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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순 감사예배 순서지

환갑, 칠순, 팔순 감사예배도

마찬가지로 진행할 수 있겠다. 

 

팔순 감사예배 순서지.pdf
0.05M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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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많이 변했다.

이런 저런 이유로 이혼이 빈번해졌고

자연스럽게(?)

재혼도 증가하는 추세다.

이는 가장 보수적인 단체인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혹, 재혼 예식 요청을 받고 

당혹스러운 사람들을 위해

순서지를 공유한다. 

재혼예식순서지.pdf
0.06M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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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

그리고 이스라엘과 가자지구의 전쟁

상황이 점점 심상치 않게

번져가고 있다는 소식이 들립니다.

 

게다가 일본의 대지진

미국 중국 등 

여러 나라의 자연 재해 소식 역시도

하루가 멀다하고 들려오지요. 

'수십년만의 처음'

'수백년만의 처음'

이런 말들이 심심치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지구 소멸의 위기를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이야말로

성경이 이야기하는 

'최후 심판의 때'가 도래한 걸까요?

 

누가복음21:12,13

"또 이르시되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곳곳에 큰 지진과 기근과 전염병이 있겠고

또 무서운 일과

하늘로부터 큰 징조들이 있으리라"

 

라고...

예언되었던 그 일이 

우리 시대에 일어나는 걸까요?

 

그럴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는 

확답할 수 없습니다. 

 

왜냐고요?

예수께서 친히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한다'

하셨기 때문입니다.(마태복음25:13)

 

아무리 이런 일들이 일어나도

그것으로 예수님의 재림 심판의 날을

예측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예수님 자신도 

기근과 재난에 대해서 

'그게 끝의 신호'라 하지 않으셨습니다.

 

마태복음24:6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하지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아직 끝은 아니니라"

 

'아직 끝은 아니라' 하셨습니다. 

 

무엇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종말에 있을 재난 예고 본문'에서

'종말'은 

'세상 끝날의 종말'이라고 

명시되어 있지도 않습니다. 

 

종말의 날에 

전쟁과 기근이 있을 거라는 

예고는 세개의 복음서에서 

똑같이 나옵니다. 

 

마태복음24장, 마가복음13장, 누가복음21장

세 군데의 말씀이 공히 이야기합니다.

 

이 말씀의 배경을 보면!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서 나오시면서' 

주신 말씀입니다. 

 

제자들이 '성전의 아름다움'에 감탄하자

예수께서는 

'이 성전이 파괴될 것'을 예고하십니다.

누가복음21:6

"너희 보는 이것들이 날이 이르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그러자 제자들은 예수님께 

'뜬금없게도' 이렇게 여쭙지요.

마태복음24:3

"예수께서 감람 산 위에 앉으셨을 때에 

제자들이 조용히 와서 이르되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예수님은 '성전 파괴'를 말씀하셨는데

제자들은 '세상의 끝날'을 떠올렸습니다.

 

이게 무슨 뜻일까요?

하나님의 집인 '성전이 파괴되는 것'을

곧 '세상의 끝날'로 인식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성전'이 '우주의 중심'입니다.

성전이 파괴된다는 것은

그들에게 있어서

'세상의 끝'과 다를바 없다는 거죠.

 

그렇게 이해해야만!

'돌위에 돌 하나 남지 않는다'는 말씀과

'세상 끝'의 이야기가 연결되는 것입니다.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에 따르면

AD70년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 될 때

로마 군인들이 

예루살렘 성벽에 박혀있던

보석들을 빼내려고

실벽들을 깨트려서

실제 '돌위에 돌 하나 남지 않는다'는 

주님의 말씀이 성취되었다 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종말은!

옛 세상, 즉 옛 언약의 종말을

의미한다는 것이

많은 성경학자들이 

동의하는 내용입니다. 

 

그러니...

오늘날 '전쟁'과 '재난'의 소식들이 

들려오는 것을 보며

이것이 

'성경의 종말'이라고 

사람들을 미혹하는 이야기에 

속아서는 안됩니다.

 

주님은 언제 오실지 모릅니다. 

내일 오실지

이 글을 읽는 중에 오실지

1000년 후에 오실지 모릅니다.

 

그저 우리는 

하나님이 허락하신 

오늘이라는 날을 성실하게

살아갈 사명이 있을 뿐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4
"형제들아 너희는 어둠에 있지 아니하매

그 날이

도둑 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

 

복음의 사람들에게는

그 날이 두려움의 날이 아닌

기쁨과 즐거움의 날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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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10:31-11: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고린도전서1031절은!

참 유명한 말씀입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그리스도인에게 삶의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건데요.

여러분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는 것이!

어떻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 예배를 잘 드리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입니까?

- 또는 사회에서 성공을 이룬 후에,

언론 인터뷰로 하나님께 영광돌립니다이런 걸까요?

 

하나님의 영광이라 하면!

보통 이런 것들을 생각 합니다.

맞는 이야기들입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을 잘 들여다보면!

하나님의 영광은 의외의 곳에 있습니다.

 

31절을 다시 보시죠.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하셨거든요.

강조된 내용이

사실 먹고 마시는문제에요.

 

그리고 이 구절의 앞쪽 말씀을 보면!

단순히 영광에 대한’ ‘일반론을 말하는게 아니에요.

오히려 상당히 구체적인 내용이 있습니다.

 

바로,

우상에게 바쳤던 음식을 어떻게 대할까에 대한 문제입니다.

 

고대 근동에서!

시장에 유통되는 음식물 중에는!

우상에게 바치고 남은 제물들이 많았습니다.

 

우상의음식을 먹어도 되는가? 안되는가?’

이 문제가 당시에 큰 논란이었습니다.

 

바울은요....

두 가지를 다 인정합니다.

 

하나는 먹어도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고린도전서8:4

그러므로 우상의 제물을 먹는 일에 대하여는

우리가 우상은 세상에 아무것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는 줄 아노라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이라는 건!

실질적으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우상에게 바친 음식이 우리 영혼을 더럽힐 수 없다는 거에요!

그러니까... 양심에 거리끼지 말고 먹으라는 겁니다.

 

그런가하면!

또 반대로도 이야기했어요.

그게 오늘 고린도전서10장에 21절 보면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주의 잔과 귀신의 잔을 겸하여 마시지 못하고

주의 식탁과 귀신의 식탁을 겸하여 참여하지 못하리라!”

여기서는 또

우상 음식을 먹지 말라 합니다.

우상의 음식자체보다는

우상 섬김의 배후에 있는 사탄을 염두한 말씀입니다.

 

자 여러분!

같은 고린도전서인데!

한쪽에서는 부담없이 먹으라하더니!

또 다른 한쪽에서는 먹으면 안된다고 말합니다.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니지... 어찌 이렇게 두 가지를 다 말하는가?’

뭐가 맞는 건지 좀 혼란스럽죠?

 

사실

이게 우상음식에 대한바울의 일관된 자세입니다.

로마서 14:3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않는 자는 먹는 자를 비판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그를 받으셨음이라

먹는 사람은 먹는대로 두고!

먹지 않는 사람은 안 먹는 대로 또 두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그를(둘 다를) 받으셨답니다.

이런 문제로 구원이 갈리지 않는다는 거에요.

 

오히려!

두 부류의 사람들을 보면!

둘 다 신앙이 좋은 경우가 많더라 합니다.

로마서14:6절을 보세요.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

둘 다 주님을 위한다, 감사한다! 하죠!

 

오늘 말씀이 딱 그렇습니다.

두 부류의 사람들! 다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한쪽의 사람은

하나님의 유일성을 믿으면서!

우상의 음식 따위 아무것도 아니라믿고!

우상의 음식을 당당히 먹습니다.

 

또 한쪽의 사람은

불신자들의 우상 섬긴 음식으로

자신을 더럽힐 수 없다 믿으면서!

우상의 음식을 금합니다.

 

둘 다

귀한 믿음들이라는 겁니다.

 

교회 안에서!

얼마든지 자기 스타일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는 거죠.

짧은 치마 입고 싶은 사람이 있고,

집에서 술 한 잔씩은 할 수 있다는 사람도 있죠.

이런 문제로 그분들의 신앙이나 헌신

의심해서는 안 될 겁니다.

 

다만!

개인 신앙에서는!!! 그렇다는 겁니다.

 

이런 개인의 신앙적 자유가!

마냥 허용되지는 않는 때가 있는데요!

 

다른 사람과 관련되어 있을 때입니다.

특히나 불신자믿음이 약한 자

관련되어 있을 때에는!

자신의 자유내려놓을 수 있어야 한다

가르칩니다.

 

오늘 말씀 바로 앞에!

고린도전서10:27절입니다.

불신자 중!

누가 너희를 청할 때에

너희가 가고자 하거든

너희 앞에 차려놓은 것은 무엇이든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불신자가 청해서!

음식을 대접하면!

일단 호의를 베푸는 거잖아요?

거기서 이거 우상음식이죠? 안 먹습니다!”

라며 기분을 상하게 하지 말고!

그냥 먹으라는 겁니다.

 

26절에서 이렇게 말해요.

땅과 거기 충만한 것이 주의 것임이라!”

그러니까...

이건 하나님의 일반은총이다라고 믿고!

감사히 먹으라는 겁니다.

만약, 내가 평소에

내 개인 신념으로 우상음식은 먹지 않겠다

정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이런 분위기에서는!! 맞춰주라는 겁니다.

 

그럼 반대 경우도 있겠지요?

28절입니다.

누가 너희에게

이것이 제물이라말하거든!

알게 한 자와 그 양심을 위하여 먹지 말라!”

여기서...

이것이 제물이라

말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겠어요?

믿지만 믿음이 약한 사람이겠지요?

믿는 사람들이 먹는 걸 보고

시험에 들 수 있는 사람일겁니다.

 

그런 사람이 앞에 있다면!

그냥 먹지 말라는 겁니다.

내게 먹음에 대한 양심의 자유가 있을지라도

믿음 약한 그 사람을 위해서

자기 자유나 신념을 내려놓으라는 거에요.

 

이걸 종합해볼까요?

먹을 수 있는 자유가 있음에도’ ‘먹지 않는 것

먹지 않겠다는 신념이 있음에도’ ‘먹는 것

 

이것이!

31절에서 말했던 바!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하셨던!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여러분!

이게 왜 하나님의 영광이 될까요?

다른 사람을 위해서!

내 자유나 신념을 포기하는 것이!

어떻게 하나님의 기쁨이 되겠느냐는 겁니다.

 

33절에 그 답이 있습니다.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

 

그들

!

불신자나 믿음이 약한 자들!

구원 받는 것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겁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세상에 독생하신 아들을 보내신 이유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 예수께서 아기의 몸으로 이 땅에 오신 이유!

-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에 오르신 이유!

- 십자가 위에서 물과 피를 다 쏟으신 이유!

- 부활하사 하늘에 오르신

그 모든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심입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 앞에 이런 기도를 하셨습니다.

요한복음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이렇게 영생에 대해 말씀하시고는!

4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영광스럽게) 하였사오니!”

 

예수께서 세상에 영생을 주시려

이루신 모든 일이!

하나님께 영화’ ‘영광이었다 하시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낮아지심과 내려놓으심이!

예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가장 중요한 행위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원리를

자신의 사역 원리로 삼았습니다.

 

심지어

먹는 것, 마시는 것에 이르기까지!

한 사람이라도 구원하기 위해서라면!

자기 권리를 기꺼이 포기했습니다.

 

고린도전서9:20-22

바울은 자신의 사역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20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에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21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는 자이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22 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

 

바울은 이미 그렇게 살아온 사람입니다.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되어서!

그 사람과 관계를 맺고!

그 관계의 다리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바울의 마음에는 오로지!

영혼 구원이요!

그로인한 하나님의 영광이었습니다.

 

이제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에게 그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가 어떤 교회입니까?

문제가 많은 교회였습니다.

특히나 분열의 문제가 가장 심각했습니다.

 

고린도전서1:11

내 형제들아 글로에의 집 편으로

너희에 대한 말이 내게 들리니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이라!”

바울파’, ‘아볼로파’, ‘베드로파’, ‘그리스도파로 나뉘어서!

교인들이 서로를 비방했습니다.

결국 뭐에요?

내가 옳다!’ ‘너는 틀렸다는 거에요!

 

이런 분쟁이 세상 법정에까지 올라갔습니다.

고린도전서6:1

너희 중에 누가 다른 이와 더불어

다툼이 있는데 구태여

불의한 자(불신자)들 앞에서 고발하고

성도 앞에서 하지 아니하느냐

 

이렇게... 자기만 옳다 하고 상대를 인정하지 않는 모습이!

먹는것과 마시는 것에까지 드러납니다.

 

각자의 신앙적 아집을 못버리고!

음식을 먹는 자안먹는 자를 비웃었고!

안먹는 자먹는 자를 멸시했습니다.

 

이런 교회를 향해 바울이 하는 말이 뭔가요?

오늘 말씀 111절이죠.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교회에는!
성도 각 사람의 삶에는!

오직 하나의 원리가 있을 뿐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내려놓으신 것 처럼!

우리도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을 받게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교회가!

주님 닮은 교회인 겁니다.

참으로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교회이고

성도들인 겁니다.

 

결론입니다.

어느 시대보다 개인화 되고

자기 신념이 우상화 된오늘날입니다.

이럴 때 일수록!

오늘의 말씀이 교회에 필요하다 생각됩니다.

 

ㅇㅇㅇ교회 모든 구성원들이

주님의 사역과 성품을 닮은 교회가 되어!

많은 사람을 옳은데로 인도하게 되시기를 바라고요.

그렇게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교회로

성장해 나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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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16:3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네가 경영하는 것이
이루어지리라"

성공한 사람들이 쓴 글을 읽어보면
성공의 비결로
보통 세가지를 이야기합니다.
'성실, 공부, 노력'이 그것입니다.

명지대학교 창립자이며
통일부 장관을 지낸
유상근 교수는 항상 제자들에게
이것을 가르쳤다고 합니다.
"성 실 유 능"

성실하고 유능한 사람이
성공할 수 있다는 다르침인거죠.

그런데!
의외로 성공한 사람들이 말하는
의외의 조건이 있습니다.
어쩌면 그들에게는 이것이
더 중요해보이기도 합니다.

'운'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노력해도
국제 정세라든지, 생각지도 못했던
어떤 계기 때문에
사업이 도약하게 되더라는 겁니다.

고개가 끄떡여지는 부분입니다.
사실 '성실, 유능'하고도
좋은 기회를 얻지 못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요.

자 그렇다면!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운'이라는 걸
신앙인들은 뭐라고 말할까요?

'하나님의 섭리'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의 역사, 또는 응답'이라고도 하지요.

소위 '운'이라고 하는 것보다
훨씬 더 확실하고 신뢰할만한 요소
아니겠습니까!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다면
우리는 훨씬더
우리의 성공을 확신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기도해야하겠죠.
하나님의 '섭리와 응답'은
기도의 동역으로 이루어지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새로운 해를 맞이하는 여러분!
새해에는 마음을 열고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어떤 상황에도
자포자기 하지 마시고
기도하세요!

분명 어려움이 있을 겁니다.
오늘 본문 말씀 바로 다음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잠언16장4절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쓰임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쓰셨다?
하나님이 이루시는 행사에!
'악인'도 있고 '악한 날'도 있다 하십니다.

그러나!
그것은 의인인 성도를 망하게 하려는게 아닙니다.
이 일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려 하시는 겁니다.

그걸 잘 알 수 있는 예가 있습니다.

페르시아 포로였던 '느헤미야'가
고향 예루살렘 땅이 황폐하다는 소식을 듣고
마음에 근심이 되었습니다.
근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하다보니
얼굴이 수척해졌습니다.
느헤미야의 직업이
왕에게 술 따르는 관원장이었는데,
왕이 느헤미야의 얼굴을 보고 묻게 되지요.

느헤미야2:2
"왕이 내게 이르시되 네가 병이 없거늘
어찌하여 얼굴에 수심이 있느냐
이는 필연 네 마음에 근심이 있음이로다"

신하가, 그것도 왕이 먹을 것을 관장하는 신하가
얼굴에 수심을 보이는 것은
반역을 꾀한다는 의심을 받을만한
행동이었습니다.

굉장히 위험한 상황이 닥쳐왔습니다.
이러한 위기의 순간에!
느헤미야가 어떻게 했는가 보세요.

느헤미야2:4하
"내가 곧 하늘의 하나님께 묵도하고...
왕에게 아뢰되...."

그 순간 하나님께 묵도하여 기도했습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이 지혜를 주셨습니다.
지혜롭게 대답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왕의 마음을 돌리셨고!

오히려 예루살렘에 성벽을 세울 수 있는
엄청난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신 겁니다.'

새해를 맞이하며!
여러분
우리에게는 '운'이 아닌
'하나님의 섭리'가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며
살아가다보면!
"네가 경영하는 것이 이루리라"하셨던
이 말씀이 우리 삶속에서
성취되는 것을
경험할 줄 믿습니다.

2024년!
한 번 더 힘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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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2:16
"이에 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은 줄 알고
심히 노하여 사람을 보내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아이를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본
그 때를 기준하여 두살 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니"

예수께서 태어나신 성탄의 날
그로부터 얼마지 않아
베들레헴에는
끔찍한 영아 살해의
범죄가 일어났습니다.

이스라엘의 왕이 탄생했다는 소식에
당시 유다의 왕이었던 헤롯은
분노했습니다.
새로운 왕을 용납하지 못했습니다.
어떻게해서든지
예수님을 찾아내어 죽이려 했습니다.

하나님의 사자는
아기 예수의 아버지 요셉에게
그곳을 떠나 애굽으로 피하라 하십니다.

마태복음2:13절
"그들이(동방박사) 떠난 후에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현몽하여 이르되
헤롯이 아기를 찾아 죽이려 하니
일어나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애굽으로 피하여
내가 네게 이르기까지 거기 있으라 하시니"
그렇게 애굽으로 피했습니다.

그리고 이 일에 대해서!
성경은 신기한 이야기를 하십니다.

마태복음2:14,15절
"요셉이 일어나서 밤에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애굽으로 내려가
헤롯이 죽기까지 거기 있었으니
이는 주께서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애굽으로부터 내 아들을 불렀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라"

아기 예수님이 애굽으로 피하신 것은
출애굽의 실체화라고 하신 겁니다.

표면적으로만 보면!
예수님이 애굽에 가셨다가
이스라엘로 돌아오시면
그게 '출애굽이겠거니...' 싶잖아요?
그런데...
막상 내용으로 보면!
오히려 반대입니다.

에수께서 애굽으로 피한 후에!
결국 예수님을 찾아내지 못한 헤롯왕이
끔찍한 죄를 짓습니다.

마태복음2:16
"이에 헤롯이 박사드에게 속은 줄 알고
심히 노하여 사람을 보내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 아이를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본
그 때를 기준하여
두살 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니"

두살 아래의 사내 아이를 다 죽였더라...
이거...
어디선가 봤던 장면 아닌가요?

그렇습니다.
그 옛날
애굽왕 바로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박해할 때에
남자 아이가 태어나면
모조리 죽였던 그 일의 반복인 겁니다.

예수님은
그 옛날 모세처럼!
'왕의 폭력을 피해서'
애굽으로 피하게 되신 겁니다.

그렇게 봤을 때...
여러분
실질적인 애굽은 어디입니까?

예수님이 피난하신 곳입니까?
예수님이 칼을 피해 떠나신 곳입니까?

아이러니하게도!
이 말씀에서 애굽은
'이스라엘'이었습니다.

이게 무엇을 말하려는 걸까요?

동방박사들은 이방인이
하나님 나라에 침노해 들어오는 상징이었습니다.
이방인의 구원 시대가 열린 것을
보여주는 그림이었습니다.

반대로!
예수님을 죽이려는 이스라엘은
하나님 나라에서 멀어지는 상징이었습니다.
옛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아들을 대적함으로서
언약의 배반자들이 되었습니다.

먼저된 자들이 나중되고
나중된 자들이 먼저되었습니다.
마태복음20:16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복음 앞에서
세상에 오신 아기 예수 앞에서
자기의 권세와 기득권을
지키려는 자들은
언약의 배반자들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분 앞에서 겸손하여
올해도
그분의 구원을 기쁨으로 예배하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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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2:1

"헤롯 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성탄절 하면 빠지지 않는 사람들이

동방박사입니다. 

'동쪽 방향에서 온 박사'라는 말이지요.

 

동쪽 어디에서 온 사람인가!

티그리스 유프라테스 유역!

옛 바벨론과 페르시아의 후손입니다.

(대한민국? 아닙니다~^^)

 

그 가능성이 가장 높을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수백년 전 전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패망했을 때!

수많은 유대인이 바벨론 포로로 

잡혀왔던 겁니다. 

 

그 포로들 중에!

신실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참 많았습니다. 

 

먼저는 '다니엘'이 있었지요.

바벨론 시대와 페르시아에 이르기까지

나라가 바뀌어도

계속 총리 대신으로 

그 시대에 영향을 끼쳤습니다.

특히나 느부갓네살 같은 왕은

다니엘의 영향을 받고

'여호와'를 '하늘의 하나님'이라고 

인정하기까지 했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가 있었지요.

그들도 포로로서

동방 나라들의 고관대작을 지내면서

하나님을 인정하게 만들었습니다. 

특히나 그들은

수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우상에게 절하지 않으면서

풀무불 안에 들어가서도

살아난 것으로 

그들의 시대에 

하나님의 이름을 각인 시켰습니다.

 

'죽으면 죽으리이다'했던 '에스더'도,

왕의 술관원으로 예루살렘 성벽을 

건축한 느헤미야도,

페르시아의 지도자 역할을 하면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거했습니다. 

 

그뿐이겠습니까?

이름없는 수많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 포로지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며

많은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을 보여주었을 겁니다.

 

그렇게 수백년이 흘렀고!

하늘에 신비로운 별이 떴을 때

박사들은

다름 아닌 이스라엘의 메시야를

떠올렸습니다. 

단지 이스라엘 민족의 부흥이 아니라!

온 세상의 죄를 사하시러

하나님의 아들이 오셨음을 알았습니다. 

 

동방박사들의 믿음은

어느날 갑자기 '뿅'하고 생겨난게 아닙니다.

수백년 동안 

이방 땅에 잡혀가서도

신실하게 하나님을 찾았던

믿음의 사람들의 

헌신적인 삶의 결과물입니다. 

 

오늘 우리의 믿음도

그래야 하지 않을까요?

어떤 상황이 있을지라도

있는 그 자리에서 신실하게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살다보면

하나님은 우리의 작은 삶도

하나님 나라의 큰 역사를 위해

쓰실 것입니다.

 

성탄의 복된 날에!

나의 삶을 어떻게 살아갈지

다시 한번 

옷깃처럼 여미는 

좋은 기회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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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11:33-35
"예수께서 그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이르시되 그를 어디 두었느냐
이르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나사로의 장례식에서
예수님이 흘리신 눈물의 의미를
생각해보겠습니다.

'눈물에 무슨 의미가 있겠어?
장례식 때 슬퍼하는 사람들과 함께
슬퍼하는 것이 당연한 거 아니야?'라고
답하기 쉽겠습니다만...
생각해보면 그렇지도 않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나사로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진작에 들으셨습니다.
예수님이 계셨던 곳에서
나사로의 집은 그리 먼 거리가 아니었기에
(성인 걸음으로 7시간 거리)
서둘러 가셨다면
나사로의 병은 얼마든지 고치실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수많은 병을 고치셨죠)

그런데!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는 줄 아세요?
요한복음11:6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이틀을 더 유하셨습니다.
그러시고도!
예수님은 서둘로 이동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예수께서 장례식장에 도착하셨을 때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요한복음11:17
"예수께서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지 이미 나흘이라"

죽은지 4일이나 지났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7시간 올 거리를!
거의 3일에 걸쳐서 오셨다는 말이 되는 겁니다.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와 마르다가 얼마나 속이 탔던지!
예수님께 하소연을 하죠!
요한복음11:21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요한복음11:32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가서 뵈옵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이르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

예수님이 즉시 오시기만 했다면!
그의 병을 고칠 수 있었다는 말이에요!

이로보건대!
예수님은 일부러 일정을 지체하신 것입니다.
무엇을 위해서요?
죽은지 나흘이나 되어
썩은 냄새가 나는
나사로를 살리시기 위해서입니다.
실제로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나사로를 살리시고
무덤에서 불러내시죠!

그러니 예수께서
이 장례식장에서 눈물 흘리신 것은!
'나사로의 죽음을 애통해하신 게
아닌게 분명합니다.'

어차피 살릴 사람을 위해서
애통해한다는 게 영 이상하긴 하죠.

예수께서 눈물 흘리신 이유는
다른데 있습니다.
33절에 보면!
"예수께서 그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여기서 '비통히 여기셨다'는 말을
헬라어 원문으로 보면
'엠브리마오마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 의미를 찾아보면!
"말이 전장에서 콧김을 내뿜는다"는 뜻입니다.
이 말을 사람에게 적용하면
"분노, 격노, 격분하다"는 뜻이 됩니다.

무슨 말일까요?
지금 예수님은
죽은 나사로 때문에 '감상에 빠져서'
우신게 아니라는 겁니다.

지금의 상황에 분노하고 계신다는 겁니다.
어떤 상황이요?
방금 읽은 33절을 보세요!
'마리아의 울음과
함께 있는 유대인들의 울음을
보!시!고!'
분노하셨습니다.

장례식을 가보신 분은 알겁니다.
장례식 때에 여러 순서가 있습니다.
'입관, 발인, 화장, 하관' 등의 순서인데요,
대부분 순서순서마다
유족들이 얼마나 비통하게 우는지 모릅니다.
어떤분들은 너무 우시다가 실신하시기도 합니다.

죽음의 고통입니다.
죽음이 사람의 심령을 이토록이나
무너트린다는 겁니다.
무엇으로도 위로할 수 없는 절망이!
사람들의 심령을 사로잡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모습을 보시며
그들로 인해 분노하셨습니다.
무엇을 향해서일까요?
'죽음' 그 자체입니다.
그리고
'죄의 삯은 사망이라 했으니'
세상에 사망을 불러온 '죄'에 대해서 말이지요.

죄의 짐을 지고
죽음 앞에 쩔쩔매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불쌍했습니다.
그래서 우셨습니다.

그러나 울음은 잠시였습니다.
예수님은
'그 죽음을 정복하러 오신 분'입니다.
인간에게
'천국 영생을 선물로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이 슬픔이 가득한 자리에!
예수님은 '부활의 기쁨'을
맛보여주려 하십니다.

죽은지 사흘이나 되어
냄새가 나는 무덤을 향해 예수께서 외치십니다.
"나사로야 나오라!"

그리고
죽음의 절망은 끝이 났습니다.
장례식장은
'놀라움과 기쁨, 환희, 잔치'의 자리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천국에서 누리게 될 영광입니다.
눈물은 잠시입니다.
우리에게는
주님께서 주신 영원한 기쁨이 있습니다.
이 기쁨은
죽음조차 빼앗을 수 없는!
주님의 선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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