도저히 깨달을 수도 없고

도달할 수도 없는 진리입니다.

 

하나님이 '다 아신다'는 고백은

하나님이 '예정하셨다'는 말과도 

동일합니다.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예정론'은

정말 많은 공격을 받는 교리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사람들에게는

너무나도 은혜로운 진리인데

불신자에게는 얼마나 불편한

이론인지 모릅니다. 

 

그런 이들은요.

결국 하나님에 대한 '존재'를 

거부하게 됩니다. 

기독교 진리를 대적하는 자리에 섭니다. 

20절을 보세요.

"그들이 주를 대하여 악하게 말하며

주의 원수들이 주의 이름으로 

헛되이 맹세하나이다."

 

우리는요!

철저하게 진리의 편에 서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의 말들에 

휩쓸려서 하나님을 의심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전지, 편재, 전능의 하나님께'

내 인생을 온전히 맡겨 드려야 합니다. 

 

그러므로 시인은 결론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23,24절

"23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24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

 

이 땅에서의 삶 뿐만 아니라!

'영원한 길'로 인도해주시기를!

그렇게 인생을 넘어 영생에 이르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는 

시인입니다. 

 

이 하나님의 나의 하나님입니다.

이 하나님이 여러분의 하나님입니다.

무엇하나 확실한 것 없는 세상에서

더할 수 없이 확실하신 하나님께

오늘도 우리 자신을 맡겨드립시다.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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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12:5
“만일 네가 보행자와 함께 달려도 피곤하면
어찌 능히 말과 경주하겠느냐
네가 평안한 땅에서는 무사하려니와
요단강 물이 넘칠 때에는 어찌하겠느냐?”

이 말씀은 굉장한 도전입니다.
극한 고난 속에서 힘겨워하는 예레미야에게
‘너는 말과 경주할 사람’이라고
오히려 지금의 어려움을 극복해내라고
더 강하게 격려하시는 내용입니다.

예레미야에게는 유명한 별명이 있습니다.
‘눈물의 선지자’입니다.
그만큼 많은 고난을 당했고
조국의 죄악과 악함 때문에
숱한 눈물을 흘려야 했습니다.

이토록 선한 선지자였건만
그에게는 적도 많았습니다.
심지어 그의 목숨을 노리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놀랍게도!
예레미야의 목숨을 노리는 사람들은!
자신의 혈육 친척이었습니다.

예레미야 1:1절입니다.
“베냐민 땅 아나돗 제사장들
힐기야의 아들 예레미야의 말이라”

예레미야는 ‘아나돗 제사장 집안‘ 출신
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예레미야11장21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아나돗 사람들에 대하여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그들이 네 생명을 빼앗으려고 찾아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예언하지 말라
두렵건대 우리 손에 죽을까 하노라 하도다“

자신의 친족인 아나돗 사람들이
예레미야를 죽이려는데 앞장섰다는 거죠.

예레미야 입장에서는 얼마나 두렵겠습니까?
그들이 언제든지 결행만 하면
선지자의 목숨은 보장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레미야로서는 이 현실이 너무 부당했습니다.
하나님을 위한 열심과
선한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갔지만
그에게 돌아온 것은
위협과 협박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레미야는 하나님께 엎드립니다.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합니다.

그 구절에 예레미야 12장 1,2절입니다.
”… 내가 주께 질문하옵나니
악한 자의 길이 형통하며
반역한 자가 다 평안함은 무슨 까닭이니이까
주께서 그들을 심으심으로
그들이 뿌리가 박히고 장성하여
열매를 맺었거늘
그들의 입은 주께 가까우나
그들의 마음은 머니이다”

오늘날 우리들의 고민이기도 하지 않습니까?
“왜 악한 자의 길이 형통한 것인가?”
“반역자들은 다들 평안한 것인가?”
“정직하고 선한 사람들은 왜 고난 당하는가?”

어떤 분들은 이런 현실에
엄청나게 분노합니다.
’하나님이 없다‘ 하고
’이런 하나님은 선한 신이 아니다‘라고
하늘에 주먹질을 합니다.

저도 이런 분들의 마음을 백분 이해합니다.
나름 절망에 빠졌고
지금까지도 여전히 어려운 가운데 있으면서!
저도 참 많이 기도했거든요.
말씀 붙들고서는
위급한 가운데 하나님의 도우심을
얼마나 간구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요…
지금 와서 보면
하나님의 도우심보다는…
‘결국 나 혼자 떠 안고 감당한 것 아닌가?’
이런 생각에 사로잡히기도 합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도우심과 선하심에 대해서
의심하거나
하늘에 주먹질하지는 않습니다만,
섭섭한 마음이 없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요!
예레미야가 그랬습니다.
부정적인 감정에 사로잡히지 않았습니다.
방금 예레미야의 기도인
예레미야12장 1절 앞에 보면요!
앞서서는 보지 않았는데…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호와여
내가 주와 변론할 때에는
주께서 의로우시니이다!
예레미야는
자신의 좁은 지식과 인식으로는
결코 하나님의 전지하심과
크심을 이해할 수 없다고 인정했습니다.
지금 내가 생각할 때에
내 생각이 옳은 것 같고
내가 더 정의로운 것 같을지라도!
하나님 앞에 ’서면‘
내 생각을 내려놓겠다는 겁니다.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이
’절대적으로 의로우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태도로 하나님 앞에 서 있을 때에야!
진정으로 하나님의 뜻을 찾을 수 있을 터입니다.

실제 그랬습니다.
예레미야가
경외하는 마음으로(이런 태도를 경외라고 한다면)
하나님 앞에 섰을 때에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오늘의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5절입니다.
“만일 네가 보행자와 함께 달려도 피곤하면
어찌 능히 말과 경주하겠느냐?
네가 평안한 땅에서는 무사하려니와
요단 강물이 넘칠 때에는 어찌하려느냐?”

사람이 말과 경주한다는게
가당키나 한 일입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말과 달리는 사람‘으로 쓰겠다 하시는 겁니다.

지금 겪고 있는 일이요?
정말 힘들고 어려울지 몰라도!
그건 그저 ‘보행자와 달리는 일‘일 뿐입니다.

그리고 다른 표현으로…
지금 그가 겪고 있는 일은
다가올 일들에 비한다면
오히려 ’평안한 땅‘의 일일 뿐입니다.

앞으로 예레미야가 감당해야 할 일은
’요단강이 넘치는 듯한‘
훨씬 더 크고 엄중한 일입니다.

그 일이 어떤 일입니까?
내가 죽고 사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이
가족 먹여 살리는 일보다 급박한 일이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그러나 있습니다.
바로!
인간의 영혼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영원한 지옥형벌에서
영원한 생명 천국으로 인도하는 일입니다.

예레미야는!
세상에 구원을 주실 분!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예표하는‘
몇 안되는 사람중 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가 전하는 말씀과 그의 행위는
남 유다를 넘어
온 인류에
참 기쁨의 좋은 소식이 될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단지 사람과 대적하는 사람이 아니라
어둠 세상을 주관하는 마귀를 대적하는
하나님의 참 일꾼이 될 것입니다.

그야말로!
’말과 경주하고‘
’넘치는 요단강을 정복하는‘
하나님의 군사가 될 것입니다.

이것이 예레미야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요 뜻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예레미야의
현재 고난을 감하지 않으실 겁니다.
예레미야는 다가오는 모든 고난을
온 몸으로 맞아야 합니다.
울고 또 울어야 합니다.

그 눈물이!
예레미야를 예레미야로 만들 것입니다.
그를 ’눈물의 선지자‘로 만들 것입니다.

물론 저도 고난이 싫습니다.
’고난 당하는 것이 내게 유익이라?‘
그렇게 여기고 싶지 않습니다.

생각해보세요.
고난이 왜 고난입니까?
피할 수 있다면 그건 고난이 아닙니다.
피할 수 없고, 어쩔 수없기 당해야 하기에
고난입니다.
’억지로 지는 십자가’입니다.

지금 고난중에 계신가요?
그렇게 기도하고, 마음을 낮춰도
무엇하나 해결되지 않고,
모든 것을 나 혼자 감대하고 있다 생각하시나요?

만일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오늘의 말씀을 하신다면
어떻게 반응하시겠습니까?

”만일 네가 보행자와 함께 달려도 피곤하면
어찌 능히 말과 경주하겠느냐?“


‘말과 경주할 사람’으로 만드시려고…

그게 하나님의 뜻이라면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하나님께서 기어이 그리 만드시겠다면
괜히 뻗대지 마시고요….
하나님이 이끄시는대로 가는 것이
지혜 아닐까요?
아니면 끌려서라도 가야 할텐데 말입니다.

“말과 경주할 사람!”이라 했습니다.

고난 가운데 힘들어하시는 여러분!
아무리 기도해도 해결되지 않는
어려움을 호소하시는 여러분!

어쩌면 하나님은!
여러분을 이런 사람으로 만들
계획이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견디세요.
힘들더라도 견디십시오.
인생을 포기하거나,
그냥 던져버리지 마세요.
하나님의 뜻을 더 열심히 찾고
그의 말씀을 듣고
기도하십시오!

맷집이 커지고, 폐활량이 많아지고,
근육이 늘어날 겁니다.
감당할 힘과 능력이 점점더 많아질 겁니다.
그리고 어느순간!
우리는 말과 달리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날을 바라보며!
오늘을 이겨내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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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3학년 때 처음 목사의 꿈을 꾸고
처음으로 제대로 된 공부를 시작했고
인문계 고등학교를 진학해서
총신대학교를 거치고
총신 신대원을 나와서
목사 임직을 받았다.

목사의 꿈을 꾸고
목사가 될 때까지
참 많은 시간이 걸렸다.

그렇게 목사가 되었고
목사로서 15년을 살아왔다.

그동안에 아이도 셋 낳아 키우면서
오랜 부교역자 생활을 마무리 하고
담임목사가 될 참이었다.

그 때 까지는
모든 것이 순리대로 된다고 생각했다.
이 길에 들어선 사역자들이
일반적으로 가는
그래도 성공적인 커리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에!
전혀 생각지 못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담임목사로 지원했던 교회에서
청빙 공동의회가 통과 되었고
담임목사 청빙서까지 받아들었다.
사역했던 교회에서는
담임목사로 사역하기 전에
조금이라도 쉬어야 한다고
빠르게 사임을 시켜주었다.

사임을 하고!
청빙한 교회로 가기 전에
막판 조율을 하다가
가고자 하는 교회와
이야기가 삐걱거리기 시작한 거다.

자세한 사항을 적기는 어렵지만
정리하자면,
이 교회는 이전 담임목사님들이
재정문제, 사모님 문제 등으로서
교회에 많은 상처를 주었고,
그만큼!
새로 오는 담임 목사에게
이런 저런 요구들을 하셨다.

교회도 그만큼 어려움을 당했기에
여러 요구를 할 수 있다고
나도 생각은 한다.
그러나 나는 나다.
처음부터 이런 요구에 끌려 다니는 건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나대로의 선을 그었고,
앞의 목사님들처럼 하지 않을 거라고
나는 오히려 더 잘 할 수있다고
그렇게 장로님들을 설득하려 했다.

잘 이야기하면 장로님들도
납득해주실거라 그렇게 기대했다.

그러나
결과는 전혀 생각지 못했던 것이었다.
’청빙 취소‘라는 문자를 받게 된 것이다.

이 문자를 받을 때까지도
나는 내가 어떤 상황에 처한건지
깨닫지 못했다.
그냥 청빙이 안되었을 뿐이라는
안이한 생각 뿐이었다.

그 이상의 문제였다.
나는 벌거벗은 채로
교회 밖, 사회로 던져진 것이다.

내 통장으로 매달 들어오던
사례비가 더 이상 없었다.
아이들 밥 먹일 돈도, 학원에 보낼 돈도
진학한 학교 교복 살 돈도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게 되었다.

48세의 나이는 정말
잔인한 나이였다.
부목사로 가기에는 너무 많은 나이다.
어느 교회도 이정도나 나이먹은 사람을
써줄 곳이 없었다.
그렇다고 담임목사를 지원하기에는
너무 벅찼다.
이번까지 나는 100통이 넘는
담임목사 이력서를 썼다.
그만큼 좁고 어려운 길이
담임목사가 되는 일이었다.
게다가 담임목사 이력서를 내려면
적어도 현재 사역을 하고 있어야 했다.
그래서 담임목사 이력서 첨부 서류에는
사역하고 있는 교회의 주보 4주치를 내야 한다.
이것조차도 불가능하게 되었다.

이제 교회로 돌아갈 가능성은 거의 없다.
이 날 이 때껏 한 것이
교회 일이었는데…
그 외에 다른 일들은 전혀 경험이 없었는데…
이제 전혀 경험해보지 않은
무언가를 해야 했다.

그것도 빠르게 해야 했다.
적은 사례비였기에
모아둔 돈도 없었고,
퇴직금도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루 하루 한 주 한 주가
너무 빨리 지나갔고
카드 사용내역은 순식간에 불어났다.

다음달 카드 값은 어떻게 값아야 하나
마음이 급해지니 시야가 좁아졌다.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는 듯 했다.
유튜브를 찾아보니
온통 ‘쿠팡 물류 센터‘ 아니면
’평택 고덕 삼성 반도체 건설 노가다’였다.
이것말고는 선택지가 없는듯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럴 때일수록 사람들을 더 만났어야 했다.
좀 더 많은 가능성들을 알아봤어야 했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그런 생각조차도 사치였다.

처음에는 ‘쿠팡 물류센터’ 의 문을 두드렸다.
’누구나 간단한 업무로 361만원이라는 말이
그래도 위안이 되었다.
361만원이면 목사 15년차까지도
받아보지 못했던 수입이었다.

그렇게 ’쿠팡 웰컴데이‘를 참석했다.
그리고 알았따.
361만원을 받기 위해서는
많은 조건들이 충족되어야 했다.
밤을 꼴딱 새는 야건 업무를 해야 했고,
이런 저런 프로모션에도 해당 되어야 했다.
그렇지 않고 일반 낮의 업무만 할경우에는
생각보다 너무 적은 비용이었다.
우리 가족이 지출해야 하는 고정 비용 정도
채울 정도였다.
그렇다고 매일 야간업무를 하기에는
내 건강이 못따라줄게 분명했다.

이정도로는 안되겠다 싶었다.
그러던 차에
어디선가 받았던 명함이 눈에 띄었다.
‘평택 고덕 삼성 반도체 잡부’를 모집하는
팀장님의 명함이었다.
거기에 보니
일당이 굉장히 쎘다.
일당이 17만원이었다.
일당을 1공수라고 했는데
오전 7시에서 오후 5시까지 1공수
거기서 두시간 더 하면 1.5공수
그리고 거기서 두시간을 더 하면 2공수였다.
2공수로 하면
일당이 34만원이다.
‘이건 대단하다’ 싶었다.
곧바로 그분에게 전화를 했다.
그분도 내 전화를 매우 반가워했고
즉시 몇가지 자격을 갖추라고 했다.
하나는 ‘건설업 기초안전보건교육’을 받고
이수증을 받으라는 거였고,
또 하나는 ’한국 비계기술원‘이라는 곳에가서
비계 관련 교육을 받고 이수증을 받으라 했다.
이거 다 돈드는 일이다.

건설업 안전보건 교육비는 5만원
비계 교육비는 7만원이었다.
헐…
백수에게 있어서는 적은 돈이 아니다.
그래도 앞으로 받을 돈을 생각하면
마중물이라 생각할만했다.
그래서 교육을 다 받았다.

그런데!
막상 교육을 받고 날짜가 되었는데
현장 팀잠에게서 연락이 왔다.
’삼성 현장에 슬로우다운이 걸려서‘
일이 없어졌다고
오지 말라는 것이었다.

아… 이것만 기대했는데
이것도 답이 아닌듯 했다.
예전에 한창 잘 될 때 돈이 괜찮았고
지금은 언제 분위기가 바뀌어도
이상하지 않은 것이었다.

이러면서 벌써 3주가 그냥 지나가 버렸다.
그동안에는 자동차로 쿠팡이츠 배달을 하거나
쿠팡 캠프에서 일일 헬퍼를 지원해서
그날 그날 일을 했다.
물론 얼마 안되는 돈이었고
기름값도 상당히 들었다.

이제는 큰돈 이런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건
안정적인 수입이었다.

그제서야 주변을 돌아보았다.
고등학교 동창들과도 연락하고
나와 비슷한 환경에 먼저 놓였던
선배들에게도 연락했다.
그리고 이런 저런 일들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물론 많은 수입은 아니었지만
확실히 안정적인 수입원이 될 것이었다.

그중에서
사업을 하는 한 친구가
자기 회사와 연결된 기업 사장님을
연결해주었고,
그 계기로
취업 계약을 앞두고 있다.

한동안은 천안에 있는 공장에서 일할 것 같고
거기서 인정 받으면
서울에 있는 사무실로도
올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수입은 충분하지는 않지만
하는 것에 따라 미래 가능성이 열릴 수 있는
그런 일이다.

이제 내일 모레면 일을 시작할 것이다.

이 모든 일이!
한달 약간 넘는 기간동안에 있었던 일이다.

사람이 이렇게 피폐해질 수 있는 가 싶은
그런 시간이었다.

그동안 들었던 몇가지 생각들을 정리해보겠다.

1. 목사로서 오랜시간 설교해왔던 것과
실제 삶의 괴리에 대한 것이다.
물론 나는 목사가 세상의 모든 것을
다 경험해봐야 한다는 것에는 반대한다.
세상을 경험해보지 않고 설교하는 것은
가짜라는 말에 단호히 반대한다.
오히려 세상의 일들에 너무 노출되면
하나님의 말씀을 타협할 위험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에 군급한 상황에 놓여 있으면서
이 모든 순간에 ‘하나님을 찾았지만’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듯한’
‘결국 내가 해결하고 있는 듯한’
이런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는 건
인정하겠다.
그래서 하나님께 대해서 순간 순간
섭섭한 마음도 들고
하나님을 찾으면 다 해결된다는 식으로
설교해왔던 것이 얼마나
무책임한 말이었는지 돌아보게 되었다.
그렇게 말 하면 안되는 거였다.
어쩌면 더 깊은 적용거리가 있었을 것이다.

둘째. 가까운 사람들에 대한 것이다.
정말 어려운 상황이 되니
내게 필요한 사람과 필요없는 사람이
확연히 드러났다.
말만하는 사람과 실질적 도움을 주는 사람이
달랐다.
평소에 내 편이라 생각하고, 의지했던 사람이
막상 내가 어려운 상황에 놓였을 때
이런 저런 말만 늘어놓았다.
‘이런 때에 어려운 사람 마음을 알아야 한다’든지
’세상 사람 어떻게 사는지 경험해봐라‘든지
이런 건
내가 ’다시 목사로 돌아갔을 때‘에나 소용이지
지금 목회로 돌아갈 가능성이 거의 없는 상황에서는
쓰레기와 같은 말에 불과하다.
욥의 세 친구가 생각났다.
정말 말만하는 친구들…

“[욥16:1-2]
1 욥이 대답하여 이르되
2 이런 말은 내가 많이 들었나니
너희는 다 재난을 주는 위로자들이로구나”


그렇다… ‘재난을 주는 위로자’
그런 친구들이 있던거다.

반면에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어떤 분은!
내 안타까운 소식을 듣고
카톡으로 얼마간의 비용을 보내주었다.
가족들하고 맛있는 거라도 먹으라고
10년 넘게 연락도 없던 사이였는데
어렵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기꺼이 지갑을 열어주는 사람이었다.

비용을 떠나서 이런 것이 얼마나 큰
위로가 되었는지 모른다.

이건…
내가 다시 목사가 되든 그렇지 않든
‘사람으로서‘
이런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정말 배운 일이다.

재난이 아닌 도움을 주는
위로자가 되자!

자. 이제 모레부터는 일을 시작한다.
어떤 일일지, 어떤 사람을 만날지 모르겠지만
한동안은 열심히 배우면서 일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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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시편121편1,2절

 

이 시의 제목은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입니다.

 

우리로 생각하자면

주일에

교회에 가면서 

부르는 노래라고 생각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표면적으로 생각하면

주일에 교회에 간다 생각하면

기분이 좋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 예배하러 가는 길'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좋을 일일 겁니다.

 

그러나,

그 사람의 현실 형편이 

그리 좋지 않다면 어떨까요?

 

40대에 실직을 했다거나

큰 병에 걸렸다거나

가족간에 문제가 생겼다거나

내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여러 문제를 만났다면

교회에 가는 길이 

마냥 즐겁기만 할까요?

 

제가 경험했을 때는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예배를 드리러 가는 중이나

예배를 드리는 중에 조차도

온통 당면한 문제가 

머릿속을 휘젓습니다. 

 

오늘 시인이 보면

딱 그런 형편인 것 같습니다. 

 

그냥 보면 

목가적이고, 즐거운 분위기일 것 같죠?

그래서 예전 찬양 중에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라는 찬양이 밝고 경쾌했습니다.

 

그런데말입니다. 

이 말씀을!

121편 전체 말씀을 

곱씹어서 다시 찬찬히 읽어보세요.

 

시인이 과연 형통하고 즐거운 상태일까요?

아무 걱정없이 행복한 상태일까요?

 

만일 그렇다면!

'나의 도움'을 말할 이유가 있을까요?

 

시인은요!

'내가 산을 향하여' 

즉 '성전을 향하여' 눈을 들고서는!

'나의 도움'이신 

'하나님'을 찾고 있는 겁니다. 

 

시인이 매우 힘든 지경이라고 

설정하고서

다시 이 본문을 읽어보세요.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시인은 도움을 구하고 있는 겁니다.

 

6절에 보시면!

"낮의 해가 너를 상하게 하지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지 아니하리로다"

라고 하는데,

이 말이 보여주는 건 뭘까요?

'낮의 해와 밤의 달이'

시인을 해 하려는 세력이더라는 겁니다.

 

즉, 낮에도 밤에도 

위협과 환난이 계속되었다는 거죠.

 

해결되지 않고,

해결의 방법도 보이지 않는 때면!

낮이고 밤이고 

스트레스로 얼마나 고통을 당합니까?

 

사실 저도 그렇습니다. 

40대 후반에 백수가 되고

세 자녀 먹여살릴 일 생각하면

밤낮 스트레스가 얼마나 심한지...

피부도 다 상하고, 

귀에서는 이명이 들리고...

자기 몸까지 상하게 만듭니다.

 

시인의 상황이요.

저보다 더 했으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이런 상황에서

시인은 '나의 도움이신 하나님'

그분만을 바라며 

성전에 오르고 있는 겁니다. 

 

정말 중요한 건 이겁니다.

그 시인이 바라보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시던가요?

2절입니다.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하나님은 '천지를 지으신 분'입니다.

앞서 

'낮의 해와 밤의 달'이 

해하려 했다 그랬는데,

하나님은 '해와 달'을 

만드신 분이고,

또한 다스리시는 분이십니다. 

 

바로 그분이!

'나의 도움'이라 하는 겁니다.

 

여러분!

시인은요!

2절에서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라 했습니다. 

 

창세기 1장에 천지 창조 이야기를 보면!

여기서는 하나님의 이름을

'하나님'이라고 불렀습니다. 

'엘로힘'이라고 했다는 거에요.

'전능의 하나님'이라는 말이죠.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면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이 아니라 '여호와'라 했습니다.

 

'여호와'라는 이름은 '언약'의 이름입니다.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는 

모든 언약의 상황에 '여호와'라는

이름을 사용하셨습니다. 

 

사실상 

'천지를 지으신'과 

'여호와'는 

유대인들이 볼 때 어색한 표현이라는 거죠!

 

그러나 우리가 볼 때는 그렇지 않습니다.

'여호와' 

그 '언약'의 하나님은

'예수님을 보내사' 

'언약을 다 이루셨습니다.'

 

'독생하신 아들' 예수님을 내어주시는

엄청난 사랑이 있을진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않을까요?'

(로마서8:32)

 

자신감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자신감이에요.

 

그렇기에

'자신의 근심을 가지고

하나님을 찾으며 성전에 오르는 시인'은!

1,2절까지만 '자신을 위해' 하나님을 찾고!

 

3절 부터는 독자에게 권면을 하는 겁니다.

3절부터 보시면요!

온통 '너'입니다.

"여호와께서 '너를'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이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5절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이시라"

7절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하게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로다"

 

저도 그렇습니다.

오늘 주일!

저는 저의 근심을 지고 

저의 도움이신 여호와를 구하며

예배의 자리로 갈 겁니다.

 

그러나!

저는 여러분을 축복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지키시는 분'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발걸음이 무겁고

견디기 힘들지라도!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이

'여러분'을 지켜주실 겁니다.

 

오늘 예배 가운데!

이러한 확신으로 

다시금 일어서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

같이 힘내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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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FA시장에 나온 후
가족을 먹여살리기 위해서
일용직을 알아보는 중입니다.

그런데 요즘 건설 경기도 안좋아서
일도 안나오네요.
전 날에 일을 잡지 못하면
당일에는 아예 일거리가 없습니다.

이련 현실 속에서
오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예수님의 포도원 주인 비유인데요.
포도원의 주인이
먼저 컨택된 품꾼들에게
한 데나리온을 약속하고
포도원에 들여보내죠.

그랬는데, 세시간 뒤에 나가보니
일이 없어서 놀고 있는 사람이
있던 겁니다.
은혜로운 주인은
이들을 불러서 포도원 일을 시켜줍니다.
(정말 은혜롭네요)

놀랍게도 주인은
또 세시간 뒤,
그리고 일을 마치는 세시간 뒤에
다시금 나와서
그곳에 있는 일꾼들에게
일을 시켜줍니다.

일단, 일을 시켜주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은혜라는 걸
지금의 저는 압니다.^^

그런데...
더욱 충격적인 사건은
그 다음에 벌어집니다.

일과를 마치고
주인이 마지막에 들어온 사람들 부터
품삯을 주는데!
맨 마지막에 온 사람에게
'한 데나리온'
즉 '하루 종일 일 한 사람에게 약속된'
품삯을 준 겁니다.

첫 타임부터 일한 사람은
기대가 되었지요.
'마지막에 온 사람이 한데나리온이라면
우리는 얼마나 더 받게 되는 걸까?'

그러나 주인은
모두에게 똑같은 품삯을 주었습니다.
다 '한 데나리온'입니다.

첫타임부터 일 한 사람들은
화가 났습니다.
네!
화가 나는게 당연한 일입니다.

이에 대해!
주인은 이렇게 말했답니다.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네...
주인이 자기 돈으로
마음대로 하겠다는데
일 한 사람이 뭐라 하겠어요?
그래도...
처음부터 일 한 사람은
화가 나는 겁니다.

자, 다들 같은 생각이실 겁니다.
"예수님은 도대체 이 말씀을
어떤 의도로 하신 걸까?"

사실 이 예화의 배경에는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의 질문이
있습니다.
베드로는 열 두 제자가
처음부터 예수님을 따랐고
예수님과 함께 동고동락했으니
자기들에게 어떤 보상이 있을지를
여쭤 보았습니다.

"이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사온대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마19:27)

자기들은 처음부터 예수님을
따랐고 헌신했으니
다른 모든 사람들보다
자신들이 받을 보상이
클거라 생각했던 겁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오늘의 예화를
말씀하셨고요!
그 결론으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마20:16)"

예수님의 말씀은 이런 겁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먼저 생각하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라는 건!
애초에 사람에게
허락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구원과 생명, 영생의 복'이라는 건
그 어떤 것으로도
값을 치르거나, 값을 수 없는
성격의 것입니다.

애초에!
하나님이 포도원 일꾼으로
불러주신 것 자체가
한량없는 은혜인 겁니다.

그렇기에!
포도원의 일꾼들은
어떤 사람이든지!
주신 은혜의 크기를 생각하고
전적으로 감사했어야 합니다.

이 당시의 베드로는
바로 이점에서 실패했습니다.
'내가 이만큼이나 했으니까
하나님이 그만한 보상을 주실거라'
기대했습니다.
나보다 늦게 믿은 사람이
나보다 복 받는 건
불의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건 잘못된 생각이었습니다.
오히려!
마지막에 구원 받은 사람은!
자기가 받은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알기에
그 은혜에 오로지 감사할 것입니다.

그러나 처음 부터
택함 받은 일꾼은
자기가 받은 은혜는 잊은 채
자신이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면
불평 원망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결론을
생각해보세요.
"나중된 자로서 먼저되고
먼저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이 말씀은 저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사실,
저는 목사로서 다른 누구보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열심을 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보상해주시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했고요.

지금과 같은 실직자 상태가 되는 것이
부당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감사하지 못했고
두려워했고, 분노했습니다.

감사하는 마음,
구원의 기쁨,
한량없는 은혜에 대한
마땅한 반응은 없었습니다.

처음된자가 나중된 것입니다.

그래요.
제게는
하나님이 이미 주신 은혜가 있습니다.
물론 미래가 불안합니다.
손에 잡히는 것이 없어 두렵습니다.

그러나 제게는 '은혜'가 있습니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가
저와 함께 하십니다.

이미 포도원 일꾼으로 불러주신 그분께
저의 처신을 맡겨드리고
지금 할 수 있는 일에
그저 순종해야겠다고
그리 받아들입니다.

'처음 된 자'가 아니라
'나중된 자'의 마음으로
다시금 옷깃을 여밉니다.

여러분!
포도원의 주인을 의지하여
함께 어려운 시간을
이겨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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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14편은 

'출애굽 때의 영광'을

노래하는 시입니다.

 

1절에 이렇게 말하죠.

"이스라엘에 애굽에서 나오며

야곱의 집안이 언어가 다른 

민족에게서 나올 때에"

 

이 시의 저작 시기가 

출애굽 이후로 700년이나

후대랍니다. 

 

그 많은 시간이 지나도

출애굽 사건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중요한 사건이었던 겁니다.

나라의 위기 때마다,

힘들고 어려운 순간마다!

이스라엘은 '출애굽'을 떠올렸습니다.

 

그런데!

2절에 보면 신기한 이야기나 나옵니다.

"유다는 여호와의 성소가 되고

이스라엘은 그의 영토가 되었도다"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이 

하나님의 영토가 되었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는 고백인데

이건 이해가 되죠.

그 앞에.

'유다는 여호와의 성소가 된다'는 말은

뭘 의미하는 걸까요?

 

'성소'는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장소입니다.

다른 말로 '임마누엘'의 장소죠.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겁니다.

그런데 '유다'가 그렇답니다.

뭘 이야기하고 싶었던 걸까요?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메시야가 유다의 자손으로 

오신다는 것입니다.

유다에게서 이스라엘의 왕이

날 것입니다.

유다 출신의 위대한 왕은 다윗이죠.

예수님은 '다윗의 자손'이 

될 것입니다.

 

'유다는 여호와의 성소가 되고'라는 

말씀은 

결국 메시야이신 예수님의 때를

바라보는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자, 유다가 

온 이스라엘의 앞에 섭니다.

우리로 이야기해볼까요?

예수님이 우리 성도의 

앞에 서십니다!

 

무슨 일이 벌어질까요?

 

3절!

"바다가 도망하며 

요단은 물러갔으니!"

바다가!

'도망했답니다' 

 

이건 분명 '홍해가 갈라지던 

출애굽 사건'입니다. 

홍해가 '도망한 것'은 

누구를 보았기 때문인 걸까요?

 

우리가 지금까지 살핀

바에 따르면!

'예수님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4절에서

"산들은 숫양같이 뛰놀며

작은 산들은 어린 양들 같이 뛰었다"

시내산에서 

하나님이 임재하셨던 그 날

산이 크게 흔들렸다 했습니다.

'지진처럼 무시무시한 사건'을

시인은 '산이 기뻐 뛰노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왜요?

예수님이 임하셨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인가요?

과거 출애굽의 사건이라는 게!

단순히 

'이스라엘 민족'만의 특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시편114편이 '예수님의 이야기'라면!

우리와 함께 계신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 역시도

엄청난 위로와 격려, 새 힘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 역시도!

쓰나미와 같은 거대한 물과

큰 산의 흔들림 조차

두려워하지 않을

하나님의 능력을 

기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 등 뒤에는

세상 끝 날까지 우리를

떠나지 않으시는 

예수님의 능력이 있습니다. 

 

힘을 냅시다.

용기를 냅시다. 

이 믿음으로

오늘도 두려움을 이겨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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