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한국 교회 담임목사 청빙 과정에서

사모의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요구하는 관행은 오랫동안 논란의 대상이 되어왔습니다.

세상 어느 직장에서 배우자의 이력서를 요구하는 경우가 있을까요?

심지어 사모는 교회의 공식적인 직분도 아닌데 말이죠.

w 교회의 담임목사 청빙서류

 

전통적인 입장

  • 목회 동반자로서의 역할 : 교회 측에서는 사모를 단순히 목회자의 배우자가 아닌, 목회 사역의 동반자로 여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모의 성품, 신앙, 경험 등이 목회에 큰 영향을 미친다고 판단하는 것이죠.
  • 교회 공동체와의 조화 : 사모가 교회 공동체와 잘 어울리고 협력할 수 있는 사람인지 확인하기 위한 목적도 있습니다. 특히 작은 교회일수록 사모의 역할이 중요하기 때문에, 공동체와의 조화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 목회자 가정의 안정성 : 목회자 가정의 안정성이 목회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판단하여, 사모의 배경을 파악하려는 의도도 있습니다.

m교회의 담임목사 청빙 서류

 

비판적인 시각

  • 개인정보 침해 및 차별 : 사모의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요구하는 것은 개인정보 침해이며, 여성에 대한 차별이라는 비판이 있습니다. 사모의 능력이 아닌, 단순히 목회자의 배우자라는 이유로 평가받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입니다.
  • 비성경적인 관행 : 성경 어디에도 목회자의 배우자에 대한 자격 요건을 제시하는 내용은 없습니다. 오히려 사모의 역할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성경적이지 않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 시대착오적인 관행 : 현대 사회에서는 개인의 자율성과 독립성이 존중받는 추세입니다. 이러한 시대적 흐름에 비추어 볼 때, 사모의 이력서를 요구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관행이라는 비판도 있습니다.

개선 방향

  • 사모의 역할에 대한 재정립 : 사모의 역할을 목회 동반자가 아닌, 목회자의 배우자로 명확히 규정하고, 개인의 자율성을 존중해야 합니다.
  • 객관적인 평가 기준 마련 : 목회자의 자질을 평가할 때, 사모의 배경이 아닌 목회자의 능력과 자질에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 교회 공동체의 인식 변화 : 교회 공동체는 사모의 역할을 지나치게 기대하거나 강요하는 대신, 개인의 자율성을 존중하고 협력적인 관계를 형성해야 합니다.

결론

담임목사 청빙 과정에서 사모의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요구하는 관행은 시대착오적인 측면이 많습니다.

교회는 이러한 관행을 개선하고, 개인의 자율성을 존중하는 성경적인 목회 문화를 만들어나가야 할 것입니다.

 

728x90

[히9:14]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사역하면서 늘 따르는 고민이 있습니다.
'왜! 교인들이 교회에 헌신하지 않을까?'
'하나님을 섬기지 않을까?'
오늘 본문이 그 대답인 듯합니다.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 죄를 씻으실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가!
하나님을 섬기게 합니다.

오늘 말씀은 구약 제사장의 직분을 이야기합니다.
즉 이 말씀은 대제사장이
일년에 단 하루 지성소에 들어가 하나님을 섬기는
그 장면을 보여주는겁니다.

'지성소에 들어가 하나님을 섬기다!'

짐승의 피는 오직 대제사장 한 사람만 그것도 일년에 하루 들어가게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피는
그를 믿는 모든 사람이
언제든지 담대하게
지성소에 들어가게 했습니다.

누가 예수님을 섬길까요?
누가 헌신하고 봉사할까요?

예수 피를 힘입어 죄사함을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교인을
그 은혜의 자리로 이끌 수 있다면
그 교회는 수많은 일꾼을 얻게 될것입니다.


728x90

중학교 3학년 때 처음 목사의 꿈을 꾸고
처음으로 제대로 된 공부를 시작했고
인문계 고등학교를 진학해서
총신대학교를 거치고
총신 신대원을 나와서
목사 임직을 받았다.

목사의 꿈을 꾸고
목사가 될 때까지
참 많은 시간이 걸렸다.

그렇게 목사가 되었고
목사로서 15년을 살아왔다.

그동안에 아이도 셋 낳아 키우면서
오랜 부교역자 생활을 마무리 하고
담임목사가 될 참이었다.

그 때 까지는
모든 것이 순리대로 된다고 생각했다.
이 길에 들어선 사역자들이
일반적으로 가는
그래도 성공적인 커리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에!
전혀 생각지 못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담임목사로 지원했던 교회에서
청빙 공동의회가 통과 되었고
담임목사 청빙서까지 받아들었다.
사역했던 교회에서는
담임목사로 사역하기 전에
조금이라도 쉬어야 한다고
빠르게 사임을 시켜주었다.

사임을 하고!
청빙한 교회로 가기 전에
막판 조율을 하다가
가고자 하는 교회와
이야기가 삐걱거리기 시작한 거다.

자세한 사항을 적기는 어렵지만
정리하자면,
이 교회는 이전 담임목사님들이
재정문제, 사모님 문제 등으로서
교회에 많은 상처를 주었고,
그만큼!
새로 오는 담임 목사에게
이런 저런 요구들을 하셨다.

교회도 그만큼 어려움을 당했기에
여러 요구를 할 수 있다고
나도 생각은 한다.
그러나 나는 나다.
처음부터 이런 요구에 끌려 다니는 건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나대로의 선을 그었고,
앞의 목사님들처럼 하지 않을 거라고
나는 오히려 더 잘 할 수있다고
그렇게 장로님들을 설득하려 했다.

잘 이야기하면 장로님들도
납득해주실거라 그렇게 기대했다.

그러나
결과는 전혀 생각지 못했던 것이었다.
’청빙 취소‘라는 문자를 받게 된 것이다.

이 문자를 받을 때까지도
나는 내가 어떤 상황에 처한건지
깨닫지 못했다.
그냥 청빙이 안되었을 뿐이라는
안이한 생각 뿐이었다.

그 이상의 문제였다.
나는 벌거벗은 채로
교회 밖, 사회로 던져진 것이다.

내 통장으로 매달 들어오던
사례비가 더 이상 없었다.
아이들 밥 먹일 돈도, 학원에 보낼 돈도
진학한 학교 교복 살 돈도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게 되었다.

48세의 나이는 정말
잔인한 나이였다.
부목사로 가기에는 너무 많은 나이다.
어느 교회도 이정도나 나이먹은 사람을
써줄 곳이 없었다.
그렇다고 담임목사를 지원하기에는
너무 벅찼다.
이번까지 나는 100통이 넘는
담임목사 이력서를 썼다.
그만큼 좁고 어려운 길이
담임목사가 되는 일이었다.
게다가 담임목사 이력서를 내려면
적어도 현재 사역을 하고 있어야 했다.
그래서 담임목사 이력서 첨부 서류에는
사역하고 있는 교회의 주보 4주치를 내야 한다.
이것조차도 불가능하게 되었다.

이제 교회로 돌아갈 가능성은 거의 없다.
이 날 이 때껏 한 것이
교회 일이었는데…
그 외에 다른 일들은 전혀 경험이 없었는데…
이제 전혀 경험해보지 않은
무언가를 해야 했다.

그것도 빠르게 해야 했다.
적은 사례비였기에
모아둔 돈도 없었고,
퇴직금도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루 하루 한 주 한 주가
너무 빨리 지나갔고
카드 사용내역은 순식간에 불어났다.

다음달 카드 값은 어떻게 값아야 하나
마음이 급해지니 시야가 좁아졌다.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는 듯 했다.
유튜브를 찾아보니
온통 ‘쿠팡 물류 센터‘ 아니면
’평택 고덕 삼성 반도체 건설 노가다’였다.
이것말고는 선택지가 없는듯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럴 때일수록 사람들을 더 만났어야 했다.
좀 더 많은 가능성들을 알아봤어야 했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그런 생각조차도 사치였다.

처음에는 ‘쿠팡 물류센터’ 의 문을 두드렸다.
’누구나 간단한 업무로 361만원이라는 말이
그래도 위안이 되었다.
361만원이면 목사 15년차까지도
받아보지 못했던 수입이었다.

그렇게 ’쿠팡 웰컴데이‘를 참석했다.
그리고 알았따.
361만원을 받기 위해서는
많은 조건들이 충족되어야 했다.
밤을 꼴딱 새는 야건 업무를 해야 했고,
이런 저런 프로모션에도 해당 되어야 했다.
그렇지 않고 일반 낮의 업무만 할경우에는
생각보다 너무 적은 비용이었다.
우리 가족이 지출해야 하는 고정 비용 정도
채울 정도였다.
그렇다고 매일 야간업무를 하기에는
내 건강이 못따라줄게 분명했다.

이정도로는 안되겠다 싶었다.
그러던 차에
어디선가 받았던 명함이 눈에 띄었다.
‘평택 고덕 삼성 반도체 잡부’를 모집하는
팀장님의 명함이었다.
거기에 보니
일당이 굉장히 쎘다.
일당이 17만원이었다.
일당을 1공수라고 했는데
오전 7시에서 오후 5시까지 1공수
거기서 두시간 더 하면 1.5공수
그리고 거기서 두시간을 더 하면 2공수였다.
2공수로 하면
일당이 34만원이다.
‘이건 대단하다’ 싶었다.
곧바로 그분에게 전화를 했다.
그분도 내 전화를 매우 반가워했고
즉시 몇가지 자격을 갖추라고 했다.
하나는 ‘건설업 기초안전보건교육’을 받고
이수증을 받으라는 거였고,
또 하나는 ’한국 비계기술원‘이라는 곳에가서
비계 관련 교육을 받고 이수증을 받으라 했다.
이거 다 돈드는 일이다.

건설업 안전보건 교육비는 5만원
비계 교육비는 7만원이었다.
헐…
백수에게 있어서는 적은 돈이 아니다.
그래도 앞으로 받을 돈을 생각하면
마중물이라 생각할만했다.
그래서 교육을 다 받았다.

그런데!
막상 교육을 받고 날짜가 되었는데
현장 팀잠에게서 연락이 왔다.
’삼성 현장에 슬로우다운이 걸려서‘
일이 없어졌다고
오지 말라는 것이었다.

아… 이것만 기대했는데
이것도 답이 아닌듯 했다.
예전에 한창 잘 될 때 돈이 괜찮았고
지금은 언제 분위기가 바뀌어도
이상하지 않은 것이었다.

이러면서 벌써 3주가 그냥 지나가 버렸다.
그동안에는 자동차로 쿠팡이츠 배달을 하거나
쿠팡 캠프에서 일일 헬퍼를 지원해서
그날 그날 일을 했다.
물론 얼마 안되는 돈이었고
기름값도 상당히 들었다.

이제는 큰돈 이런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건
안정적인 수입이었다.

그제서야 주변을 돌아보았다.
고등학교 동창들과도 연락하고
나와 비슷한 환경에 먼저 놓였던
선배들에게도 연락했다.
그리고 이런 저런 일들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물론 많은 수입은 아니었지만
확실히 안정적인 수입원이 될 것이었다.

그중에서
사업을 하는 한 친구가
자기 회사와 연결된 기업 사장님을
연결해주었고,
그 계기로
취업 계약을 앞두고 있다.

한동안은 천안에 있는 공장에서 일할 것 같고
거기서 인정 받으면
서울에 있는 사무실로도
올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수입은 충분하지는 않지만
하는 것에 따라 미래 가능성이 열릴 수 있는
그런 일이다.

이제 내일 모레면 일을 시작할 것이다.

이 모든 일이!
한달 약간 넘는 기간동안에 있었던 일이다.

사람이 이렇게 피폐해질 수 있는 가 싶은
그런 시간이었다.

그동안 들었던 몇가지 생각들을 정리해보겠다.

1. 목사로서 오랜시간 설교해왔던 것과
실제 삶의 괴리에 대한 것이다.
물론 나는 목사가 세상의 모든 것을
다 경험해봐야 한다는 것에는 반대한다.
세상을 경험해보지 않고 설교하는 것은
가짜라는 말에 단호히 반대한다.
오히려 세상의 일들에 너무 노출되면
하나님의 말씀을 타협할 위험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에 군급한 상황에 놓여 있으면서
이 모든 순간에 ‘하나님을 찾았지만’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듯한’
‘결국 내가 해결하고 있는 듯한’
이런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는 건
인정하겠다.
그래서 하나님께 대해서 순간 순간
섭섭한 마음도 들고
하나님을 찾으면 다 해결된다는 식으로
설교해왔던 것이 얼마나
무책임한 말이었는지 돌아보게 되었다.
그렇게 말 하면 안되는 거였다.
어쩌면 더 깊은 적용거리가 있었을 것이다.

둘째. 가까운 사람들에 대한 것이다.
정말 어려운 상황이 되니
내게 필요한 사람과 필요없는 사람이
확연히 드러났다.
말만하는 사람과 실질적 도움을 주는 사람이
달랐다.
평소에 내 편이라 생각하고, 의지했던 사람이
막상 내가 어려운 상황에 놓였을 때
이런 저런 말만 늘어놓았다.
‘이런 때에 어려운 사람 마음을 알아야 한다’든지
’세상 사람 어떻게 사는지 경험해봐라‘든지
이런 건
내가 ’다시 목사로 돌아갔을 때‘에나 소용이지
지금 목회로 돌아갈 가능성이 거의 없는 상황에서는
쓰레기와 같은 말에 불과하다.
욥의 세 친구가 생각났다.
정말 말만하는 친구들…

“[욥16:1-2]
1 욥이 대답하여 이르되
2 이런 말은 내가 많이 들었나니
너희는 다 재난을 주는 위로자들이로구나”


그렇다… ‘재난을 주는 위로자’
그런 친구들이 있던거다.

반면에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어떤 분은!
내 안타까운 소식을 듣고
카톡으로 얼마간의 비용을 보내주었다.
가족들하고 맛있는 거라도 먹으라고
10년 넘게 연락도 없던 사이였는데
어렵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기꺼이 지갑을 열어주는 사람이었다.

비용을 떠나서 이런 것이 얼마나 큰
위로가 되었는지 모른다.

이건…
내가 다시 목사가 되든 그렇지 않든
‘사람으로서‘
이런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정말 배운 일이다.

재난이 아닌 도움을 주는
위로자가 되자!

자. 이제 모레부터는 일을 시작한다.
어떤 일일지, 어떤 사람을 만날지 모르겠지만
한동안은 열심히 배우면서 일해야겠다.

728x90

언론이나 sns에 보면
의외로 목사인데 정치 전면에 나서거나
정치적인 의견을 적극적으로
개진하는 분들이 있다.
그건 진보나 보수나 할것 없다.
양쪽을 통틀어서
이렇게 나서는 분들을 보면
내 눈에 보기에는
'극'이라는 표현이 들어갈만한 분처럼 보인다.

어쨌거나 상대 진영에 대해서는
거의 무조건적으로 적대적이고
지지하는 진영에 대해서는
거의 무조건적으로 호의적이다.

특히나 적대적이라는 측면에서는
상대를 거의 악마처럼 취급한다는거
보기에 안스럽다.
상대 진영을 마치 교회의 적인양
설명하고 싶어한다.

과연!
세속의 정치가 교회의 적일 수 있을까?
물론 그럴 수 있다.
초대교회 당시,
교회의 지도자들은
로마의 황제, 특히 네로를
교회의 적, 적그리스도로 규정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렇게 대놓고 교회를
박해하는 정권이 아니고는
대부분의 세속 정권이라는 건
그저 그들만의 리그였다.
그들의 정책이
교회를 말살하려는 획책인 경우는
웬만해서는 없는 것이다.

보수의 입장에서
진보 진영의 '동성애 옹호 정책'이
당연히 싫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 역시도
진보 진영의 인사들이
교회를 말살하기 위해서 지지하는
그런 목적은 아닐 것이다.
교회는 '동성애'가 성경적이지 않기 때문에
이 '정책'에 대해 반대할 지언정
그것 때문에 진보 진영 전체를
악마화 하고 싸우는 건
복음을 전해야 할
대한민국의 절반 세력에게
등을 돌리겠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면 진보는 어떠한가?
진보진영이 추구하는
평등이라든지, 분배에 대한 이념이
과연 기독교의 본질인가?
성경에 그러한 내용들이 있을지라도
진보의 가치가 성경의 본질은 아니다.
성경은 '믿는 개인의 구원'이야말로
하나님의 최고 가치이며
구원 받은 백성의 모임인 '교회'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궁극적 공동체이다.
이것은 세상의 어떤 것과도 다른 것이며
하늘에 속한 것이다.

즉, 교회는 보수나 진보가 추구하는
모든 것을 포괄하는 것이며
오히려 초월하는 영적인 가치다.

그러니
교회 안에서
교회의 본질이 아닌
정치적인 이념이나, 정책들로
교인들이 편을 가르고 싸우는 것은
결코 합당하지 않은 것이다.

개인적인 정치적 신념이야
누가 뭐라할 수 있겠는가?
내가 볼 때는
진보나 보수나
나라 걱정하는 건 똑같은 것 같다.
그저 방법이나 방향성이 다를 뿐이다.

이 걱정을
교회로 끌고 오지 마시기를 바란다.
그 다른 방향성이
교회에서 충돌하면
결국 교회에 분란이 일어날 뿐이다.
적어도 나는
서로 다른 이념을 가진 사람이
말다툼을 하고, 논쟁한다고 해서
자신의 이념을 포기하는 경우를
거의 못봤다.

세상의 정치나 정치인이나
다 바람과 같은 것이다.
시간의 흐름과 함께
사람들이 싸워댔던 모든 것들이
부질없이 사라져버린다.

그러나
진리는 영원하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복음은
지금도
지옥에 떨어진 영혼을 천국으로 인도한다.
영원한 형벌에서
영원한 복락으로 인도하는
유일한 길이 '믿음의 길'이다.

누구에게나 죽음은 다가오고
심판의 시간은 시시각각 다가온다.
정치에 온 감정과 힘을 쏟아부어 왔던
성도들이 있다면
그 힘의 조금이라도
영혼구원 복음을 위해 사용하면
그게 얼마나 복된 일이 될 수 있을까?

728x90

팔순 감사예배 순서지

환갑, 칠순, 팔순 감사예배도

마찬가지로 진행할 수 있겠다. 

 

팔순 감사예배 순서지.pdf
0.05MB

 

728x90

세상이 많이 변했다.

이런 저런 이유로 이혼이 빈번해졌고

자연스럽게(?)

재혼도 증가하는 추세다.

이는 가장 보수적인 단체인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혹, 재혼 예식 요청을 받고 

당혹스러운 사람들을 위해

순서지를 공유한다. 

재혼예식순서지.pdf
0.06MB

728x90

교회에서 일 하다보면

여러 사람들에게 이런 말을 듣게 됩니다.

 

"우리가 헌금하면 어차피 

다 목사님이 가지잖아요."

 

마치, 교회 헌금을 

목사가 다 관리하고

그 헌금을 목사가 

그대로 주머니에 챙기는 것 처럼 오해하는 겁니다.

 

물론 교회 형편에 따라서 

재정 운영 방법은 많이 다릅니다.

 

예를 들어 교인이 스무명 남짓한

개척교회에서는

담임목사가 재정을 관리할 수 밖에 없습니다.

관리해줄 누구도 없을뿐더러

헌금도 많지 않기 때문에 

맡기는 것도 미안할 정도입니다.

이럴 때에라도!

담임목사는 그 헌금을 

고스란히 자기 생활비로 가지지 못합니다.

작은 교회라도 '운영비'는 듭니다.

심방도 해야 하고, 건물 월세나, 

기타 관리비용이 들어갑니다. 

이런 저런 필수적인 걸 떼고서야

본인이 쓸 것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목사님이 다 가져가잖아요."라는 말은

그런 분들에게는 큰 상처가 될 수 있겠지요.

 

이렇게 작은 교회 말고,

조금 규모가 있는 교회의 경우는 어떨까요?

규모가 있는 교회는 

적어도 '정상적인 교단'에 속한 교회들은 

반드시 '조직'을 세우게 되어 있습니다.

교회 직분자들이 있고,

직분자들이 교회의 여러 역할을 하는 겁니다.

 

교인들이 헌금을 하면요!

그 헌금을 '재정부'라는 조직이 

계수하고, 목적에 따라 비용을 분류합니다. 

'목적'은 그야말로 다양합니다. 

교회의 건물이나 규모가 커질 수록

여기에 따르는 '유지비용'은 

당연히 커질 수 밖에 없습니다. 

전기세, 물세, 음향, 비품,

교육부서 운영비, 교육비, 선교비, 

장학금, 구제금, 차량관련비용,

노회나 총회에 올리는 상회비 등등

어마어마한 항목들이 있고요, 

그러한 비용들이 헌금으로 충당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목회자의 사례비가 책정됩니다. 

담임목사가 자기 월급을 결정하는가?

'거의 대부분의 교회'는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에는 '당회'라는 조직이 있습니다. 

특히 '장로교회'에는 반드시

당회가 있습니다. 

당회란 '교회에서 투표로 뽑힌 장로'와 

'담임목사'로 구성된 

교회의 '지도회'입니다.(치리회라고도 합니다.)

장로님은 교역자가 아니고 평신도입니다.

이분들이 모여서 

매년 교역자의 '사례비'(월급)을 책정합니다.

생각보다 

담임목사는 여기서 자기 사례비에 대해서

주장을 잘 못합니다.

왜냐하면 장로님들이 목사를 속물로 여길까봐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이런 문제로 교회에 분란이 생기면

대부분의 경우 담임목사가 책임지고 

사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다보니

목회자의 사례비는 

생각보다 

정말 많이 적습니다. 

평신도의 판단에 

목회자는 '청렴해야 한다'는 인식이 많고

목회자가 돈이 좀 있으면 타락한다는 인식마저도

있기 때문에 

막상 사례금액을 들으면 

사람들이 놀랄 정도로 적은 경우가 허다합니다.

 

담임목사가 그렇다면

부목사는 말할 것도 없지요.

 

부목사 이하

교회의 부교역자 그룹은 

대한민국에 이름난 대형교회가 아니고는

대부분 차상위계층 수준의 생활을 합니다.

(거기에 4대 보험도 안되어서 

혹시라도 사임하게 되면 막막해집니다.)

어디서는 부목사는 좀 불쌍히 여겨주시길...

 

물론 담임목사님들 중에도 

당회와 관계가 좋고

소위 교회를 부흥시켰다거나 하는 

실적이 있다면

그 실적을 인정받아서 

크게 사례비가 인상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교회나 세상이나 숫자 늘리는데 

혈안이라는 건 좀 안타깝습니다.)

 

자 이렇게 놓고 봤을 때!

교회 재정이

목사들 주머니에 다 들어간다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임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압니다. 언론에 나오는 대단한 목사님들

뒤집어 생각하면 그런 목사님들이니까 

언론이 나온 것 아니겠습니까?)

 

또 한가지 알아야 할 것은!

'당회'에서 '재정'을 정한다고 해서!

당회원들이 마음대로 돈을 쓸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당회가 어떤 결정을 하거나 

어떤 일들을 하면

그 일들에 대해서!

반드시!

'제직회'에서 보고하고 통과되어야 합니다.

제직회란 '교회의 모든 직분자들'의 회의입니다.

'집사, 권사, 시무집사'그룹이죠.

교회마다 다르지만 제직회는 

보통 3개월에 한 번씩 합니다.

 

그리고 그보다 더 큰 회의체가 있는데

'공동의회'라는 것입니다.

공동의회는 '교회에 있는 세례교인'

전체의 회의입니다.

직분이 없어도 '세례교인'이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습니다(입교 포함).

1년에 한 번 하는 모임에 

당회는 재정보고와 사업보고를 하는데

 

이분들이 문제 제기를 하면

당회도 곤란해지기 때문에 

교회 돈 쓰는 일에는 신중해지겠지요?

 

오늘 하고 싶은 이야기는!

여러분이 드린 헌금은

정상적인 교회라면

'목사가 다 자기 주머니에 넣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구조로 되어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역자들에게 너무 짜기 때문에

많은 사역자들이 가난에 허덕이고

사모님들이 일을 하러 나가야 하는 처지입니다.

(사모는 일하면 안되냐? 아니요!)

많은 교회들이 사모에게도 

이런 저런 역할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예배 전체 출석이라든지, 심방이라든지

이런 저런 일들...

여기에 대해서는 다른 곳에서 이야기했으니 

https://1min-christianity.tistory.com/35

이쯤해서 줄이도록 하겠습니다. 

 

대부분의 교회들은 

헌금을 웬만해서는 목적에 맞게 쓰고 있다

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728x90

'헌금'이란 

하나님께 헌신으로 드리는 돈을 말합니다.

 

헌금의 가장 큰 이유는

내가 받은 구원에 대한 '감사'이며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의 일에 대한

'동역'의 의미가 큽니다. 

 

그런 의미에서 헌금은 '자발적'이어야 합니다.

억지로 드리는 것은 

하나님께서도 기뻐하시지 않을 일이고

자신에게도 유익이 없습니다. 

 

자발적으로라고는 하지만

아무런 기준도 없는 건 아닙니다.

확실한 기준은 '십일조'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신약시대에 십일조가 폐지되었다 하지만

그렇지도 않습니다. 

성경에서 보통 '폐지'를 이야기할 때는 

'율법'과 관련된 경우가 대다수입니다.

그런데 십일조는요?

율법 이전 부터 있었던 헌금입니다.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이 생겨나기 

한참 전에!

그들의 첫 조상 아브라함이!

예수님을 예표하는 '멜기세덱' 왕에게 

십일조를 한 내용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율법을 성취하신 예수님 자신이!

십일조에 대해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1:42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는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십일조를 드리지 말라하지 않으시고!

십일조를 하되 '공의와 사랑'도 행해야 한다

말씀하신 겁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대부분 교단에서 

헌금의 기준을 이야기할 때는 

'십일조와 감사 헌금을 비롯하여...'라고

가르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십일조'는 

무엇의 십일조일까요?

어떤 분들은 

월급을 받은 후에 

이런저런 내역들을 다 떼고

남아 있는 '생활비'에 대해서만 

십일조를 하면 된다고 말합니다만...

 

성경으로 생각해보자면 

그런 경우는 없는 것 같습니다. 

오히려

농사를 지을 때에

첫 열매를 다 드린다거나!

전부가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고백이 일반적이었습니다.

그렇다는 것은!

십일조 역시 '수입 전체'에 대한 

십분의 일을 드림이 마땅할 것입니다. 

 

이렇게 드리는 십일조...

어떤 분들은요.

주로 십일조 규모가 크신 분들인 듯 한데

자기 십일조를 쪼개서 

좋은 일에 쓰면 

그것도 하나님이 기뻐하실거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어떤 분들은

본인이 출석하는 교회가 아니라

본인이 아는 어려운 교회에 십일조를 한다거나!

유니세프 같은 단체에 십일조를 하고

그걸 자랑스럽게 여기기도 합니다. 

 

글세요...

십일조는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행위입니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걸 마치 '내것인양' 

내가 마음대로 여기저기에 베푸는 것은

온전한 헌금이 될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 헌금은 '예배행위'입니다. 

내가 예배하는 그 곳에서 드려야 할 것이지!

내 마음대로 하려든다면!

하나님 앞에 월권이 될 수 있음을 기억합시다.

 

만일 누군가를 돕고 싶다면!

'십일조'를 손댈 것이 아니라

그 외에 다른 비용으로 돕는 것이

훨씬 건강한 헌금 생활이 될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십일조는 신자가 해야 할 마땅한 의무임에도!

하나님은 드리는 자에게 

놀라운 복까지도 말씀하셨습니다. 

 

말라기 3:10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이런 복이 있으니까 헌금하자'는 게 아닙니다.

사실 '헌금을 하는 것 자체가 복'입니다.

이건 아는 사람만 아는 특권일 겁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