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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6:6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리시리라"

 

'골방기도'라고 하면!

참 낭만적으로 느껴집니다. 

뭔가 하나님과 나만의 은밀한

장소인듯 하잖아요.

 

하지만...

막상 '골방기도를 하시나요?'라고

물어보면!

많은 분들이 유구무언입니다. 

집에 있다고 해서

가족들이 있는데

'나 기도한다 문열지 마라'

하고 방에 들어가 버린다면

가족들에게 실례이기도 하거든요.

 

무엇보다 집에 있다고 해서

현대인들이 기도시간 챙길만큼

여유롭지도 않잖아요.

퇴근해서 집에 가면

씻고 밥먹고 설거지하고

이런 저런걸 하다 보면 금새 잘 시간입니다.

아침시간도 마찬가지고요. 

일어나 눈 뜨면 출근하기 바쁘죠.

 

그렇게 놓고 보면 

골방기도라는 것도

로망일 뿐이지 

현실성은 많이 떨어지는 주제이긴 합니다. 

 

그런데말입니다. 

이건 예수님 시대의 사람들도 

그리 다르지 않았습니다. 

고고학자들에 따르면!

예수님 당시에 일반인들은 

보통 방 한칸짜리 집에 살았다고 합니다.

지금 처럼 안방, 작은방, 옷방...

이렇게 분류되어있지 않았다는 거에요.

거기에

식구는 좀 많아요?

자녀가 기본 다섯명씩은 있었을 거란 말이죠.

그 아이들이 점잖게 있을리가 만무합니다.

그 많은 식구들 밥하고 빨래하고...

온갖 일을 하다보면!

'골방기도요?'

사치도 이런 사치가 없을 겁니다. 

 

예수께서 이런 현실을 모르실리가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입니다.

모든 성경 학자들은!

이 말씀을 

'공간적인 의미'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1500년대 종교개혁자 칼빈도

마찬가지였어요.

이 말씀은 '단절된 공간'을 강조하는게 아니라

했습니다. 

 

이 구절 바로 앞에서!

이런 전제를 말씀하셨어요.

마태복음6:5

"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기도를 경계하면서!

'골방기도'를 말씀하신 겁니다. 

 

주님께서 염두하신 것은!

사람을 의식하면서 하는 모든 기도였습니다.

사람이 많아도 상관 없습니다. 

금요기도회처럼!

수많은 사람들이 모인 자리도 괜찮습니다.

 

마치 골방에 있는 것 처럼!

기도할 때는

'오로지 하나님께만 주목하라'는 요구입니다.

 

사람을 의식하게 되면요!

우리 기도가 흔들립니다.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들리게 하려고

큰소리로 기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제가 그랬습니다. 

한참 기도원에 다녔을 때!

저는 그 장소에 있는 누구보다 크게 

기도하려고 그야말로 악을 써댔습니다.

그리고 제가 가장 큰소리를 냈을 때!

뭔가 희열을 느꼈습니다. 

"이겼다!" 이런 마음이랄까요?

나 혼자 영광받아 버린 겁니다. 

 

또 어떤 분은 

큰소리로

다른 교인의 잘못을 지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나님! ~~집사님 돈값게 해주세요!"

"하나님 ~~ 궘사님 회개하게 해주세요!"

이러면서 누군가의 잘못을

남들 들으라고 크게 말합니다. 

그거... 하나님이 안들으십니다.

주변 사람들만 듣고요.

자기 평판만 안좋아집니다. 

 

정 반대로 사람 신경쓰는 분이 계세요.

내가 기도 크게 하면 누가 들을 까봐

중얼중얼거리면서 기도하시는 거에요.

중얼거리면서 기도하면 기도가 잘되나?

그런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오히려 

'내게 부르짖으라'고

숱하게 말씀하셨습니다. 

 

크게하냐 작게하냐의 문제라기보다는!

어떤 기도의 장소에서든지!

오직 하나님께만 집중하라는 겁니다.

 

그분이 누구세요?

'아버지'입니다.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제 아이가 지금 가지고 싶은 장난감이 있습니다.

가격이 꽤 나갑니다. 

'이정도나 되는 걸 어떻게 사주나' 생각하는데

아이가 제게 매달려서 계속 구하는 거에요.

"아빠~ 사주세요~

네? 아빠~ 사주세요~"

끝도 없이 이야기합니다. 

 

아... 비싼데...

이거 부담이 큰데...

싶은데...

자꾸 이야기하면 넘어갈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이는요

아빠라면 사줄수 있을 거라고 믿고

매달리는 거거든요.

저는 재정에 따라 안될지 모르겠지만!

세상의 주인이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는 약속하시는 겁니다.

 

뭐라고요?

'갚으시리라'

특이한 표현을 쓰셨어요!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기도했다고해서

그게 하나님 입장에서 

'갚을 일'까지 될까요?

 

돈이건 물건이든 

빌리면 갚는 것이 인지상정이잖아요?

 

하나님은

우리 기도를 그렇게 대하시겠다는 겁니다.

 

우리가 우리의 것을 구했을 뿐인데!

마치 빌린 것을 갚는 것 처럼!

우리의 기도에 응답해주시겠다는 거에요.

 

여러분!

이게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에요!

 

지금,

기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으십니까?

지금까지 기도하지 않아서 

엄청 손해봤다는 생각이 들지 않으세요?

우리 기도합시다. 

갚으신다 하잖아요!

아빠만 빤히 쳐다보면서

"아빠? 사주세요~"라고 매달리는 아이처럼!

우리 하나님께 매달립시다. 

 

이 자리가

여러분의 골방이 되시기를 바라고요!

이곳에서 약속된 응답을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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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2:1-2

"헤롯 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

 

아기 예수님께 경배하러 왔던

'동방박사'

종종 교단에서 이단으로 지목되는 

어떤 단체에서는 

이 '동방'을 

우리나라가 '동방예의지국'이라면서!

'대한민국'이라고 해석합니다. 

그걸 어떻게 잘 버무려서

한국 사람인 교주를 

메시야와 연결하려는 거죠.

 

글세요.

그보다는 성경에 훨씬더 중요한

상징이 있습니다. 

'동쪽'은

종종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방향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에서 쫓겨났을 때

'에덴의 동쪽'으로 쫓겨났고,

그 아들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였을 때도

'에덴 동쪽 놋땅'으로 쫓겨났습니다.

(창세기4:16)

그 외에도 동쪽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방향으로

자주 나왔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 찾아온 '박사'들을 

'동방'에서 온 박사들이라고 

몇번이고 강조한 이유는 분명합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오신 분'이고

그분이 오셨을 때!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던 

죄인들, 이방인들이 

예수님께 나아오는 그림은!

'에덴의 회복'이 되는 것입니다. 

 

'동방 박사'의 경배는!

오늘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우리들에 대한 예표입니다. 

 

이번 성탄절도!

먼길을 마다 않고 아기 예수님께 

나아왔던 동방박사들처럼!

마음을 다해 주님을 예배하며

구원의 기쁨을 만끽하는

복된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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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1:18-25절을 시작하는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이렇게 말하면 

예수님이 어떻게 잉태되었는지

방법이라든지 과정을 말함직합니다.

그렇게 되면 중심은 마리아가 되겠죠?

 

그러나

이야기는 요셉 중심으로 진행됩니다. 

그러다보니 실제로 예수님이 

어떤 방식으로 태어났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히려 이미 임신한 약혼녀 마리아를 

요셉이 어떻게 정식 아내로서 맞이하게

되었는지를 알리는데 주목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그 앞쪽에 있는 '족보'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 족보는 아브라함에서부터 요셉에 

이르는 족보입니다. 

예수님은 이 계보를 따라서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 되신다 했습니다.

즉, 이 계보는 '언약의 계보'입니다. 

 

만일에 요셉이

마리아의 임신을 알고 

그의 뜻대로 약혼을 파기해버렸다면

예수님은 이 계보를 잇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자가 등장한거죠!

그가 말합니다.

20절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그리고 그분이 구약에서 예언된

'메시야'라는 것을

구약 선지자의 말씀을 통해서

확인시켜주셨습니다. 

23절입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이 계시로 인해서!

요셉은 마리아를 아내로 맞이했고!

이로서 예수님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계보를 잇게 되셨습니다.

 

성령으로 잉태되셨기에 

그의 근본은 하늘이시나!

언약적으로는 

다윗의 자손이 되셔서!

구약의 모든 언약을 성취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근본과 

언약 성취는!

그분이 이루신 구원이 얼마나 확실한지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21절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예수님의 나심을 묵상하며

우리의 죄사함을 확신하는

복된 성탄절 되시기를 바랍니다. 

 

영상

https://youtu.be/FtSQRA9TyJ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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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  조상이 누구냐?'라고

누군가 묻는다면 

우리는 

'그래도 좀 위대한 인물'을 찾으려 합니다.

적어도 

'친일파'요..

이런 식으로 대답하지는 않지요.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족보 역시

그럴 거라 기대합니다.

그렇게 치면

예수님 족보에 포함된 '여인'이라 하면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

이삭의 아내 '리브가' 같은 사람들을

떠올릴 거에요.

 

그런데!

정적 예수님 족보에 오른 여인들

면면을 보면 전혀 그렇지가 않습니다.

하나하나가 다 

당시 사람들의 인식에(어쩌면 오늘날까지도)

문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 다섯명을 살펴보겠습니다. 

 

첫번째 여인

마태복음1장3절입니다.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다말'이라는 이름이 나옵니다. 

놀랍게도 '다말'은 '유다'의 며느리입니다.

며느리가 시아버지의 자식을 낳았다?

아침 드라마에나 나올법한 충격입니다.

 

유다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는데!

다말은 첫째 아들과 결혼했습니다. 

그런데 아이를 갖지 못하고 일찍 죽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계대법'에 따라!

다말은 둘째 아들과 결혼했습니다. 

그러나 둘째 아들 역시 일찍 죽었습니다.

유다는 다말이 셋째 아들까지 죽게 할까

두려워서 셋째와의 결혼을 미뤘습니다.

그러자!

다말은 자신을 '창녀'로 치장하여 

유다에게 접근했고!

그렇게 자녀를 낳게 된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얼마나 수치스러운 

사건이었을까요?

 

그리고 두번째 여인은 '라합'입니다.

마태복음1장5절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라합'은 여리고 성에 있었던 '기생'이었습니다.

'이방인'이면서 '기생'이니!

이스라엘에게는 엄청난 수치였을 겁니다.

일단 '이방인'은 

이스라엘에게는 '지옥의 불쏘시게' 정도

이미지였습니다. 

이방인은 '개'와 같이 여겼던 것이 

이스라엘의 인식입니다. 

거기에다가!

'기생이라니요' 

이런 사람이 예수님의 조상에 

들어갔다는게 얼마나 큰

수치이겠습니까!

 

그렇게 다음으로 넘어가면

'룻'이라는 여인입니다.

마태복음1장5절 하반절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룻'에 대해서는 좋은 내용으로 

포장되어 있지만, 

그녀 역시 '이방인'이었습니다. 

더 말할 것도 없지요. 

 

그리고 다음 여인은 

'밧세바'입니다. 

밧세바에 대해서 어떻게 이야기했는지

내용을 보시죠.

마태복음1장6절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심지어 '밧세바'라 하지도 않고 

'우리야의 아내'라고 불렀습니다. 

의도적이죠!

다윗이 '남의 아내를 취했다'는 것입니다. 

불륜이에요!

모든 사람이 압니다. 

그 불륜을 숨기기 위해서 남편인 

우리야를 죽게 만들었다는 걸요!

예수님이 그 후손으로 오셨다는 거죠!

 

그리고 마지막 여인입니다.

본문에는 '이름'만이 아니라 

아예 등장도 안했지만

누구보다도 더 선명하게 드러나는 사람입니다.

바로 '아달랴'입니다. 

아달랴는 북이스라엘의 악한 왕 

아합의 딸입니다. 

아버지만큼이나 악독한 여인입니다. 

그런데 그 여인이 이 족보 어디에 있느냐?

17절에서 보면!

이 족보는 다윗부터 포로기까지 

14명의 왕으로 묶여 있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살펴보면!

다윗 왕조에는 17명의 왕이 있었습니다. 

세명이 빠졌지요!

빠진 세명이 누구인가!

"요아스, 아마샤, 아사랴'입니다. 

바로! 

아달랴의 뒤를 이어 유다의 왕위를 

이어받은 사람들입니다. 

이 세명을 뺌으로서!

유다를 거의 멸망시킬뻔 했던

'아달랴'를 드러냈던 것입니다.

 

자 이렇게 우리는 예수 족보의 

다섯 여인을 살펴보았습니다. 

누구 하나 예수님에게는 합당하지 않는

죄인들이요 이방인이요 문제아들입니다.

 

무슨 의미일까요?

예수님은 바로 이런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다는 것입니다. 

대책 없고, 상처투성이로 망가진 

인생들에게 찾아오신 예수님입니다. 

 

유대인들은 스스로를 위대한 민족

택함 받은 민족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자기가 의롭다고 여기며

살아왔습니다. 

 

아니라는 거죠!

그들 역시 죄인입니다. 

그들이 자랑스러워 마지 않는 

조상들 마저도!

면면을 살펴보면 이런 연약함들 뿐입니다.

그들에게도!

은혜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우리의 모습

우리의 과거!

우리가 살아왔던 궤적들을 돌아보면!

하나님 앞에 합당하지 않은 것 투성입니다.

은혜 없으면!

우리는 진노의 심판 아래 놓인 죄인

이외에 아무것도 아닙니다. 

 

성탄절에 찾아오신 예수님은!

그런 우리를 위해 오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말구유 아기 예수 앞에 겸손해 지시기를 바라고

이런 날 위해 오신 예수님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영상 링크

https://youtu.be/8al1KCElV8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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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1:17

"그런즉 모든 대 수가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열네 대요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갈 때까지

열네 대요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간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열네 대라"

 

마태복음은 '계보'로 시작합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들을 낳고..."

이런 방식으로 

아브라함부터 예수님에게까지 

총 42명의 인물 이름이 나옵니다. 

 

이 계보를 

세 단계로 나누어서 

각각 열 네대를 맞추었습니다.

 

1세대 : 아브라함~다윗

2세대 : 다윗~바벨론 유수

3세대 : 바벨론 유수~그리스도

 

"와 신기하게 14대가 딱딱 맞네..."

싶겠지만

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실제 구약 성경을 펼쳐서 

족보를 일일이 살펴보면

빠진 대수가 있습니다. 

즉 실제로는 열 네대가 넘는다는 거죠.

 

그러니까...

여기서 제시하는 족보는

'신학적 족보'라는 뜻입니다.

어떤 주제를 가리키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숫자를 맞췄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 숫자의 의미는 

7 + 7 = 14

완전수를 두번 하여

'완전'을 강조한 의미입니다.

무엇의 완전인가!

 

먼저 '아브라함 부터 다윗까지'의

열 네대입니다. 

아브라함이 족장시대의 대표자라면

다윗은 왕정시대의 대표자일 것입니다.

이렇게 끊은 것은 납득이 됩니다.

 

그리고 

'다윗에서 바벨론으로 사로잡혀갈 때까지'

열 네대입니다.

다윗의 왕정 시대 전체를 

보여주죠.

여기도 납득할 수 있는 구분점입니다.

 

마지막에 보시면!

'바벨론으로 사로잡혀간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열 네대입니다.

우리는 납득하겠지만!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충격적인 구분점입니다.

왜냐하면!

바벨론으로 사로잡혀간 후 부터라면!

포로기 생활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오는

'포로 회복기'를 말하는 게 옳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맞추기에는!

포로생활이 70년이었기에 

족보로 맞추기에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래서 포로회복기를 넘어서!

14대를 이어보니!

'예수님의 때'까지 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실제 족보가 그렇게 되었는가?'

그건 알 수 없습니다.

아마 맞을 수도 있습니다.

유대인들만큼 족보에 진심인 민족도 없을테니까요.

 

이 족보를 통해서

마태가 이야기하고 싶은 내용은 

무엇이었을까요?

 

이스라엘은 '포로 회복'을 하고 

지금 '자유인'으로 살고 있다고 착각하지만!

"너희는 여전히 남의 나라의 속국"인 걸

지적하는 장치입니다. 

 

새로운 시대!

참된 포로 회복이 일어날 때!

'천하 만민이 복을 받을거'라 하셨던

'아브라함의 언약'과

'영원한 왕위'를 약속하셨던 

'다윗의 언약'이 성취되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일어나는 일임을 보여주려는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밝힌 후에!

마태는 

예수님의 탄생을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신 성탄절은!

참된 자유와 

아브라함, 다윗 언약이 

세상에 나타난 날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탄절을 복된날로 여기고

지구상의 전 교회가 함께 기뻐합니다. 

 

이번 성탄절도!

하나님의 언약 성취를 확신하며!

우리 인생에 복 주시려는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새 힘을 얻는 복된 날이 되기를 바랍니다.

 

영상

https://youtu.be/v6VQf8dRk9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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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이것만으로도 당혹스러운데!

하나님은 두번째 집에갈 부류를 말씀하십니다.

6절

"포도원을 만들고 그 과실을 먹지 못한 자가 있느냐?

그는 집으로 돌아갈지니 

전사하면 타인이 그 과실을 먹을까 하노라"

 

이것도 당혹스러은 일입니다.

표면적으로 보자면

수확한 포도 과실이야 

금방 집에서 가서 먹고 오면 될 일이잖아요?

그런거면 이런 조건에 나오지도 않았겠죠.

 

레위기19:23-25절을 보면

이 말씀의 진위를 알 수가 있습니다. 

먼저 23절

"너희가 그 땅에 들어가 각종 과목을 심거든

그 열매는 아직 할례 받지 못한 

'삼년 동안' 

너희는 그것을 할례 받지 못한 것으로 여겨

먹지 말 것이요!"

일단 3년간은 열린 포도는

그냥 바닥에 버려야 합니다. 

 

거기서 끝이 아니에요!

24절

"넷째 해에는 그 모든 과실이 거룩하니!

(이제 먹을 수 있겠나? 아니죠!)

여호와께 드려 찬송할 것이며"

4년 차 과실은 온전히 하나님께 드리라 합니다.

 

그리고 25절

"다섯째 해에는!

그 열매를 먹을지니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 소산이 풍성하리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여러분!

농사를 시작하고!

무려 5년이 지나서야!

그 과실을 먹을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농사 시작하고 5년이 아직 안됐냐?'

'전쟁터를 떠나서 집에 가라'는 거죠!

5년이나 되는데!

그 기간에 걸칠 사람들은 또 

얼마나 많을까요?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세번째 집에 갈 부류!

7절

"여자와 약혼하고

그와 결혼하지 못한 자가 있느냐?

그는 집에 돌아갈지니 

전사하면 타인이 그를 데려갈까 하노라 하고"

'약혼 한 사람도' 집에 가랍니다.

 

여러분...

약혼... 아직 결혼이 아니잖아요.

결혼이 얼마 남았든지

일단 약혼을 했으면 들어가라는 거죠.

군대 안가려고 마음 먹으면요!

여자 친구랑 계속 약혼 관계만

유지하면 되는 겁니다. 

이렇게 허술한 법이 어디 있겠어요?

게다가!

결혼 하잖아요?

결혼 한 사람에게도 혜택이 있습니다.

신명기24:5

"사람이 새로이 아내를 맞이하였으면 

그를 '군대로 내보내지 말것이요'

아무 직무도 그에게 맡기지 말 것이며

그는 '일 년 동안' 한가하게 집에 있으면서

그가 맞이한 아내를 즐겁게 할지니라"

결혼 한 사람은 또 1년 면제입니다.

 

와... 여기까지만 해도 

사람이 눈에 띄게 줄었을 겁니다. 

 

그런데...

마지막 집에 갈 조건을 보면요.

앞의 세가지 부류와는 차원이 다릅니다.

이거 하나면!

앞에 있는 이유도 

사실상 아무 필요가 없을지 모릅니다.

 

뭐라고 하세요?

8절입니다.

"책임자들은 또 백성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두려워서 마음이 허약한 자가 있느냐

그는 집으로 돌아갈지니...."

세상에!

전쟁이 무서운 사람은 집에 가랍니다.

 

전쟁 안 무서운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전쟁을 앞두고 이게 할 말입니까?

다 도망가버리지 않겠어요?

 

성경에 그 실 예가 있어요.

사사시대 기드온이라는 사람이

전쟁을 위해서 백성들을 소집했을 때!

하나님께서 실제 이걸 실행하셨습니다. 

 

사사기7:3

"이제 너는 백성의 귀에 외쳐 이르기를

누구든지 두려워 떠는 자는 

길르앗 산을 떠나 돌아가라 하라 하시니..."

자 여러분!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계속 보시죠.

"이에 돌아간 백성이 이만 이천 명이요!

 남은 자가 만명이었더라"

전체 3만 2천명 중에서!

2만2천명이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3분의 2 이상이 옳다구나! 하고

도망간 겁니다. 

이런 일이 벌어진다니까요.

 

그런데도!

하나님은 명령하시는 겁니다.

'위의 네가지 사항에 해당되는 

모든 사람은

다 집에 돌려보내라'

 

어쩌시겠다는 거에요?

몇명이 남든지!

그 남은 사람으로!

하나님이 싸우시겠다는 겁니다. 

 

그저 싸우는 것이 아니라!

그 소수의 사람으로라도!

이스라엘을 이기게 하시겠다는 거에요!

 

이게 하나님의 자신감입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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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20:1-9
 
하나의 구절에서 
'겁내지 말며, 두려워하지 말며,
떨지 말며, 놀라지 말라'라고
말씀하실 정도라면!
이 말은 
역설적으로 
'겁나고, 두렵고,
떨리고, 놀랄만한' 상황이란 걸
알 수 있습니다. 
 
어떠한 상황인가?
바로 '전쟁'입니다. 
최근 우크라이나나 가자지구에서
벌어지는 전쟁을 보면서
우리는 전쟁의 참상을 
실시간으로 목격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이런 일이 일어난다는 걸
상상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
 
이스라엘도 마찬가집니다. 
이제 가나안에 들어가면 
전쟁이 시작됩니다. 
피할 수 없는 정복 전쟁입니다.
 
그것도!
약자가 강자를 정복하는 전쟁입니다.
40년간 광야 생활 했던 이스라엘은
전투를 연습한 일이 없습니다. 
무기요? 말과 병거요? 
전쟁 할 수 있는 어떠한 도구도 
없습니다. 
 
그런데 적군은 어떻습니까?
40년 전 가나안 정탐을 다녀왔던
열 정탐꾼이 이렇게 보고했습니다.
 
민수기13:28
"그러나 그 땅 거주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고
심히 클 뿐아니라
거기서 아낙 자손을 보았으며"
32절 하~33절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거기서 네피림 후손인 아낙자손의 
거인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라"
 
이 보고를 듣고
사람들이 두려움에 빠졌고
믿음 없는 이 두려움 때문에!
이스라엘은 무려 40년간이나 
광야를 돌아야 했고,
20세 이상의 모든 사람이 심판받아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1절 말씀입니다.
"네가 나가서 적군과 싸우려 할 때에
말과 병거와 백성
너보다 많음을 볼지라도..."
 
 적들의 강대함은 여전합니다.
싸울만한 무기나 전력이 없는 이스라엘 입니다.
그들 입장에서 생각해보세요.
일방적인 학살을 당할게 분명한데
얼마나 겁이날까요?
얼마나 두렵고 떨리고
적들앞에 놀라게 될까요?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들에게 격려하십니다.
아니,
정확하게는 명령이죠.
즉 두려움은 불순종이라는 말이죠.

자, 이렇게까지 강하게 말씀하시는
이유는 뭘까요?

1절 후반절에 그 대답이 있습니다.
"...애굽 땅에서 너를 인도하여내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하시느니라"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시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 하나님이 어떤 분이세요?
답이 1절에 있지요?
뭐라고 되어있나요?
"애굽에서 너를 인도하여내신"
출애굽의 하나님이십니다.
당대 최강대국이 애굽, 이집트입니다.
그 강대국 애굽을 열 재앙으로 초토화시키셨고
홍해를 갈라 자기 백성을 건지시고
동시에 애굽의 병거와 마병을
수장시키신 분입니다.

그 하나님이!
지금도 이스라엘과 함께 하신다는거에요!
반드시 이기게하신다는겁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그 자신감을 어떻게 나타내시는지 보세요.

먼저 생각해보시죠.
전쟁을 한다고 하면
일단 사람이 많은게 좋을까요,적은게 좋을까요?
당연히 많은것이 좋지요!
군인을 소집하는 징집관 입장에서 생각해보면요.
어쨌거나 한 사람이라도 더 입대시키려 할겁니다.

제가 육군 만기 제대를 했는데요.
입대 전에는 어떻게든 안가고싶었거든요.
근데 제가 너무 문제가 없었던겁니다.
그래도 혹시나 신체검사에서 뭔가
하자가 있지않을까 기대했는데
결국 정상등급으로 입대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제가 올해 발바닥이 아파서
병원에서 엑스레이를 찍었는데...
세상에...
제가 평발이었답니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는데
제 때는 평발은 군 면제가 가능했거든요.

제 신체검사했던 군의관이
틀림없이 알았을텐데
그냥 정상인으로 찍어서
입대를 하게 만들었단 말입니다.

이게 징집관의 입장인거죠
'한 사람이라도 더 입대시키는 것'
한 사람이라도 인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말입니다.

정작 하나님께서 징집관에게 명령하시는 건!

전혀 다른 내용입니다. 

오히려 '한 사람이라도 더 

집으로 돌려보내라' 하시는 겁니다.

이게 하나님의 자신감이라는 거죠. 

 

오늘 본문에는 '집으로 돌아가야 할' 

적어도 네가지 조건이 나옵니다. 

하나 하나를 살펴보면 얼마나 당황스러운지요.

 

첫번째 집에 돌아가야 할 부류입니다.

5절

"책임자들은 백성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새 집을 건축하고 낙성식을 행하지 못한 자가 있느냐

그는 집으로 돌아갈지니 전사하면

타인이 낙성식을 행할까 하노라"

 

여기서 '낙성식'이란

'집을 짓고 하나님께 헌신하는 예식'을 뜻합니다.

성경에서는 오직 '성전과 관련해서만' 

이 단어가 쓰였고요. 

일반 개인의 집에 대한 '낙성식'은 

오늘 본문 이외에는 나오지 않아요.

그래서 '개인 소유의 집'에 대한 낙성식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정확히는 알 수 없는데, 

다행히 당시 문화에 대한 당시 문헌이 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에서 '낙성식'이라 하면 

가정의 가장이 '가족들이 새 집에 들어가서 정착할 때까지'

가정의 안정을 지키는 행위를 '낙성식'이라

인정했답니다. 

'낙성식'이라고 하지만 원문의 단어로 보면요!

'헌신하다' '개시하다' '시작하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일회성의 행사가 아니고!

훨씬 폭넓은 의미가 있고,

기간도 길었다는 겁니다. 

 

생각해보세요. 

"가장이 집을 짓고, 가족이 자리를 잡을 때까지!"

어느정도나 시간이 지나야 이게 가능할까요?

굉장히 주관적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는 작년쯤에 집을 지었어. 

그런데

아직 가족들이 자리를 못잡았네...

그러니 나는 집을 가야겠어'

이러면 할 말이 없어지는 겁니다. 

 

아닌 말로...

몇년 이내로 집 지은 사람들은 다 돌아가게 되는 거죠.

모인 사람들 중에 

'나는 낙성식을 아직 안 마쳤는데요?'

그러면 그들을 막을 수 없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은요?

보내라 하시는 거에요.

상관 없다는 거죠. 

 

그렇게 큰 무리가 우루루 빠져 나갑니다. 

 

이것만으로도 당혹스러운데!

하나님은 두번째 집에갈 부류를 말씀하십니다.

6절

"포도원을 만들고 그 과실을 먹지 못한 자가 있느냐?

그는 집으로 돌아갈지니 

전사하면 타인이 그 과실을 먹을까 하노라"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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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수아5:13-15

13 여호수아가 여리고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눈을 들어 본즉

한 사람이 칼을 빼어 손에 들고 마주 서 있는지라

여호수아가 나아가서 그에게 묻되

너는 우리를 위하느냐 우리의 적들을 위하느냐 하니
14 그가 이르되

아니라

나는 여호와의 군대 대장으로 지금 왔느니라 하는지라

여호수아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절하고

그에게 이르되

내 주여 종에게 무슨 말씀을 하려 하시나이까
15 여호와의 군대 대장이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 하니

여호수아가 그대로 행하니라

 

 

여호수아가 여리고로 가까이 이르렀습니다.

여리고는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가나안에서 첫번째로 싸우는 성입니다.

 

이 때 여호수아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지금까지 여호수아는 모세를 따르며

숱한 기적을 목격했습니다. 

열가지 재앙도 봤고, 40년 광야의 기적도 말이지요.

그럼에도!

이제 자신이 지도자가 되었을 때는 

마음에 두려움이 가득했습니다. 

'내가 과연 해낼 수 있을까?'

'어떻게 저 강대한 적을 상대할까?'

지혜도, 용기도, 실력도... 무엇하나 

자신이 없습니다. 

 

그럴 때에!

눈 앞에 어떤 사람이 서 있습니다. 

13절에 보시면 

'손에 칼을 들고 마주 서 있다' 하죠.

덜컥 겁이 납니다. 

칼을 빼들고 있다는 것은 

언제든지 공격할 준비가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보통 사람은 아닌듯 합니다. 

 

여호수아가 그에게 질문합니다. 

"너는 우리를 위하느냐? 우리 적들을 위하느냐?"

무슨 말이에요?

'너는 우리편이냐? 적이냐?' 묻는 겁니다. 

 

여러분 14절을 보세요!

이 사람의 정체가 뭡니까?

'여호와의 군대 대장'입니다. 

'여호와의 군대 대장'이라면 누구의 편이겠습니까?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편'이어야 하지 않을까요?

"걱정 하지 마라, 나는 너의 편이다" 해 주시면!

얼마나 든든하겠습니까?

 

그런데!!!

그의 대답은 뭐였나요?

"아니라!"입니다. 

이게 뭐에요?

'너는 누구편이냐?' 묻는데!

'아니라'는 대답은 뭔가 안 맞잖아요?

 

이게 도대체 무슨 뜻인가 싶어서!

영어 성경을 봤다는 것 아닙니까?

이거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Neither'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죠.

한국어로 번역하면 '아니라'가 맞긴 합니다.

그러나...

정확한 뜻은 이겁니다. 

"A도 아니고 B도 아니다"

둘 다 아니라는 뜻이에요!

 

의외의 말씀이죠.

하나님은 심지어 

'너의 편도 아니라고' 말씀하신 겁니다. 

 

대신에 주신 말씀은 뭐에요?

14절 중반절!

"나는 여호와의 군대 대장으로 지금 왔느니라"

이게 무슨 말이겠어요?

'나는 여호와의 군대 대장'이라는 말은 이겁니다.

"너가 여호와의 편에 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분명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편이십니다.

 

시편 118:6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가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까"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편이되사

그 백성을 눈동자같이 지키신다 했습니다. 

 

그러나 이 전쟁에서는 아닙니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하나입니다.

"네가 하나님의 편에 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니가 대장이 되어서 하나님이 도우시는게 아니라!

하나님이 대장이시고

너는 그의 뒤를 따르라 하시는 거에요.

 

여호수아는 뒤통수를 딱 맞은 느낌이었을겁니다. 

즉시 얼굴을 땅에 대고 그 앞에 엎드립니다.

그리고 묻습니다. 

"내 주여 종에게 무슨 말씀을 하려 하시나이까?"

군대 대장에게 한수 가르쳐달라 하는 거에요!

'하나님의 편에 선다는 건 어떤거냐?'는 거죠!

 

이에!

군대 대장이 답합니다. 

15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

 

신을 벗으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신을 벗는 행위'가 '종의 행위'라 하며

하나님의 종이 되라, 순종하라 고 말합니다만, 

저는 달리봅니다. 

 

'신을 벗으라'는 이유가 뭡니까?

'네가 선 곳이 거룩하기 때문'입니다. 

이건 '먹는 짐승, 먹지 못하는 짐승'의 구분에 따른 것입니다.

 

모세 율법에 보면 

먹지 못하는 짐승들이 있는데요!

먹지 못하는 짐승의 특징은 

'발이 땅에 가까울 수록 부정한 짐승'입니다. 

그래서 뱀이 가장 부정한 것입니다. 

온 몸을 땅에 비비고 다니니까요.

 

아담이 원죄를 범했을 때에!

하나님은 말씀 하셨습니다. 

창세기3:17

"땅은 너로인해 저주를 받았다"

 

이 상징성으로 인해!

땅에 붙어 사는 짐승, 새들은 

대부분 부정한 짐승으로 먹지 못하게 한 겁니다.

 

그런데!

지금 여호수아가 서 있는 땅은 어떻습니까?

'거룩한 땅'입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땅입니다.

일반적인 땅이라면 

신을 신어서 땅과 떨어져 있어야 하겠지만!

여기는 다릅니다. 

오히려 신을 벗어 땅에 붙어 있어야 합니다. 

 

무슨 말인가요?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께 붙어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임재 안에 있어야 한다는 거에요.

하나님의 말씀을 붙쫓아야 하고요.

모든일에 주님께 여쭈며 기도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께 붙어 있으면!

나머지는 하나님께서 일하신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군대 대장'입니다.

이기게 하시겠다는 증인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수아는 즉시 신을 벗었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확실해졌습니다. 

 

무엇하나 확실하지 않은 삶을 사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위기 앞에서 두려움에 떨 때에!

우리는 하나님께 붙어 있어야 합니다.

그분의 편에 서서

그분이 원하시는 것을 구해야 합니다. 

 

마태복음6:33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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