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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8:14-17]
14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이 사마리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매
15 그들이 내려가서 그들을 위하여 성령 받기를 기도하니
16 이는 아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 내리신 일이 없고 오직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만 받을 뿐이더라
17 이에 두 사도가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을 받는지라

사도행전 8:14-17 말씀 묵상: 성령 받음의 의미와 교회의 확장

오늘 함께 묵상할 말씀은 사도행전 8장 14절부터 17절입니다. 이 구절은 빌립 집사의 사마리아 전도를 통해 예수를 믿게 된 사람들에게 예루살렘 교회가 베드로와 요한을 파송하여 그들이 성령을 받게 되는 중요한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짧은 말씀을 통해 우리는 성령 받음의 의미와 초대교회의 성장 과정에 대한 귀한 통찰을 얻을 수 있습니다.

1. 사마리아인들의 회심과 예루살렘 교회의 반응
빌립 집사의 열정적인 복음 전파를 통해 사마리아에는 놀라운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세례를 받았다는 소식은 예루살렘 교회에 전달되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유대인들에게 사마리아인들은 혈통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순수하지 못한 존재로 여겨졌습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예루살렘 교회가 사마리아인들의 구원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문제는 중요한 사안이었습니다.

2. 베드로와 요한의 파송: 교회의 연합과 권위
예루살렘 교회는 이 문제를 신중하게 다루기 위해 교회의 중요한 지도자인 베드로와 요한 두 사람을 사마리아로 파송합니다. 성경에서 '두 증인'이라는 숫자는 진리의 확실성과 권위를 상징합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두 사도를 파송한 것은 사마리아에서 일어난 구원 역사를 인정하고 그들을 교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는 중요한 결정이었음을 보여줍니다. 이는 교회의 연합과 보편성을 지향하는 초대교회의 노력을 엿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3. 안수와 성령 강림: 구원의 완성
베드로와 요한은 사마리아에 도착하여 이미 세례를 받은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고 안수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이 성령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는 단순히 새로운 신자들이 예수님을 믿게 된 것에서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 그들을 온전히 인정하시고 그들에게 능력을 부어주셨음을 의미합니다. 성령 강림은 그들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교회의 일원으로서 동등한 자격을 갖게 되었음을 확증하는 증거였습니다.

4. 성령 받음의 의미: 교회의 확장과 질서
사마리아인들의 성령 받음은 초대교회에 중요한 의미를 던져줍니다. 첫째, 이는 복음이 예루살렘을 넘어 사마리아로, 즉 이방인들에게까지 확장되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중요한 단계임을 보여줍니다. 둘째, 이는 교회가 인종적, 문화적 장벽을 넘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는 보편적인 공동체임을 확인시켜 줍니다. 셋째,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들이 파송되고 안수를 통해 성령이 임하는 과정은 교회가 질서 있는 과정을 통해 확장되어 갔음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성령을 통해 구원을 이루시지만, 동시에 교회의 권위와 질서를 존중하며 그분의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

결론
사도행전 8장 14-17절은 성령 받음이 단순한 개인의 경험을 넘어 교회의 확장과 연합에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사마리아인들의 성령 체험은 초대교회가 유대인 중심에서 벗어나 온 민족을 아우르는 보편적인 교회로 성장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 또한 성령의 역사하심 안에서 서로를 존중하고, 교회의 질서를 따라 복음을 전하며, 하나님 나라를 확장해 나가는 성숙한 믿음의 공동체를 이루어가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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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

그리고 이스라엘과 가자지구의 전쟁

상황이 점점 심상치 않게

번져가고 있다는 소식이 들립니다.

 

게다가 일본의 대지진

미국 중국 등 

여러 나라의 자연 재해 소식 역시도

하루가 멀다하고 들려오지요. 

'수십년만의 처음'

'수백년만의 처음'

이런 말들이 심심치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지구 소멸의 위기를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이야말로

성경이 이야기하는 

'최후 심판의 때'가 도래한 걸까요?

 

누가복음21:12,13

"또 이르시되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곳곳에 큰 지진과 기근과 전염병이 있겠고

또 무서운 일과

하늘로부터 큰 징조들이 있으리라"

 

라고...

예언되었던 그 일이 

우리 시대에 일어나는 걸까요?

 

그럴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는 

확답할 수 없습니다. 

 

왜냐고요?

예수께서 친히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한다'

하셨기 때문입니다.(마태복음25:13)

 

아무리 이런 일들이 일어나도

그것으로 예수님의 재림 심판의 날을

예측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예수님 자신도 

기근과 재난에 대해서 

'그게 끝의 신호'라 하지 않으셨습니다.

 

마태복음24:6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하지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아직 끝은 아니니라"

 

'아직 끝은 아니라' 하셨습니다. 

 

무엇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종말에 있을 재난 예고 본문'에서

'종말'은 

'세상 끝날의 종말'이라고 

명시되어 있지도 않습니다. 

 

종말의 날에 

전쟁과 기근이 있을 거라는 

예고는 세개의 복음서에서 

똑같이 나옵니다. 

 

마태복음24장, 마가복음13장, 누가복음21장

세 군데의 말씀이 공히 이야기합니다.

 

이 말씀의 배경을 보면!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서 나오시면서' 

주신 말씀입니다. 

 

제자들이 '성전의 아름다움'에 감탄하자

예수께서는 

'이 성전이 파괴될 것'을 예고하십니다.

누가복음21:6

"너희 보는 이것들이 날이 이르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그러자 제자들은 예수님께 

'뜬금없게도' 이렇게 여쭙지요.

마태복음24:3

"예수께서 감람 산 위에 앉으셨을 때에 

제자들이 조용히 와서 이르되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예수님은 '성전 파괴'를 말씀하셨는데

제자들은 '세상의 끝날'을 떠올렸습니다.

 

이게 무슨 뜻일까요?

하나님의 집인 '성전이 파괴되는 것'을

곧 '세상의 끝날'로 인식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성전'이 '우주의 중심'입니다.

성전이 파괴된다는 것은

그들에게 있어서

'세상의 끝'과 다를바 없다는 거죠.

 

그렇게 이해해야만!

'돌위에 돌 하나 남지 않는다'는 말씀과

'세상 끝'의 이야기가 연결되는 것입니다.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에 따르면

AD70년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 될 때

로마 군인들이 

예루살렘 성벽에 박혀있던

보석들을 빼내려고

실벽들을 깨트려서

실제 '돌위에 돌 하나 남지 않는다'는 

주님의 말씀이 성취되었다 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종말은!

옛 세상, 즉 옛 언약의 종말을

의미한다는 것이

많은 성경학자들이 

동의하는 내용입니다. 

 

그러니...

오늘날 '전쟁'과 '재난'의 소식들이 

들려오는 것을 보며

이것이 

'성경의 종말'이라고 

사람들을 미혹하는 이야기에 

속아서는 안됩니다.

 

주님은 언제 오실지 모릅니다. 

내일 오실지

이 글을 읽는 중에 오실지

1000년 후에 오실지 모릅니다.

 

그저 우리는 

하나님이 허락하신 

오늘이라는 날을 성실하게

살아갈 사명이 있을 뿐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4
"형제들아 너희는 어둠에 있지 아니하매

그 날이

도둑 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

 

복음의 사람들에게는

그 날이 두려움의 날이 아닌

기쁨과 즐거움의 날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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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다니는 교회의 예배 질이 떨어져서
-  강단의 설교가 마음에 차지 않아서
- 교회의 누군가에게 시험 들어서

그외의 여러가지 이유로 예배를 폐하거나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하고있다면, 그 것 때문에 괴롭고 힘들다면

시편 중에서도 '다윗의 시, 곧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라는 제목을 곱씹어 생각해보자.

다윗은 십수년동안 성전에 올라가지 못했다.
다윗 당시에는 아직 성전이 세워지기 전이기 때문에, 성막에 가지 못했다고 보면 되겠다.
사울 왕이 다윗을 죽이려 쫓아다니는 중이다. 혹 성전에 가게 되면 바로 잡힐 텐데 어찌 갈 수 있겠는가?
그야말로
'어쩔 수 없이' 예배 드릴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다윗의 마음은 항상 성전(성막)을 향해 있었고, 언제든지 성전에 달려갈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다윗의 마음을 기뻐 받아주셨고, 그의 시를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가 되게하셨다.

우리는 어떤가? 혹... 정말 생명이 달린 문제 때문에 예배에 나오지 못하는 경우도 있을터다. 그렇다면 '성전을 고대했던' 다윗을 기억하자. 다윗의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고 또 찾자...
그러나 그렇지 않다면, 그저 개인적 나태함으로 인해 또는 이런 저런 상황에 치어서 예배가 무너져 있다면 '성전에 올라가자'
예배의 자리를 찾아 가고, 찬송의 고백을 하며, 기도 하자. '주님 저 왔습니다.' 그리고 말씀을 듣자. 들어보자. 과연 그러한가 생각하고 고민하자. 예배 마무리 축도에 머리를 숙이자.
하나님을 사모하고 찾는 자를 하나님은 언제든지 맞이해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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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아담과 하와는 천국에 갔나요?"

 

오늘 아침에 아이들이 물었던 내용이다. 

'그렇네... 아담과 하와는 범죄했고 예수님을 믿지도 않았는데

 과연 천국에 갔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답은? 

"물론이지!'

 

"에이! 성경에 그런 이야기가 없는데 어떻게 알아요?"

 

어쨌건, 이런 질문을 하는 아이들이 대견했고, 

목사 아빠로서 기분이 매우 좋았다. 

이럴 때는 빨리 답을 해주는 것이 인지상정.

 

우리가 구원 받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해서 죽어주셨기 때문이다. 

이것을 '대속'이라고 부른다.

 

하나님은 구약시대 내내 이 '대속'에 대해 알려주셨다.

어떤 이스라엘 사람이 죄를 지었을 때

소나 양과 같은 짐승이 대신 죽어서 

그 사람의 죄를 대신 하게 했다. 

 

물론, 짐승이 인간의 죄를 온전히 사할 수는 없다. 

짐승의 죽음은 

궁극적인 죄사함을 나타내시는 예수님의 예표이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했을 때!

그들은 자신들의 벌거벗음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자신에게 수치였다. 

이 수치를 가리기 위해 나뭇잎으로 

옷을 만들어 입었지만, 

바람이 불면 부스러져 수치를 가릴 수 없었다.

스스로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이 때 하나님이 그들에게 베푸신 은혜가 무엇인가!

창세기3: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가죽옷'을 만들기 위해서는 

어떤 짐승이 희생되어야 한다. 

피흘리고 죽어야한다. 

 

무슨 말인가!

하나님은 아담 하와에게

그들의 죄를 위한 대속의 예표를 보여주셨단 말이다.

즉, 아담과 하와는 

예표되신 예수님 안에서 죄사함을 받았다는 것이고,

구원 받고 천국에 들어갔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 아들 아벨은

처음부터 짐승으로 제사를 드릴 줄 알았을 터이다. 

창세기4:4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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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에서 사역하기 위해서는 

여느 취업과 마찬가지로 이력서 자기소개서 등

사역하고자 하는 교회에 제출해야 한다. 

 

만일 서류 전형에 통과 하면 

이차로는 면접을 하게 되는데, 

부목사의 면접의 경우에는 

담임목사 또는 기존에 있는 선임목사가 

면접을 진행하고, 

담임목사 면접의 경우에는

해당 교회의 담임목사가 이미 은퇴(또는 원로 추대)가 

된 상태이므로 임시 당회장과 

시무장로가 면접을 진행하는 경우가 많다. 

 

여기서는 담임목사 면접으로 진행하고자 한다. 

담임목사 면접의 경우 

장로의 주된 관심사는 

'숫자를 늘려줄 수 있느냐?'하는 것이다. 

비판으로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장로는 교회를 치리하는 주체로서 

해당교회의 지속적인 존재를 고민하기에 

'숫자'에 대한 생각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을 이해하지 못한채

'숫자에 꽉막힌 꼰대'로 대하면 

일단 면접에서는 떨어진다고 생각하면 된다. 

그만큼의 책임감을 가진 장로를 이해하는 마음!

그 마음을 가지고 대해보자.

훨씬 편안하게 면접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양보하지 못하는 진리의 영역이 있다.

숫자, 부흥은 '하나님의 영역'이다. 

그걸 인정하지 않고 숫자 불리기에 

열을 올리다보면, 기존 성도도 상처를 입고,

결국 담임목사 자신에게도 부매랑이 날아온다. 

 

그 사실을 분명히 하라!

"사람을 늘리고, 숫자를 많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역이라고 확신합니다."

 

그 다음이 중요하다. 

"그럼에도, 저는 숫자를 늘리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지 알고 있습니다." 

"물론 그렇게 한다고 해서 

100% 사람이 몰린다고 장담은 못하지만

이전의 사역에서 이러이러한 방법으로 했을 때

부흥을 경험했습니다."

라고 말함으로서

분위기를 자신의 것으로 가져와야 한다. 

 

 

또한 면접 보는 교회에 대해 미리 알아보는 센스도

필요하다. 

지역의 인구 분포라든지, 교회의 역사라든지, 

알 수 있을 내용은 파악해서

교회에 맞는 솔루션을 말할 수 있다면, 

굉장히 점수를 얻을 수 있다. 

 

자신이 지금까지 해왔고, 배워왔던 목회를 정리하고

어떤 방향의 목회를 하고 싶은지, 

최종적으로 목회를 통해 무엇을 이루고싶은지

구체적으로 답을 듣고 싶어 한다. 

이런 부분은 평소에 고민하며 생각해 두자. 

 

또한, 임시당회장이 주로 묻는 질문은 이렇다. 

기도생활은 어떻게 하며 얼마나 하는지

책을 어느정도나 읽으며 가장 감명깊은 책, 최근에 읽은책 등

그 내용을 알려달라고 할 수 있다. 

미리 준비되어 있다면 당황하지 않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면접의 분위기를 내것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질문에 끌려 다니다보면 

점점 더 식은 땀이 나는 상황으로 몰릴 수 있다.

면접의 질문이 점차로 쉬워진다면 

잘풀리는 것으로 생각하면 된다.

 

이러저러한 방법들이 있지만, 

면접이 끝났다면 

더이상 미련을 두지 말라!

그곳에서 사역을 하는 건 

전적으로 하나님의 영역이다. 

내가 아쉬워할 필요는 없다. 

다만, 이곳에서 사역을 하게 되든지 아니든지

다음에 혹시 올 기회를 준비하는 것이 지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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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에서 '목회자가 교인을 섬긴다'라는 말을 할 때,

'섬김'이라는 개념을 오해하는 모습을 보곤 한다.

 

교회 사무실에서 목회자가

교인의 팩스를 대신 보내주는 걸 섬김이라 하고, 

환우가 몸이 아파서 집이 지저분 할 때 

목회자가 가서 청소해주면 섬김이라고 한다. 

교인들이 모일 때에 

목회자가 사비를 털어서 음료를 사면 섬김이고,

예배 시간에 주보, 헌금 봉투 챙겨주면

그게 섬김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물론 이것도 '섬김'의 모습일 수 있다. 

그러나 

'목회자의 섬김'이라고 할 때!

'그 섬김'과는 거리가 많다. 

 

단도직입적으로 목회자의 섬김이란

'말씀을 전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성도들을 먹이는 것이

진정한 '목회자의 섬김'인 것이다. 

 

구약 시대 레위인 역시도 제사장 지파로서 

이스라엘을 섬기는 역할을 했다. 

여기서의 섬김 역시도 

이스라엘 백성들의 사소한 일들 까지 돌보는

일이 아니었다. 

제사와 희생 제물을 드리는 일들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를 맺게 하는 것,

그래서 백성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존재하도록 돕는 것,

그것이 그들의 '섬김'이었다. 

 

교회의 목회자도 마찬가지이다. 

성도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존재하게 돕는 

유일한 방법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여러 교회에서 여러 목회자를 모시면서

두 극단의 '섬김'을 경험했다. 

한 목회자는 '말씀 전함'을 '섬김'으로 정의 했고, 

또 다른 목회자는 '교인의 사소한 일들을 돕는 것'을 '섬김'이라 했다.

교역자들에게 각각의 스타일 대로 '섬김'을 요청했다. 

 

처음에는 '사소한 일들을 돕는 봉사'가 옳다고 나도 생각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목회자들의 소위 '사소한 봉사'를 받는 교인들은 

목회자를 점차로 '심부름 꾼' 그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많은 일을 시키려 들었고,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고 여겼으며, 

원하는 대로 조금이라도 해주지 않으면 

시험에 들었다느니, 내가 헌금을 얼마를 하고 있다느니,

짜증을 내거나 화를 내는 일이 적지 않았다. 

 

반면, '말씀 전함'을 '섬김'으로 여기는 교회를 보자. 

나는 '극단적'이라고 했다. 

그분은 오히려 교역자가 '사소한 봉사'를 하지 못하도록 하셨다.

심지어 교역자실을 '말씀 준비하는 공간'으로 

교인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무거운 거 드는 일이라든지, 청소같은 일 역시 

교역자가 '해서는 안되는 일'이었다.

대신에!

교역자들은 '말씀 설교'에 목숨을 걸어야 했다.

설교 메시지는 분명해야 했고, 

한 번 한 번의 설교를 위해 시간과 몸을 갈아 넣어야 했다.

설교를 제대로 하지 않았을 때는 불호령이 떨어졌다. 

어땠을까?

교인들은 

자신들의 '사소한 필요'를 채워주지 않는 것에 대해

어떠한 불만도 없었다. 

오히려 그런 일들은 교인들이 스스로 도맡으려 했다.

교회의 존재와 사역에 만족했고, 

교역자들을 존중해주었다. 

 

요한3서 1:2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목회에서의 '섬김'은 '영혼을 섬기는 것'이다. 

성도의 영혼을 섬기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다. 

 

여전히 교회의 교역자들은 

온갖 잡무에 피곤해 하는 것을 본다. 

행사 준비에, 교인들의 형편과 필요 채우는 일에, 

예배 숫자 늘리는 일에, 교회의 여러 행정과 사무에, 

대부분 '설교 준비'는 집에와서 밤늦게 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강단의 설교가 약해질 수 밖에 없는 구조이다. 

 

'섬김'의 본질을 다시 생각해보고 바른 섬김을 회복하는

교회를 세워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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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면세계의 질서와 영적 성장 2부~5부까지 한꺼번에 읽고 끝내려 한다.

2부 시간사용
시간을 잘 사용하는 것은 ‘내면세계의 질서를 세우는’ 중요한 요소다.
돈과 재정에 대해서 예산을 세우고 사용하지 않으면 항상 부족한 것 처럼!
시간 역시도 미리 계획하지 않으면 항상 부족함에 쫓기듯 살아갈 수 밖에 없다.
시간에 쫓겨 사는 사람이 ‘내면 세계’의 질서를 세우는건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무질서한 상태에 있는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거의 누리지 못한다.”p.134.
“한정된 시간에도 같은 원칙이 적용된다.
꼭 써야할 경상비와 하고 싶은 일에 소요되는 임시비를 철저히 구별해야 한다”p.136.
“어느날 나는 내가 가장 중요한 시간을 할애한 일들이 공통점을 가지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것은 혹 무시된다 하더라도 절대로 즉시 고함치지는 않는 일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면, 내가 영적 훈련을 소흘히 한다고 해서 하나님은 당당 고함치시지는 않는다.
나는 얼마동안은 그런대로 버틸 수 있다.
그리고 가족을 위한 시간을 할애하지 않았을 때도 가족들은 잘 이해하고 용서해준다.
가끔 즉각적 반응과 관심을 요구하는 일부 교인들보다 더 관대한 편이다.
비극적인사실은, 그것들이 너무 오래 무시되면 마침내 가족관계나 휴식 영적 훈련 등이 심각한 지경에 처하여 그 결과를 모면하기에는 너무 늦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p.160.

 

질문.

 1) 하나님과 만남의 시간은 얼마나 가지시는지요? 주로 언제?

 2) 내 시간의 우선순위는 주로 무엇인가요?

 3) 내 시간에서 '경상비'와 '임시비'의 비율은?

3부 지혜와 지식
뛰어난 운동 선수가 장거리 운동에서 페이스 조정을 실패하는 경우가 있다.
장거리 운동에서는 뛰어난 운동신경보다는 꾸준한 노력이 더 필요하다.
삶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타고난 명석함으로 인생의 초반에 잘 나가는 사람이 있지만, 책을 읽고 연구하면서 자신을 채워가지 않으면! 결국 마지막까지 달려나아갈 수 없게 된다.
마치 ‘한번도 읽히지 않은 위대한 책자’ 처럼! 겉모양은 훌륭하나 쓰이지 않은 것과 간다.

"지성은 사고하고, 분석하고, 혁신할 수 있도록 운련되어야 한다. 내면세계의 질서가 바로잡히 사람들은 사고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한다. 그들의 정신은 늘 깨어있고 활발하게 활동하며 매일 새로운 정보를 입수하며 정기적으로 새로운 발견과 결론을 창출해 낸다."p.174.

"다른 사람들의 비판에 귀 기울일 때에도 항상 성장이 이루어진다. 그렇게 하기란 어느 누구에게도 쉽지 않다. 네비게이토 창설자인 도슨 트로트맨은 자신에 대한 모든 비판을 잘 다루는 법을 터득했다. 아무리 공정하지 못한 비판처럼 보일지라도 그는 항상 그것을 기도의 골방으로 가지고 가서 주님 앞에 사실대로 털어놓곤 했다. 그러고 나서 '주님, 이 비판 속에 감춰져 있는 진실의 알맹이를 보여 주옵소서'... 나는 일말의 진리도 담겨 있지 않은 비판은 거의 들어보지 못했다. 어떤 진리는 아주 사소했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진리였다."p.202.

 

질문.

 1) 요즘 한참 배우고 있는 분야는 무엇인가요? '자기 분야'와 '비전공? 분야'

 2) 앞으로 배우고 싶은 것이 있다면?

 3) 다른 사람이 나에 대해 비판하는 말을 들었을 때 어떻게 받아들이시나요?

4부 영적인 힘
사실상 이 이야기를 하려고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한 것 같다.
인생의 모든 버팀목이 사라져버렸을 때!
그는 자신의 내면에서부터 그 힘을 이끌어내야 한다.
오직 ‘영적인 힘’만이!
그를 모든 어려움에서 버티고 이기게 할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어야 한다.
침묵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헤아릴 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잘 새겨야 한다.
찬송하며, 송축하며, 고백하라!
이러한 신앙의 기본기들을 회복하면서!
세상을 이길 힘을 내면에서부터 갖추어가야 한다.

"분명한 게 하나 있다 만일 우리가 영적 훈련을 쌓기로 결심하지 않는다면, 언젠가 하워드 러틀리지처럼 그러한 도전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을 후회할 날이 올 것이다."p.221.

"내면의 정원을 계속 돌보고 하나님의 영이 거기에 거하시면 꾸준히 수확을 거두게 된다. 그러면 어떤 열매를 수확할까? 용기, 희망, 사랑, 인내, 기쁨 평안 같은 것들이다. 자제력이라는 흔치 않은 능력, 악을 분별하고 진리를 찾아내는 능력도 거두게 된다."p.224.

"그리스도인이 흔히 무시하는 매우 중요한 다섯가지 영적 훈련 - 침묵과 고독 추구, 찬양, 규칙적으로 하나님께 귀기울이기, 사색과 묵상의 경험, 예배하고 중보하는 기도"p.232.

 

질문.

 1) 영적 훈련을 쌓기로 결정한 때는 언제인가요? 계기는?

 2) 그리스도인이 흔히 무시하는 다섯가지 영적 훈련중에서 내가 가장 약한 분야는?


5부 회복
이제 연세가 많은 작가는
자신의 인생에서 중요한 두가지를 제시한다.
하나는 친구들이다.
대문자F. 로 지칭되는 친구들은 무슨 이야기든 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자신의 잘못도 진심으로 지적해 줄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좋은 친구를 붙여달라고 기도하라.
또 하나는 ‘쉼’이다.
참된 쉼은 ‘여가’ 이상의 의미가 있다.
이는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접붙여 있어야하가는 것이다.

 

질문.

 1) F친구가 있는가?

 2) 참된 안식으로서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을 매주일 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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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4장에서
예수님은 승천할 것을 말씀하시면서
'보혜사'를 보내주신다고 약속하신다.


이 때 예수께서는
16절에서
"또 다른 보혜사"를 주신다고 한다.
여기서 '또 다른'이라는 말은
원래 보혜사가 있다는 것이고,
원래의 보혜사는 예수님이다.

즉, 보혜사이신 성령이 하시는 일은
원래 보혜사이신 예수께서 하셨던 일
이라는 것이다.

이 일에 대해서 몇가지 생각해 볼 것이 있다.

'보혜사'란 무엇인가?
한문으로 풀어보자면
保惠師이다.
'지킬 보, 은혜 은, 스승 사'인데,
지키시고, 은혜 주시고, 가르치시는 분
이라는 것이다.
헬라어로는
파라클레이토스인데
법정용어이고
영어로는 카운셀러로 번역된다.
우리로 치면 '변호사'라고 할 수 있을까?

그러나 오늘날의 일반적인 변호사와는
결이 다르다.
고대사회의 변호사는
변호비용을 받으면 맡은 건만 처리하고
끝나는 변호사가 아니었다.
그야말로 함께 하면서, 지켜주고, 보호해주고
멘탈케어도 해주는 든든한 존재였다.

지키고, 은혜주고, 가르치는
한자에서 말하는 내용들을
한꺼번에 수행하는 존재가 '보혜사'라는 것!

예수께서 제자들과 그렇게 함께 하셨고!
이제 성령께서 믿는 모든 사람과 함께 하신다.

이는 이후 고난 받는 모든 성도들에게
큰 위로가 되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받은 박해는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뿔뿔이 흩어져서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하고
붙잡히면 부당한 재판을 받아
결국 사자의 밥이 되었는데...

그럼에도 그들은 외롭지 않았다.
'보혜사'가 계셨기 때문이다.
함께 하시면서
보호하시고, 은혜로 채우시고,
가르치시는!
그분 안에서
모든 성도는 기꺼이 고난을 이겨낼수 있었다.

여기서 또 한가지!
'또 다른' 보혜사라 함은!
예수님 역시 보혜사이시며,
예수님과 성령님은 한 분임을 나타낸다.
그래서
18절에서는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보혜사 오심을 '내가 오리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바로 앞에 있는
성부와 성자의 관계에 이어져 있어 흥미롭다.
빌립이 '아버지(하나님)'을 보여달라 했을 때,
예수님은 9절에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예수님과 하나님은 한 분 이라는 것!

이로서!
요한복음 14장은!
그 자체로서
'삼위일체'의 진리를 보여주고 있다.
'또 다른' 보혜사라는 말에
엄청난 신학이 담겨 있었던 것이다.

자!
오늘 우리에게도 '보혜사' 성령님이 계신다.
믿어지시는가?
믿어지는 것!
이것 역시 성령의 하시는 일이다.

26절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그러므로!
힘든 세상을 사는 우리는
오늘도 '성령 충만을 구해야 한다'
주님은 약속하셨다.

누가복음 11:13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오늘도 성령 충만을 구하며 살자!
보혜사의 도우심을 입어
일어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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