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신' 또는 '하나님'이라고 할 때
그 '신'은 '마땅히 어떤 존재여야 하는지'
꼭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몇가지만 이야기해볼까요?
첫번째는 '전지함'입니다.
'전.지.' 모든 것을 안다는 말이죠.
마땅히 신이라면 '모든 것을 알아야' 합니다.
모르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 만으로
그에게는 신의 자격이 없습니다.
두번째는 ‘편재성‘입니다.
’편재‘라는 ’모든 곳에 존재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곳에는
하나님의 숨결이 닿지 않는 곳이 없을 터입니다.
세번째는 ’전능함으로 주관하심' 입니다.
’전!능!’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말입니다.
‘불가능’이야 말로 신에게는 어울리는 말이
아닐 것입니다.
그 전능하심으로
세상을 ‘주관하십'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만 하고서
세상을 그냥 방치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세상이 유지, 발전하도록
직접 운영하십니다.
참새 한마리도 하나님의 허락이 없으면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말씀은
주관의 실체를 잘 보여줍니다.
적어도 제가 믿는 하나님은
이러한 존재이고요, 그래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은 신이라면
저는 믿지도 따르지도 않았을 겁니다.
자,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이 철학적 믿음을요!
개인에게 적용한다면 어떤 느낌이 될까요?
전지, 편재, 전능, 주관의 하나님이
나랑 어떤 상관이 있는가!
그 말씀이
바로 시편 139편입니다.
이 말씀은 따로 설명할 것도 없습니다.
이 배경을 알고 본문을 읽으면
그 자체로 은혜입니다.
먼저 ’전지‘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이
나랑 어떤 상관인지 볼까요?
1절~6절입니다.
“1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2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3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4 여호와여 내의 말을 <알지 못하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이렇듯 하나님은 ‘나의 존재’와 ‘나의 일거수일투족’
‘심지어 내 생각과 말까지‘ 속속히 알고 계십니다.
다만 그 앎은, 나를 정죄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내 잘못을 캐내기 위함이 아닙니다.
5,6절을 볼까요?
“5 주께서 나의 앞뒤를 둘러 싸시고
내게 안수하셨나이다.
6 이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하나이다”
’안수하셨다‘ 다른 말로는
’손바닥으로 나를 붙드신다‘는 뜻입니다.
잘 생각해보세요!
누군가 내 일거수 일투족
심지어 내 생각까지 꿰뚫어보는
그런 사람이 있다면
어떠실 것 같습니까?
두려울겁니다.
그에게 약점을 잡혔다는 생각이 들거고
그 사람을 피해다니게 될 겁니다.
우리는 불완전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분명 우리의 약점과
부족함 범죄를 알고 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내게 안수하신답니다.
나의 편에 서서 나를 지켜주신답니다.
그러니 6절이죠!
"이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하나이다"
모든 것을 아시는 전지하신 하나님은
'나의' 모든 것도 아십니다.
나의 형편과 처지도 아시고
연약함도 잘아십니다.
내가 기도하기 전에도
'안다 아들아 내가 잘 안다'
말씀하시는 우리 아버지 이십니다.
둘째, 편재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어디에나 존재하시는 하나님은
'내가' 어디에 있을지라도
'거기에' 함께 하십니다.
7절에서 12절까지
주욱~ 읽어보겠습니다.
"7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8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9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10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11 내가 혹시 말하기를
흑암이 반드시 나를 덮고
나를 두른 빛은 밤이 되리라 할지라도
12 주에게는 흑암이 숨기지 못하며
밤이 낮과 같이 비추이나니
주에게는 흑암과 빛이 같음이니이다"
내가 세상 어디에 있을지라도
하나님은 거기에 계십니다.
그냥 계시면서 지켜보시기만 하지 않죠.
10절 '나를 인도하시며, 나를 붙들어' 주십니다.
그 자리가
혹, 절망의 자리라서!
'흑암'처럼 느껴지는 자리일지라도!
하나님에게는 '흑암이나 빛이나'
차이가 없으시기에!
하나님은 그곳에서도 함께 하시며
우리이게 빛을 비추어주십니다.
지금 여러분이 이 글을 읽고 있는
그 자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절망가운데 있을지라도!
하나님은 곁에 계시며
붙들고 인도하실 것입니다.
셋째, 전능함으로 주관하시는 분입니다.
'모든 것이 가능하신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것 처럼
'여러분을' 친히 만드셨습니다.
여러분은 우연의 존재가 아닙니다.
우선 13절~15절을 보시죠.
"13 주께서 내 내장을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만드셨나이다
14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하심이라
주께서 하시는 일이 기묘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
15 내가 은밀한데서 지음을 받고
땅의 깊은 곳에서 기이하게
지음을 받았을 때에
나의 형체가 주의 앞에
숨겨지지 못하였나이다"
네!
하나님만큼 나를 잘 아시는 분은 없습니다.
그분이 나를 친히 '나'라는 존재를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저 만드시기만 한게 아닙니다.
내가 살아갈 인생도 설계해 두셨습니다.
16절입니다.
"내 형질이 이루어지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루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
하나님은 내가 태어나면서 죽을 때까지
삶의 행적과 행보를 다 알고 계십니다.
다 설계하셨습니다.
내 인생이 어떻게 흘러갈지!
하나님은 아신다는 겁니다.
내 인생의 책임을!
하나님이 지신다는 말이기도 하죠.
최선의 삶을 살도록 인도하신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시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17,18절
"17 하나님이여 주의 생각이
내게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그 수가 어찌 그리 많은지요
18 내가 세려고 할지라도
그 수가 모래보다 많도소이다
내가 깰 때에도 여전히 주와 함께 있나이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이 계획과 섭리는
우리가 도저히 깨달을 수도 없고
도달할 수도 없는 진리입니다.
하나님이 '다 아신다'는 고백은
하나님이 '예정하셨다'는 말과도
동일합니다.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예정론'은
정말 많은 공격을 받는 교리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사람들에게는
너무나도 은혜로운 진리인데
불신자에게는 얼마나 불편한
이론인지 모릅니다.
그런 이들은요.
결국 하나님에 대한 '존재'를
거부하게 됩니다.
기독교 진리를 대적하는 자리에 섭니다.
20절을 보세요.
"그들이 주를 대하여 악하게 말하며
주의 원수들이 주의 이름으로
헛되이 맹세하나이다."
우리는요!
철저하게 진리의 편에 서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의 말들에
휩쓸려서 하나님을 의심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전지, 편재, 전능의 하나님께'
내 인생을 온전히 맡겨 드려야 합니다.
그러므로 시인은 결론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23,24절
"23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24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
이 땅에서의 삶 뿐만 아니라!
'영원한 길'로 인도해주시기를!
그렇게 인생을 넘어 영생에 이르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는
시인입니다.
이 하나님의 나의 하나님입니다.
이 하나님이 여러분의 하나님입니다.
무엇하나 확실한 것 없는 세상에서
더할 수 없이 확실하신 하나님께
오늘도 우리 자신을 맡겨드립시다.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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