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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16:3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네가 경영하는 것이
이루어지리라"

성공한 사람들이 쓴 글을 읽어보면
성공의 비결로
보통 세가지를 이야기합니다.
'성실, 공부, 노력'이 그것입니다.

명지대학교 창립자이며
통일부 장관을 지낸
유상근 교수는 항상 제자들에게
이것을 가르쳤다고 합니다.
"성 실 유 능"

성실하고 유능한 사람이
성공할 수 있다는 다르침인거죠.

그런데!
의외로 성공한 사람들이 말하는
의외의 조건이 있습니다.
어쩌면 그들에게는 이것이
더 중요해보이기도 합니다.

'운'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노력해도
국제 정세라든지, 생각지도 못했던
어떤 계기 때문에
사업이 도약하게 되더라는 겁니다.

고개가 끄떡여지는 부분입니다.
사실 '성실, 유능'하고도
좋은 기회를 얻지 못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요.

자 그렇다면!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운'이라는 걸
신앙인들은 뭐라고 말할까요?

'하나님의 섭리'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의 역사, 또는 응답'이라고도 하지요.

소위 '운'이라고 하는 것보다
훨씬 더 확실하고 신뢰할만한 요소
아니겠습니까!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다면
우리는 훨씬더
우리의 성공을 확신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기도해야하겠죠.
하나님의 '섭리와 응답'은
기도의 동역으로 이루어지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새로운 해를 맞이하는 여러분!
새해에는 마음을 열고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어떤 상황에도
자포자기 하지 마시고
기도하세요!

분명 어려움이 있을 겁니다.
오늘 본문 말씀 바로 다음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잠언16장4절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쓰임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쓰셨다?
하나님이 이루시는 행사에!
'악인'도 있고 '악한 날'도 있다 하십니다.

그러나!
그것은 의인인 성도를 망하게 하려는게 아닙니다.
이 일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려 하시는 겁니다.

그걸 잘 알 수 있는 예가 있습니다.

페르시아 포로였던 '느헤미야'가
고향 예루살렘 땅이 황폐하다는 소식을 듣고
마음에 근심이 되었습니다.
근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하다보니
얼굴이 수척해졌습니다.
느헤미야의 직업이
왕에게 술 따르는 관원장이었는데,
왕이 느헤미야의 얼굴을 보고 묻게 되지요.

느헤미야2:2
"왕이 내게 이르시되 네가 병이 없거늘
어찌하여 얼굴에 수심이 있느냐
이는 필연 네 마음에 근심이 있음이로다"

신하가, 그것도 왕이 먹을 것을 관장하는 신하가
얼굴에 수심을 보이는 것은
반역을 꾀한다는 의심을 받을만한
행동이었습니다.

굉장히 위험한 상황이 닥쳐왔습니다.
이러한 위기의 순간에!
느헤미야가 어떻게 했는가 보세요.

느헤미야2:4하
"내가 곧 하늘의 하나님께 묵도하고...
왕에게 아뢰되...."

그 순간 하나님께 묵도하여 기도했습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이 지혜를 주셨습니다.
지혜롭게 대답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왕의 마음을 돌리셨고!

오히려 예루살렘에 성벽을 세울 수 있는
엄청난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신 겁니다.'

새해를 맞이하며!
여러분
우리에게는 '운'이 아닌
'하나님의 섭리'가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며
살아가다보면!
"네가 경영하는 것이 이루리라"하셨던
이 말씀이 우리 삶속에서
성취되는 것을
경험할 줄 믿습니다.

2024년!
한 번 더 힘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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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2:16
"이에 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은 줄 알고
심히 노하여 사람을 보내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아이를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본
그 때를 기준하여 두살 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니"

예수께서 태어나신 성탄의 날
그로부터 얼마지 않아
베들레헴에는
끔찍한 영아 살해의
범죄가 일어났습니다.

이스라엘의 왕이 탄생했다는 소식에
당시 유다의 왕이었던 헤롯은
분노했습니다.
새로운 왕을 용납하지 못했습니다.
어떻게해서든지
예수님을 찾아내어 죽이려 했습니다.

하나님의 사자는
아기 예수의 아버지 요셉에게
그곳을 떠나 애굽으로 피하라 하십니다.

마태복음2:13절
"그들이(동방박사) 떠난 후에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현몽하여 이르되
헤롯이 아기를 찾아 죽이려 하니
일어나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애굽으로 피하여
내가 네게 이르기까지 거기 있으라 하시니"
그렇게 애굽으로 피했습니다.

그리고 이 일에 대해서!
성경은 신기한 이야기를 하십니다.

마태복음2:14,15절
"요셉이 일어나서 밤에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애굽으로 내려가
헤롯이 죽기까지 거기 있었으니
이는 주께서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애굽으로부터 내 아들을 불렀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라"

아기 예수님이 애굽으로 피하신 것은
출애굽의 실체화라고 하신 겁니다.

표면적으로만 보면!
예수님이 애굽에 가셨다가
이스라엘로 돌아오시면
그게 '출애굽이겠거니...' 싶잖아요?
그런데...
막상 내용으로 보면!
오히려 반대입니다.

에수께서 애굽으로 피한 후에!
결국 예수님을 찾아내지 못한 헤롯왕이
끔찍한 죄를 짓습니다.

마태복음2:16
"이에 헤롯이 박사드에게 속은 줄 알고
심히 노하여 사람을 보내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 아이를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본
그 때를 기준하여
두살 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니"

두살 아래의 사내 아이를 다 죽였더라...
이거...
어디선가 봤던 장면 아닌가요?

그렇습니다.
그 옛날
애굽왕 바로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박해할 때에
남자 아이가 태어나면
모조리 죽였던 그 일의 반복인 겁니다.

예수님은
그 옛날 모세처럼!
'왕의 폭력을 피해서'
애굽으로 피하게 되신 겁니다.

그렇게 봤을 때...
여러분
실질적인 애굽은 어디입니까?

예수님이 피난하신 곳입니까?
예수님이 칼을 피해 떠나신 곳입니까?

아이러니하게도!
이 말씀에서 애굽은
'이스라엘'이었습니다.

이게 무엇을 말하려는 걸까요?

동방박사들은 이방인이
하나님 나라에 침노해 들어오는 상징이었습니다.
이방인의 구원 시대가 열린 것을
보여주는 그림이었습니다.

반대로!
예수님을 죽이려는 이스라엘은
하나님 나라에서 멀어지는 상징이었습니다.
옛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아들을 대적함으로서
언약의 배반자들이 되었습니다.

먼저된 자들이 나중되고
나중된 자들이 먼저되었습니다.
마태복음20:16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복음 앞에서
세상에 오신 아기 예수 앞에서
자기의 권세와 기득권을
지키려는 자들은
언약의 배반자들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분 앞에서 겸손하여
올해도
그분의 구원을 기쁨으로 예배하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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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2:1

"헤롯 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성탄절 하면 빠지지 않는 사람들이

동방박사입니다. 

'동쪽 방향에서 온 박사'라는 말이지요.

 

동쪽 어디에서 온 사람인가!

티그리스 유프라테스 유역!

옛 바벨론과 페르시아의 후손입니다.

(대한민국? 아닙니다~^^)

 

그 가능성이 가장 높을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수백년 전 전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패망했을 때!

수많은 유대인이 바벨론 포로로 

잡혀왔던 겁니다. 

 

그 포로들 중에!

신실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참 많았습니다. 

 

먼저는 '다니엘'이 있었지요.

바벨론 시대와 페르시아에 이르기까지

나라가 바뀌어도

계속 총리 대신으로 

그 시대에 영향을 끼쳤습니다.

특히나 느부갓네살 같은 왕은

다니엘의 영향을 받고

'여호와'를 '하늘의 하나님'이라고 

인정하기까지 했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가 있었지요.

그들도 포로로서

동방 나라들의 고관대작을 지내면서

하나님을 인정하게 만들었습니다. 

특히나 그들은

수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우상에게 절하지 않으면서

풀무불 안에 들어가서도

살아난 것으로 

그들의 시대에 

하나님의 이름을 각인 시켰습니다.

 

'죽으면 죽으리이다'했던 '에스더'도,

왕의 술관원으로 예루살렘 성벽을 

건축한 느헤미야도,

페르시아의 지도자 역할을 하면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거했습니다. 

 

그뿐이겠습니까?

이름없는 수많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 포로지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며

많은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을 보여주었을 겁니다.

 

그렇게 수백년이 흘렀고!

하늘에 신비로운 별이 떴을 때

박사들은

다름 아닌 이스라엘의 메시야를

떠올렸습니다. 

단지 이스라엘 민족의 부흥이 아니라!

온 세상의 죄를 사하시러

하나님의 아들이 오셨음을 알았습니다. 

 

동방박사들의 믿음은

어느날 갑자기 '뿅'하고 생겨난게 아닙니다.

수백년 동안 

이방 땅에 잡혀가서도

신실하게 하나님을 찾았던

믿음의 사람들의 

헌신적인 삶의 결과물입니다. 

 

오늘 우리의 믿음도

그래야 하지 않을까요?

어떤 상황이 있을지라도

있는 그 자리에서 신실하게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살다보면

하나님은 우리의 작은 삶도

하나님 나라의 큰 역사를 위해

쓰실 것입니다.

 

성탄의 복된 날에!

나의 삶을 어떻게 살아갈지

다시 한번 

옷깃처럼 여미는 

좋은 기회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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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11:33-35
"예수께서 그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이르시되 그를 어디 두었느냐
이르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나사로의 장례식에서
예수님이 흘리신 눈물의 의미를
생각해보겠습니다.

'눈물에 무슨 의미가 있겠어?
장례식 때 슬퍼하는 사람들과 함께
슬퍼하는 것이 당연한 거 아니야?'라고
답하기 쉽겠습니다만...
생각해보면 그렇지도 않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나사로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진작에 들으셨습니다.
예수님이 계셨던 곳에서
나사로의 집은 그리 먼 거리가 아니었기에
(성인 걸음으로 7시간 거리)
서둘러 가셨다면
나사로의 병은 얼마든지 고치실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수많은 병을 고치셨죠)

그런데!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는 줄 아세요?
요한복음11:6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이틀을 더 유하셨습니다.
그러시고도!
예수님은 서둘로 이동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예수께서 장례식장에 도착하셨을 때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요한복음11:17
"예수께서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지 이미 나흘이라"

죽은지 4일이나 지났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7시간 올 거리를!
거의 3일에 걸쳐서 오셨다는 말이 되는 겁니다.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와 마르다가 얼마나 속이 탔던지!
예수님께 하소연을 하죠!
요한복음11:21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요한복음11:32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가서 뵈옵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이르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

예수님이 즉시 오시기만 했다면!
그의 병을 고칠 수 있었다는 말이에요!

이로보건대!
예수님은 일부러 일정을 지체하신 것입니다.
무엇을 위해서요?
죽은지 나흘이나 되어
썩은 냄새가 나는
나사로를 살리시기 위해서입니다.
실제로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나사로를 살리시고
무덤에서 불러내시죠!

그러니 예수께서
이 장례식장에서 눈물 흘리신 것은!
'나사로의 죽음을 애통해하신 게
아닌게 분명합니다.'

어차피 살릴 사람을 위해서
애통해한다는 게 영 이상하긴 하죠.

예수께서 눈물 흘리신 이유는
다른데 있습니다.
33절에 보면!
"예수께서 그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여기서 '비통히 여기셨다'는 말을
헬라어 원문으로 보면
'엠브리마오마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 의미를 찾아보면!
"말이 전장에서 콧김을 내뿜는다"는 뜻입니다.
이 말을 사람에게 적용하면
"분노, 격노, 격분하다"는 뜻이 됩니다.

무슨 말일까요?
지금 예수님은
죽은 나사로 때문에 '감상에 빠져서'
우신게 아니라는 겁니다.

지금의 상황에 분노하고 계신다는 겁니다.
어떤 상황이요?
방금 읽은 33절을 보세요!
'마리아의 울음과
함께 있는 유대인들의 울음을
보!시!고!'
분노하셨습니다.

장례식을 가보신 분은 알겁니다.
장례식 때에 여러 순서가 있습니다.
'입관, 발인, 화장, 하관' 등의 순서인데요,
대부분 순서순서마다
유족들이 얼마나 비통하게 우는지 모릅니다.
어떤분들은 너무 우시다가 실신하시기도 합니다.

죽음의 고통입니다.
죽음이 사람의 심령을 이토록이나
무너트린다는 겁니다.
무엇으로도 위로할 수 없는 절망이!
사람들의 심령을 사로잡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모습을 보시며
그들로 인해 분노하셨습니다.
무엇을 향해서일까요?
'죽음' 그 자체입니다.
그리고
'죄의 삯은 사망이라 했으니'
세상에 사망을 불러온 '죄'에 대해서 말이지요.

죄의 짐을 지고
죽음 앞에 쩔쩔매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불쌍했습니다.
그래서 우셨습니다.

그러나 울음은 잠시였습니다.
예수님은
'그 죽음을 정복하러 오신 분'입니다.
인간에게
'천국 영생을 선물로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이 슬픔이 가득한 자리에!
예수님은 '부활의 기쁨'을
맛보여주려 하십니다.

죽은지 사흘이나 되어
냄새가 나는 무덤을 향해 예수께서 외치십니다.
"나사로야 나오라!"

그리고
죽음의 절망은 끝이 났습니다.
장례식장은
'놀라움과 기쁨, 환희, 잔치'의 자리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천국에서 누리게 될 영광입니다.
눈물은 잠시입니다.
우리에게는
주님께서 주신 영원한 기쁨이 있습니다.
이 기쁨은
죽음조차 빼앗을 수 없는!
주님의 선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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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2:11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

예수님을 찾은 동방박사들이
아기 예수께 세가지 예물 드린 일은
워낙에 유명합니다.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드렸는데
한 때는 각각의 예물에 담긴
의미를 참 많이 찾았던 것 같습니다.

다양한 의미를 찾아낼 수 있겠지요.
그러나 그 의미들이 확실한지는
주관적인 영역입니다.

성경학자들은 다른 것에 주목합니다.
‘황금과 유향과 몰약’이
언제 쓰였는지를 찾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찾아온 학자들이
‘동방’ 박사들이라 했습니다.
여기서 ‘동방’이란 ‘고대 근동 지역’을
가리킵니다.

고대 근동지역에서는
높은 사람들을 만날 때에
바로 이러한 예물을 드렸다는 겁니다.

창세기43:11절에 보면
야곱이 ‘자기 아들 요셉이 짐승에 찢겨
죽은 줄로만 알았지, 애굽의 국무총리가
된 줄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고’
자기 열 아들이 ‘애굽의 국무총리’를
만나러 갈 때에
아들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의 아버지 이스라엘이 그들에게 이르되
그러할진대 이렇게 하라너희는 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그릇에 담아가지고 내려가서
그 사람에게 예물로 드릴지니
곧 유향 조금과 향품과 몰약과
유향나무 열매와 감복숭아니라”

이 물품에도 동방박사가 예수님께 드렸던
예물 목록이 들어 있습니다.
‘황금, 유향, 몰약’은 예수께만 특별히 드린
선물이 아니었다는 겁니다.

특히나 고고학자들의 발견은
좀 더 결정적입니다.
‘페르시아(바사) 사람들이 왕을 알현할 때!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주로 예물로 썼다‘
더라는 겁니다.

동방박사들은 확실히
예수님을 ‘왕’으로 인식했습니다.

게다가
왕에게 선물 드리기 전에!
엎드려 아기께 경배했다고 합니다.

이게 무슨 뜻인지 생각해봅시다.

동방박사들이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그들은 예루살렘 왕궁에 들렀습니다.
그곳에는 ‘헤롯왕’이 있었습니다.
그도 ‘왕’이었습니다.
그런데, 박사들은 ‘그 왕’에게는
절하지 않았습니다.
선물 하나도 드리지 않았습니다.

왜일까요?
박사들은 ‘동방’ 즉, 옛 페르시아의
고관대작입니다.
지금은 똑같이 로마의 속국이지만!
여전히 옛 영광에 대한 자부심이 있습니다.

기껏 유다의 분봉왕 ‘헤롯’이 얼마나 가소로웠을까요?
그래서 그 왕 앞에서 당당히 말했죠.
마태복음2:2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이 정도나 되는 자부심입니다.
그런 박사들이!
말 구유!
말 밥통위에 뉘인 보잘 것 없는 아기께
엎드려 경배합니다.
그에게 ‘왕의 선물’을 드립니다.

박사들은!
처음부터 예수님을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구원의 왕’으로 인정했습니다.
자신들을 죄에서 구원하실 ‘메시야’로
믿었습니다.

그분이 누구신지 알았기에!
그 멀고 먼 길을 마다않고 이동했고!
마침내 그분을 만났을 때!
마태복음2:10
“그들이 별을 보고
매우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누구보다 기뻐했습니다.

예수님을 믿어 구원 받은 여러분!
동방 박사들은
지금 막 태어나신 예수님을 보고서도
이렇게까지 기뻐했습니다.
여러분의 기쁨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2000년 전!
예수님을 알아보고
그분을 찾아 온 동방 박사들처럼!
여러분을 구원하러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기쁨으로 예배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유튜브 영상

https://youtu.be/i7saKaGQA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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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에서 일 하다보면

여러 사람들에게 이런 말을 듣게 됩니다.

 

"우리가 헌금하면 어차피 

다 목사님이 가지잖아요."

 

마치, 교회 헌금을 

목사가 다 관리하고

그 헌금을 목사가 

그대로 주머니에 챙기는 것 처럼 오해하는 겁니다.

 

물론 교회 형편에 따라서 

재정 운영 방법은 많이 다릅니다.

 

예를 들어 교인이 스무명 남짓한

개척교회에서는

담임목사가 재정을 관리할 수 밖에 없습니다.

관리해줄 누구도 없을뿐더러

헌금도 많지 않기 때문에 

맡기는 것도 미안할 정도입니다.

이럴 때에라도!

담임목사는 그 헌금을 

고스란히 자기 생활비로 가지지 못합니다.

작은 교회라도 '운영비'는 듭니다.

심방도 해야 하고, 건물 월세나, 

기타 관리비용이 들어갑니다. 

이런 저런 필수적인 걸 떼고서야

본인이 쓸 것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목사님이 다 가져가잖아요."라는 말은

그런 분들에게는 큰 상처가 될 수 있겠지요.

 

이렇게 작은 교회 말고,

조금 규모가 있는 교회의 경우는 어떨까요?

규모가 있는 교회는 

적어도 '정상적인 교단'에 속한 교회들은 

반드시 '조직'을 세우게 되어 있습니다.

교회 직분자들이 있고,

직분자들이 교회의 여러 역할을 하는 겁니다.

 

교인들이 헌금을 하면요!

그 헌금을 '재정부'라는 조직이 

계수하고, 목적에 따라 비용을 분류합니다. 

'목적'은 그야말로 다양합니다. 

교회의 건물이나 규모가 커질 수록

여기에 따르는 '유지비용'은 

당연히 커질 수 밖에 없습니다. 

전기세, 물세, 음향, 비품,

교육부서 운영비, 교육비, 선교비, 

장학금, 구제금, 차량관련비용,

노회나 총회에 올리는 상회비 등등

어마어마한 항목들이 있고요, 

그러한 비용들이 헌금으로 충당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목회자의 사례비가 책정됩니다. 

담임목사가 자기 월급을 결정하는가?

'거의 대부분의 교회'는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에는 '당회'라는 조직이 있습니다. 

특히 '장로교회'에는 반드시

당회가 있습니다. 

당회란 '교회에서 투표로 뽑힌 장로'와 

'담임목사'로 구성된 

교회의 '지도회'입니다.(치리회라고도 합니다.)

장로님은 교역자가 아니고 평신도입니다.

이분들이 모여서 

매년 교역자의 '사례비'(월급)을 책정합니다.

생각보다 

담임목사는 여기서 자기 사례비에 대해서

주장을 잘 못합니다.

왜냐하면 장로님들이 목사를 속물로 여길까봐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이런 문제로 교회에 분란이 생기면

대부분의 경우 담임목사가 책임지고 

사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다보니

목회자의 사례비는 

생각보다 

정말 많이 적습니다. 

평신도의 판단에 

목회자는 '청렴해야 한다'는 인식이 많고

목회자가 돈이 좀 있으면 타락한다는 인식마저도

있기 때문에 

막상 사례금액을 들으면 

사람들이 놀랄 정도로 적은 경우가 허다합니다.

 

담임목사가 그렇다면

부목사는 말할 것도 없지요.

 

부목사 이하

교회의 부교역자 그룹은 

대한민국에 이름난 대형교회가 아니고는

대부분 차상위계층 수준의 생활을 합니다.

(거기에 4대 보험도 안되어서 

혹시라도 사임하게 되면 막막해집니다.)

어디서는 부목사는 좀 불쌍히 여겨주시길...

 

물론 담임목사님들 중에도 

당회와 관계가 좋고

소위 교회를 부흥시켰다거나 하는 

실적이 있다면

그 실적을 인정받아서 

크게 사례비가 인상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교회나 세상이나 숫자 늘리는데 

혈안이라는 건 좀 안타깝습니다.)

 

자 이렇게 놓고 봤을 때!

교회 재정이

목사들 주머니에 다 들어간다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임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압니다. 언론에 나오는 대단한 목사님들

뒤집어 생각하면 그런 목사님들이니까 

언론이 나온 것 아니겠습니까?)

 

또 한가지 알아야 할 것은!

'당회'에서 '재정'을 정한다고 해서!

당회원들이 마음대로 돈을 쓸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당회가 어떤 결정을 하거나 

어떤 일들을 하면

그 일들에 대해서!

반드시!

'제직회'에서 보고하고 통과되어야 합니다.

제직회란 '교회의 모든 직분자들'의 회의입니다.

'집사, 권사, 시무집사'그룹이죠.

교회마다 다르지만 제직회는 

보통 3개월에 한 번씩 합니다.

 

그리고 그보다 더 큰 회의체가 있는데

'공동의회'라는 것입니다.

공동의회는 '교회에 있는 세례교인'

전체의 회의입니다.

직분이 없어도 '세례교인'이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습니다(입교 포함).

1년에 한 번 하는 모임에 

당회는 재정보고와 사업보고를 하는데

 

이분들이 문제 제기를 하면

당회도 곤란해지기 때문에 

교회 돈 쓰는 일에는 신중해지겠지요?

 

오늘 하고 싶은 이야기는!

여러분이 드린 헌금은

정상적인 교회라면

'목사가 다 자기 주머니에 넣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구조로 되어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역자들에게 너무 짜기 때문에

많은 사역자들이 가난에 허덕이고

사모님들이 일을 하러 나가야 하는 처지입니다.

(사모는 일하면 안되냐? 아니요!)

많은 교회들이 사모에게도 

이런 저런 역할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예배 전체 출석이라든지, 심방이라든지

이런 저런 일들...

여기에 대해서는 다른 곳에서 이야기했으니 

https://1min-christianity.tistory.com/35

이쯤해서 줄이도록 하겠습니다. 

 

대부분의 교회들은 

헌금을 웬만해서는 목적에 맞게 쓰고 있다

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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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2:2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 (마2:2)"

동방박사들이 예수님께 경배하러 왔는데
예수님의 탄생을 어떻게 알게 되었는가하면
별을 보고 알았다는겁니다.
그 별이 뭔가 특별했겠다는 건 알겠어요.
그렇다고해서!
별만을 보고
이 동방의 이방 사람들이
어떻게 이스라엘의 메시야 탄생을
알 수 있었던 걸까요?
게다가...
이들은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를 찾습니다.

왕이 '되실'이가 아니라
나실 때부터 '이미' 왕이십니다.
이건 정말 고오급 정보입니다.

그야말로 성경을 잘 알아야
알 수 있는 내용입니다.
(민24:17)
"내가 그를 보아도 이 때의 일이 아니며
내가 그를 바라보아도
가까운 일이 아니로다
한 별이 야곱에게서 나오며
한 규가 이스라엘에게서 일어나서
모압을 이쪽에서 저쪽까지
쳐서 무찌르고 또 셋의 자식들을 다 멸하리로다 "

이 본문은 '한 별'이 나올 것이며
그에게는 '한 규'가 있을거라합니다.
여기서 '규'는 통치의 지팡이입니다.

 

박사들은
구약의 그 수많은 구절에서
이 말씀을 발견했고
그분을 왕으로 인정했습니다.
그래서 '왕으로 나신 이'를 찾은겁니다.

그것도
예수님을 그저 작은 나라의 왕이라
생각했다면
그들이 그 먼 거리를 고생하며 찾아오지도
않았겠지요.
예수님을 처음부터
세상의 죄를 사하러 오신 왕으로
모셨다는겁니다.

그렇다면
동방 어디선가 온 이 박사들은
도대체 어떻게
이 고오급 정보를 알 수 있었던 걸까요?

저는 개인적으로 이 동방을
옛 바벨론 지역
티그리스 유프라테스 유역에 있는
나라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이...
그 옛날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로 잡혀갔을 때
바벨론은 성전에 있는 수많은 물품들을
강탈해 갔습니다.
그 중에는 구약의 성경
필사 두루마리가 숱하게 있었습니다.

그로부터 70년 후에 다니엘이
이 두루마리에서
이스라엘 포로 회복에 대한 예언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다니엘이 예루살렘 방향으로
하루에 세번씩 창문을 열고 기도했죠.
덕분에 사자굴에도 던져쳤습니다.

다니엘에게도 영향을 끼쳤던
그 수많은 두루마리 중에 

얼마간이!

예수님이 태어났던 그 때까지 

옛 바벨론 지역에 남아 있었던 겁니다.

 

그리고 

이 신비로운 별이 나타났을 때!

그들은 수많은 자료들 속에서

구약 성경 두루마리를 발견했고!

그 두루마리 속에서!

'메시야의 별' 예언을 찾아냈습니다.

그분이 어떤 분인지 알아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와!

인간의 타락과!

그렇게 동쪽으로 쫓겨난 인간의 역사와!

메시야 왕의 탄생을 통해!

그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왕은!

자신들을 위해 오신 왕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왕의 나심을 

축하하러 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세명의 동방박사는 믿음의 사람입니다.

믿음으로 구원 받은 사람들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들은 예수님이 오신 후 

첫번째로 구원 받은 이방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보면!

이들은 

모든 이방 그리스도인의 예표라 하겠습니다.

 

 

자! 

그렇다면!

이들은 스스로  구원을 '쟁취해낸' 

'자의 구원자'라고 할 수 있을까요?

누구나 노력하면

이들처럼 구원에 이를 수 있다 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이들이 예루살렘에 찾아가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나신 이'를 찾았을 때에!

정작 이스라엘의 반응은 이상했습니다.

 

마태복음2:3

"헤롯 왕과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한지라"

이들은 당황했습니다.

마치, 일어나지 말아야 할 일을 만난 듯 했습니다.

 

헤롯왕이야 원래부터 에돔 이방 사람이었으니까

그렇다고 치죠.

그 외에 나머지 '예루살렘' 사람들은요?

 

마태복음2:4

"왕이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모아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냐 물으니"

심지어 '대제사장'과 '서기관'들 입니다.

이들은 본래부터 '메시야'를 대망하던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왕이 '그리스도가 나실 곳이 어디냐' 물었을 때!

이에 대한 답도 알았습니다. 

마태복음2:5

"이르되 유대 베들레헴이오니

 이는 선지자로 이렇게 기록된 바"

메시야 나실 곳에 '베들레헴'이라는 것도!

'선지서'라는 성경의 출처도!

다 알았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메시야를 찾아가려 하지 않았습니다.

메시야에게 경배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헤롯왕에게 붙어서!

지금 누리고 있는 기득권을 

계속해서 누리고 싶어했습니다.

 

이들은!

본래부터도 성경을 아는 사람이었음에도!

메시야 예수님의 탄생에 

전혀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무슨 말이냐고요?

하나님이 눈뜨게 해주지 않으시면!

인간은 결코

스스로 하나님을 찾을 수 없다는 겁니다.

결국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자비로운 행위에 있는 것이지!

우리 자신의 어떤 노력이나, 덕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동방박사 세사람이 아기 예수님께 

찾아온 것은!

하나님의 택하심과 섭리와

또 부르심의 결과였습니다. 

 

우리의 구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성탄의 예수님을 경배할 수 있는 것!

구원의 사람으로 오늘을 사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었음을!

다시 한번 기억하고!

말구유 아기께 나아갑시다.

 

유튜브 영상

https://youtu.be/NJ7_JxL9XJ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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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금'이란 

하나님께 헌신으로 드리는 돈을 말합니다.

 

헌금의 가장 큰 이유는

내가 받은 구원에 대한 '감사'이며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의 일에 대한

'동역'의 의미가 큽니다. 

 

그런 의미에서 헌금은 '자발적'이어야 합니다.

억지로 드리는 것은 

하나님께서도 기뻐하시지 않을 일이고

자신에게도 유익이 없습니다. 

 

자발적으로라고는 하지만

아무런 기준도 없는 건 아닙니다.

확실한 기준은 '십일조'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신약시대에 십일조가 폐지되었다 하지만

그렇지도 않습니다. 

성경에서 보통 '폐지'를 이야기할 때는 

'율법'과 관련된 경우가 대다수입니다.

그런데 십일조는요?

율법 이전 부터 있었던 헌금입니다.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이 생겨나기 

한참 전에!

그들의 첫 조상 아브라함이!

예수님을 예표하는 '멜기세덱' 왕에게 

십일조를 한 내용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율법을 성취하신 예수님 자신이!

십일조에 대해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1:42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는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십일조를 드리지 말라하지 않으시고!

십일조를 하되 '공의와 사랑'도 행해야 한다

말씀하신 겁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대부분 교단에서 

헌금의 기준을 이야기할 때는 

'십일조와 감사 헌금을 비롯하여...'라고

가르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십일조'는 

무엇의 십일조일까요?

어떤 분들은 

월급을 받은 후에 

이런저런 내역들을 다 떼고

남아 있는 '생활비'에 대해서만 

십일조를 하면 된다고 말합니다만...

 

성경으로 생각해보자면 

그런 경우는 없는 것 같습니다. 

오히려

농사를 지을 때에

첫 열매를 다 드린다거나!

전부가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고백이 일반적이었습니다.

그렇다는 것은!

십일조 역시 '수입 전체'에 대한 

십분의 일을 드림이 마땅할 것입니다. 

 

이렇게 드리는 십일조...

어떤 분들은요.

주로 십일조 규모가 크신 분들인 듯 한데

자기 십일조를 쪼개서 

좋은 일에 쓰면 

그것도 하나님이 기뻐하실거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어떤 분들은

본인이 출석하는 교회가 아니라

본인이 아는 어려운 교회에 십일조를 한다거나!

유니세프 같은 단체에 십일조를 하고

그걸 자랑스럽게 여기기도 합니다. 

 

글세요...

십일조는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행위입니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걸 마치 '내것인양' 

내가 마음대로 여기저기에 베푸는 것은

온전한 헌금이 될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 헌금은 '예배행위'입니다. 

내가 예배하는 그 곳에서 드려야 할 것이지!

내 마음대로 하려든다면!

하나님 앞에 월권이 될 수 있음을 기억합시다.

 

만일 누군가를 돕고 싶다면!

'십일조'를 손댈 것이 아니라

그 외에 다른 비용으로 돕는 것이

훨씬 건강한 헌금 생활이 될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십일조는 신자가 해야 할 마땅한 의무임에도!

하나님은 드리는 자에게 

놀라운 복까지도 말씀하셨습니다. 

 

말라기 3:10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이런 복이 있으니까 헌금하자'는 게 아닙니다.

사실 '헌금을 하는 것 자체가 복'입니다.

이건 아는 사람만 아는 특권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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