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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119:49-64

 

no pain, no gain이라는 서양의 속담이 있습니다.

고생이 없으면 얻는 것도 없다는 말이지요.

인생에서 뭔가를 얻고자 하면 반드시 고생이 따르게 마련이라는 겁니다.

 

이 말을 뒤집어서 생각해볼까요?

여러분이 만일 어떤 모양으로든 고생을 하고 있다면!

거기에서부터 뭔가 얻을 것이 있다는 말일 것입니다.

 

멀리서 찾을 것도 없이...

여러분이 어른이 되는 과정조차도 그렇습니다.

그냥 세월이 가면 어른이 되는게 아니더라구요.

누구나 성장통이라는 걸 겪습니다.

 

-부모님과 관계가 어려워지기도 하고,

-친구관계가 틀어지기도 합니다.

-자기 스스로에 대해서 자괴감을 가지기도 합니다.

-공부에, 진학에, 건강에...

이런 저런 일들로

세상이 무너진 것 같은 좌절에 빠지기도 합니다.

 

이런 어려움들을 견디면서!

어른이 되는 겁니다.

그리고 이런 어려움을 겪어왔기 때문에!

어른들은 웬만한 어려움을 버티고 사는 거죠.

 

 

물론! 고난을 견딘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만일 쉬웠다면 그걸 고난이나 고통이라고 부르지도 않았을 거에요!

 

오늘 말씀은!

그런 고난의 시간을

예수 믿는 우리는 어떻게 이겨내야 하는지를 가르쳐줍니다.

 

바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겨낼 수 있다는 거죠!

 

바로 본문을 볼까요?

49절입니다.

주의 종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소서

주께서 내게 소망을 가지게 하셨나이다!”

 

말씀소망입니다.

소망과 비슷한 단어로 희망이라는 말이 있잖아요?

소망과 희망의 차이점이 있다면!

둘다 기대하고 바라는 것이지만!

희망이뤄질 수도 있고, 이뤄지지 않을 수도 있는불확실한 기대에요.

... 이렇게 되면 좋겠다라는 정도의 바램인 거죠.

반면 소망은요!

바램의 근거가 하나님께 있습니다

반드시 이뤄주실 하나님이 계시다라는 믿음에 기대가 소망입니다.

생각해보면!

희망고문이라는 말은 있지만!

소망고문이라는 말은 없습니다.

 

그래서 로마서5:3,4절은요!

소망이 있는 사람은 환란 중에도 즐거워한다고 말한 겁니다.

본문으로 볼까요?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이게 소망의 힘입니다.

그리고 이 소망의 근원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겁니다.

 

오늘 말씀 50절 볼까요?

이 말씀은 나의 고난 중의 위로라 주의 말씀이 나를 살리셨기 때문이니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미 나를 살리셨고!

그 말씀이 나를 살게도 하실 겁니다.

 

그러니...

인생에 가장 어리석은 일이 있다면 이 말씀을 버리고 떠나는 것입니다.

51절이요!

교만한 자들이 나를 심히 조롱하였어도 나는 주의 법을 떠나지 아니하였나이다

교회믿음이니 말씀이니...

세상 사람들이 조롱할지 몰라도!

나는 이 말씀만을 붙잡겠다는 겁니다.

 

언젠가 베드로가!

예수님께 이렇게 고백한 적이 있습니다.

요한복음6:68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자기는 세상 유행을 따르지 않고

변함없는 말씀만 따르겠다고 고백한 겁니다.

 

이런 고백이 있는 사람은요!

항상 말씀으로자기를 다잡습니다.

52절 볼게요.

여호와여 주의 옛 규례들을 내가 기억하고 스스로 위로하였나이다

이게 무슨 말이에요?

스스로를 격려했다는 말이죠.

괜찮아! 나는 이겨낼거야.’

이런 상황도 넘어설 거야!’

하나님이 약속하셨어!’

전능하신 그분이 나와 함께 계셔!’

 

신약시대로 넘어와볼까요?

사도 바울이 감옥에 갇혔습니다.

온 백성의 여론이 바울을 죽이는 방향으로쏠려 있어요.

바울은 죽음을 피할 수 없어보입니다.

그 때에!

하나님의 사자가 바울에게 나타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도행전23:11절이에요.

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

너에게는 로마에서 복음을 전해야 하는 사명이 있기 때문에!

여기서 죽지 않는다! 담대하라!’

말씀을 듣고나서 바울이 어떻게 했겠어요?

그래, 주님이 죽지 않을 거라 약속했어! 나는 괜찮을거야!”

그렇게 스스로를 격려했을 겁니다.

이 말씀을 붙잡고... 평생을 흔들리지 않고 살아갔습니다.

바울이 죽기 직전에 했던 말이 이거에요!

디모데후서4:7,8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이게 말씀 있는 사람의 큰 특권이에요!

 

말씀을 특권이라 여기는 사람은!

삶이 말씀 중심일 수 밖에 없습니다.

 

54절 보세요!

내가 나그네 된 집에서

주의 율례들이 나의 노래가 되었나이다.”

이 표현이 되게 재미있어요!

보세요.

나그네는 어떤 사람입니까?

집을 떠난 사람또는 집이 없이 다니는 사람이 나그네입니다.

그런데, ‘나그네 된 !에서!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집에 있는데 나그네라는 겁니다.

무슨 말이에요?

집에 있다고 해서 나그네가 아닌 건 아니다!

집에 있어도! 나는 나그네라는 거죠!

우리네 인생이 나그네라는 겁니다.

태어날 때 아무것도 가지고 태어나지 않았고,

죽을 때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합니다.

세상에서 내가 누리는! 집이건 무엇이건...

그건 내꺼인 듯 내꺼 아닌 내꺼같은결국 내것이 아닌 재물일 뿐입니다.

 

이런 세상살이에서!

우리의 소망이 뭐라고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요!

그래서입니다.

나그네 된 집에서

주의 율례들이! , ‘하나님의 말씀들 만이나의 노래라는 겁니다.

 

내 인생을 가치있게 만들어주는 건!

얼마나 벌었냐? 얼마나 가졌냐?’ 이런게 아니라...

오직 말씀대로 살아간 흔적들 뿐인 겁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하죠!

55-57절입니다.

여호와여 내가 밤에 주의 이름을 기억하고 주의 법을 지켰나이다

내 소유는 이것이니 곧 주의 법도들을 지킨 것이니이다

여호와는 나의 분깃이시니 나는 주의 말씀을 지키리라 하였나이다

 

말씀의 사람들은요!

진심으로 이렇게 살아갔습니다.

말씀을 내 소유로 여기고, 그걸 분깃(상속 재산)으로 여기고 살았습니다.

말씀이 재산이다!’

 

말씀을 붙들고 사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는 어려운 상황에서 하나님께 당당하게 요구합니다.

58

내가 전심으로 주께 간구하였사오니 주의 말씀대로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말씀대로 은혜를 베푸소서!’

 

아무나 하는 말이 아니에요!

진정, 말씀으로 살아간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인 겁니다.

 

이런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습니다.

나그네 같은 인생에 감사할 일들이 생겨납니다.

인생의 밑바닥에서부터 그를 끌어 올려주십니다.

 

이런 간증이 있는 사람은요!

자다가도 감사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62

내가 주의 의로운 규례들로 말미암아 밤중에 일어나 주께 감사하리이다

 

, 이런 사람들이 함께 모인곳이 어디에요?

교회에요!

교회에서!

함께 말씀을 나누고!

말씀 안에서 즐거워하고!

말씀으로 서로 격려하고!

끊임없이 말씀을 배우는거죠!

63,64절입니다.

나는 주를 경외하는 모든 자들과 주의 법도들을 지키는 자들의 친구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땅에 충만하였사오니 주의 율례들로 나를 가르치소서

 

하나님이 우리를 주영광교회 중고등부에 불러주시고!

이렇게 말씀을 나누게 하신 건 절대 우연이 아닙니다.

이 말씀과 함께!

인생에 가다올 모든 어려움을 이겨내고 승리하는!

우리 중고등부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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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5:2-6:3

 

gpt한테 ‘k-pop에서 가장 많이 다루는 주제가 뭐냐?’고 물어봤어요.

-gpt가 뭐라도 답했을 것 같애요?

사랑이라고 했어요.

 

사랑이라는 주제가 얼마나 많은지!

이 주제를 구체적으로 쪼개도 각각의 주제들이 다 상위권을 차지한다고 했습니다.

1등은 애틋한 사랑과 설렘이고

2등은 이별의 슬픔과 그리움

3등은 짝사랑과 안타까움

4등은 만남과 재회’...

이런 식으로 이어졌습니다.

신기하죠?

사람들이 사랑에 대해 별로 관심이 없는 듯 보여도!

사랑을 생각하고, ‘사랑을 추구하고 산다는 겁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이 사랑이시거든요!

요한14:8입니다.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사랑이신 하나님이!

태초에 남자를 만드셨어요.

세상에 남자만 있는 모습을 보시고는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창세기2:18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그래서 그 다음에 하신 일이 뭐에요?

아담의 갈비뼈를 토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함께 살게 하셨어요.

그제서야! 하나님은 심히 좋았다고 하셨습니다.

 

남자와 여자가 하나로 묶이는 동인이 뭐겠어요?

사랑인 겁니다.

그러니...

인간은

하나님을 알든 알지 못하든!

사랑을 추구합니다.

노래를 만들어도 사랑이 주제가 됩니다.

 

노래중의 노래가 뭐냐고 묻는다면!

단연 사랑 노래라고 할 겁니다.

 

그래서입니다.

성경에도 노래중의 노래가 있으니!

바로 아가서입니다.

아가라는 말의 한자 뜻이 뛰어난 노래라는 의미고요.

히브리어 원어로는 쉬르 하쉬림이라고 하는데!

이걸 영어로 번역하면 ‘Song of Songs’입니다.

아가라는 말 자체가 노래중의 노래라는 의미에요.

 

그리고 그 주제는 사랑입니다.

 

이스라엘의 왕 솔로몬이

술람미 여인과 어떤 목동의 사랑을 노래한 책이에요.

 

다만!

이 책은 어른들의 사랑이야기입니다.

그래서 부부관계를 암시하는 표현들이 적지 않게 나오고요.

남녀가 서로의 몸에 대해서 신체적으로 아름답다는 표현을 하는데,

이게 다 비유면서도 상당히 직접적입니다.

 

그래서에요.

전통적 이스라엘 사람들은

지금도 30세 이전에는 아가서를 읽지 못하게 한답니다.

19금도 아니고 무려 29금이나 되는 책입니다.^^

 

 

다만!

이 말씀이 성경에 들어간 것은!

단순히 남녀의 사랑’ ‘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요!

이 관계를 통해서 하나님과 교회의 관계를 보여주려는 겁니다.

 

실제로 성경은 하나님과 교회부부의 관계로 종종 설명해요.

에베소서5:31,32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부부의 관계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비추는 거울이라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말씀을 볼께요.

 

남자와 여자가 결혼을 하면요.

이게 처음에는 얼마나 설레고 기대가 있는지 모릅니다.

 

회사에 출근해서도 빨리 집에가서 배우자를 만나고 싶고요.

빨리 주말이 와서 데이트도 하고싶어집니다.

상대편이 일이 많아서 늦게 오면!

상대가 올 때까지 잠들지 못하고 기다리기 일수에요.

 

다만...

그것도

시간이 좀 지나면 그런 감정도 조금식 사그라듭니다.

심할 경우에는 상대편이 늦게 집에 들어와도 그다지 신경안쓰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에는 권태기라는게 찾아오죠.

 

오늘 말씀은

권태기까지는 아닌데요...

약간 상대방에 대해서

살짝 열정이 식은 어느때의 이야기입니다.

 

밤이 늦었습니다.

늦은 시간에

술람미 여인도 피곤하여 잠에 들었을 때입니다.

이게 꿈인지, 꿈이 아닌지 싶은데...

 

늦은시간에 남편이 집 문을 두드리는 겁니다.

2절 보세요!

내가 잘지라도 마음은 깨었는데,

나의 사랑하는 자의 소리가 들리는 구나!

문을 두드려 이르기를 나의 누이 나의 사랑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야

문을 열어다오

내 머리에는 이슬이, 내 머리털에는 밤 이슬이 가득하였다 하는구나

 

중동은 낮과 밤의 기온차가 크거든요!

그래서 밖에서 밤 늦은시간까지 활동하다보면!

밤 이슬이 머리에 맺힌다고 합니다.

그리 될 정도로까지 열심히 일하고 집에 와서 문을 두드립니다.

지금이야...

번호키를 누르거나 하면 되겠지만!

그 옛 시대에 그런게 어디있겠어요? 안에서 열어줘야만 들어갈 수 있는 거죠!

 

그런데 이게 웬 일입니까!

이전같으면 아무리 늦어도

남편이 문을 두드리면 뛰어나갔을 아내인데!

지금은 몸이 너무 무거웠어요.

3

내가 옷을 벗었으니 어찌 다시 입겠으며

내가 발을 씻었으니 어찌 다시 더럽히랴마는

꿈결에 잠결에 못일어나고 있습니다.

 

한참을 정신 못차리다가

나중에서야 일어나서 문을 열러 갔습니다.

그런데...

6!

내가 내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문을 열었으나

그는 벌써 물러갔네

 

남편이 없습니다.

문을 두드리다 지쳐서 어디론가 간 것 같습니다.

그제서야 후회가 밀려옵니다.

6절 후반절이요.

“...그가 말할 때에 내 혼이 나갔구나(내정신이 아니었구나...라는 후회의 표현)

내가 그를 찾아도 못 만났고 불러도 응답이 없었노라

아무리 찾아도 남편이 보이지 않아요.

 

성읍 이곳 저곳을 뛰어다니다가...

문득 남편을 생각합니다.

9절 보세요.

여자들 가운데 어여쁜 자야

너의 사랑하는 자가 남의 사랑하는 자보다 나은 것이 무엇인가!

너의 사랑하는 자가 남의 사랑하는 자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기에

이같이 우리에게 부탁하는가?”

머릿속에 든 질문이었겠지요.

 

우리 남편?’

10절에서 15절입니다.

내 사랑하는 자는 피부가 하얗고요.

곱슬거리는 머리는 진한 흑발이고요.

눈동자는 비둘기처럼 맑고요.

뺨도 보드랍고, 붉은 입술은 백합화처럼 매혹적입니다.

몸은 상아에 청옥을 입힌든 단단하고, 다리는 백향목 나무처럼 튼튼하고요,

그의 입은 항상 나에게 달콤한 말을 해 줍니다...

이게 내 사랑하는 남편이에요.”

낮뜨거운 말들을 하는데...

신기한 건요!

말을 하면 할수록

내가 얼마나 남편을 사랑했는지, 애절함이 더 커져 갔던 겁니다.

 

그리고 6장으로 넘어가면요!

2

아내가 드디어 남편을 찾아냈습니다.

남편은 동산으로 돌아가서 그곳에서 양떼를 먹이고 있었습니다.

그는 백합화를 꺾고 있습니다.

문도 열어주지 않았던 아내를 위한 꽃다발을 만들고 있었던 거죠.

 

! 얼마나 사랑스러운 사람인가

3절에서 이 고백이 나오는 겁니다.

나는 내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고 내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으며

그가 백합화 가운데에서 그 양 떼를 먹이는도다

 

아내는 잠시 남편에게 소흘했고,

그로인해서 오랜 시간 남편을 찾아다녀야 했습니다.

남편을 찾으면서

그의 남편이 얼마나 소중한 사람이었는지를 깨달았습니다.

 

앞에서...

아가서의 부부 관계는

그리스도 예수님과 교회의 관계를 비추는 거울이라고 했잖아요?

 

요한계시록 320절에 보면요!

예수님은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이런 경고를 하십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교회이니까!

당연히 예수님이 이 교회 안에 계실거라 생각했었는데!

예수님은 교회 문 밖에 서 계십니다.

교회 안에 들어오지 못하시고 문을 두드리십니다.

이 문은요!

안에서 열어야만 열리는 문입니다.

예수님께 반응을 해야 주님이 교회 안으로 들어오실 수 있습니다.

교회 건물의 문을 두드리시는 게 아니에요!

우리 각 사람의 마음 문을 주님은 그렇게 두드리십니다.

 

교회인 우리는 주님을 찾아야 됩니다.

주님이 내게 어떤 분인지 고백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약속하셨습니다.

예레미야29:12,13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찾고, 기도로 주님을 만나고,

그 사랑을 회복하여, 주님과 떨어지지 않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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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는 솔로몬이 쓴 노래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 점이 참 신비롭습니다.

아내를 천 명이나 거느렸던 그가,

한 남자와 한 여자의 지고지순한 사랑을

그토록 아름답게 노래했다니 말이죠.

 

후궁 1000명을 곁에 두고 있으면서도,

그의 마음 깊은 곳에서는

결국 단 한 사람과의 진실한 사랑을

꿈꾸고 있었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으신가요?

 

어쩌면 그것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 본성에

가장 어울리는 사랑의 모습일지도 모릅니다.

 

결국,

수많은 관계 속에서도

인간은 하나의 진실된 사랑

갈망하는 존재라는 것을

아가는 은밀하게 속삭이는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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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 5:2-6:3

"내 사랑하는 자의 소리가 들리는구나.
문을 두드려 이르기를
내 누이, 내 사랑, 내 비둘기, 내 완전한 자야
문을 열어다오.
내 머리에는 이슬이, 내 머리털에는 밤이슬이
가득하다 하는구나." (아가 5:2)

사랑하는 연인의 애타는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밤늦도록, 이슬에 젖으면서까지
문을 두드리는 간절함이 느껴지시나요?
하지만 여인은 이미 깊은 잠에 빠져
쉽게 문을 열어주지 못합니다.
"내가 옷을 벗었으니 어찌 다시 입으랴.
내가 발을 씻었으니 어찌 다시 더럽히랴." (아가 5:3) 안일함과 게으름이 사랑하는 이의 간절한 외침을
외면하게 만듭니다.

결국, 연인은 기다리다 지쳐 떠나고,
그제야 여인은 후회하며 그를 찾아 나섭니다.
문을 열었을 때 이미 그는 사라지고 난 후였습니다.
"내가 문을 열었으나
나의 사랑하는 이가 이미 갔음이로다.
그가 말할 때에 내 혼이 나갔구나.
내가 그를 찾았으나 만나지 못하였고
불렀으나 응답이 없었노라." (아가 5:6)
사랑하는 이를 놓친 여인의 애끓는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집니다.
얼마나 후회스러웠을까요?
조금만 더 귀 기울였다면, 조금만 더 서둘렀다면
이토록 애타는 시간을 보내지 않았을 텐데 말입니다.

이 장면을 묵상하며
문득 예수님의 어린 시절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열두 살 되던 해,
부모님을 따라 예루살렘에 올라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예수님을 잃어버리셨던 사건 말입니다. 하루 동안이나 예수님이 없는 것을 모르고
길을 나섰던 부모님은 뒤늦게야 그 사실을 알고
얼마나 놀라셨을까요?
성경은 그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예수를 찾기까지
사흘이나 걸렸다 합니다(누가복음 2:46).
단 하루의 부주의로 사랑하는 아들을 잃어버렸고,
그를 다시 찾기 위해서는 며칠이라는
간절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서도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할 때가 많습니다. 너무나 소중한 것을
순간의 방심이나 게으름으로 놓쳐버리고
뒤늦게 후회하는 것이지요.
그것이 관계일 수도 있고,
기회일 수도 있으며,
때로는 우리 안에 계신 주님의 은혜일 수도 있습니다.

아가서의 여인처럼, 예수님의 부모님처럼,
놓치는 것은 한순간이지만
되찾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때로는 영영 되찾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무엇보다.
우리 주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의 마음 문을 두드리시며 말씀하십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요한계시록 3:20)
우리의 신랑 되신 예수님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다가오시며,
우리와의 친밀한 교제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순간의 안일함과 무관심으로
그분의 부르심을 놓치지 않도록 깨어 있어야 합니다.

지금, 우리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
주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고,
그 사랑에 즉각적으로 응답하는
우리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놓친 후에 후회하는 어리석음을
되풀이하지 않도록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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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24:1-12

 

오늘은 부활주일입니다.

부활주일은 말 그대로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주일이에요.

 

성탄절’ ‘추수감사절’ ‘맥추절같은 절기들 중에서도...

기독교의 가장 큰 절기가 부활절입니다.

 

부활은 주님이 죽음을 이기신 사건이고!

주님과 함께 우리가 죽음을 이긴 사건입니다.

 

바로 그 상징으로!

부활절에는, 모든 교회가 성찬식을 거행합니다.

 

지난주에 성찬식의 의미를 알려드렸죠?

예수님의 살과 피에 동참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이

결국 나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신앙고백인 겁니다.

 

다만요...

저는 개인적으로

이렇게 부활절이라는 절기를 따로 지키는 것에 대해서

크게 긍정적이지만은 않습니다.

 

부활을 기념하는 가장 강력한 날은 따로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게 어떤 날일까요?

보통은 일요일이라고도 하는 주일입니다.

 

생각해보세요!

원래 구약시대에 안식일토요일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토요일안식일로서 목숨처럼 여기고 지켜왔습니다.

 

현대의 종교단체 중에도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키는 이단이 있습니다.

물론 토요일을 지켜서이단은 아니고요,

다른 이단성이 있는데 토요일을 그들의 안식일로 지키는 거.

 

그런데

그분들하고 이야기하면!

꼭 안식일을 가지고 공격합니다.

성경에서는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키라고 했는데

왜 당신네는 일요일을 안식일로 지키느냐?

일요일은 로마가 지키던 태양신의 날인데

그 날을 지키는 건 잘못된 거다!’라고 하거든요.

 

그러나!

마태, 마가, 누가, 요한 복음을 보면!

네 개의 복음서가 공히

예수 부활의 날을

안식후 첫날그러니까 토요일 다음 날일요일’, ‘주일이라고 강조합니다.

 

성경본문으로 볼까요?

마태복음 28:1

안식일이 다 지나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갔더니

마가복음 16:2

안식 후 첫날 매우 일찍이 해 돋을 때에 그 무덤으로 가며

누가복음 24:1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이 여자들이 그 준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가서

요한복음 20:1

안식 후 첫날 일찍이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진 것을 보고

 

네 개의 본문이 안식 후 첫날을 강조하는 건!

이 날이 새로운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는 의미인 겁니다.

그 의미의 핵심은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실제로!

초대교회는 일요일을 교회 회집의 날로 지키게 됩니다.

사도행전20:7절 볼까요?

그 주간의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그들에게 강론할새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

 

여기서 그 주간의 첫날이 언제입니까?

안식일이 창조의 마지막 날이고, 토요일이니까요!

그 주간의 첫날은 일요일이 되는 겁니다.

그 날에 초대교회가 모였습니다?

뭘 하려고요?

떡을 떼려고.

여기서 떡을 뗀다는 말은 성찬식을 한다는 말입니다.

 

성찬식을 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무엇보다 부활을 기념한다는 의미지요!

 

바로 이런 의미들을 근거로 해서!

초대교회로부터

역사상의 교회들은!

일요일주일로 지키면서!

이 날에 부활을 기념해왔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앞서 말씀 드렸던 것 처럼!

매주 주일이 부활을 기념하는 날이라고 말씀드렸던 겁니다.

 

...

그렇다고 부활절 지키는게 나쁘다는 말은 아니에요.^^

어떤 의미에서는 부활절이라도 있어야

부활에 대해서 좀 더 특별히 생각하는 면도 있습니다.^^

 

 

부활 절기에 대한 이야기는 이정도로 하고요.

오늘 하고 싶은 이야기는!

부활의 첫 증인인 여성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누가복음도 그렇고요.

예수님에 대해 기록한

네 개의 복음서가!

부활하신 예수님의 첫 번째 증인이 여성이었다고 강조합니다.

 

오늘 말씀 누가복음부터 볼까요?

누가복음 24:1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이 여자들이 그 준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가서

마태복음 28:1

안식일이 다 지나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여성들이) 무덤을 보려고 갔더니

마가복음 16:1,2

안식일이 지나매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가서 예수께 바르기 위하여 향품을 사다 두었다가

안식 후 첫날 매우 일찍이 해 돋을 때에 그 무덤으로 가며

요한복음 20:1

안식 후 첫날 일찍이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진 것을 보고

 

이 여성분들이 어쩌다가 부활의 첫 증인이 된 건가...

 

예수님이 십자가 지신 날이

안식일 전날 금요일이었습니다.

그 날 새벽까지!

예수님이 죽게 되실 거라고는

어느 누구도 생각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날 아침에! 예수님의 사형이 선고되고요!

금요일 아침 9시 경에!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셨고!

그 때로부터 약 6시간이 지나서 오후 3시에 숨을 거두셨습니다.

 

당시 사람들에게 하루의 시작은 해가 지면서부터였습니다.

왜 창세기에 보면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날이라라고 하거든요.

오늘날에야 정확한 시간 개념이 있으니

12시가 되면 날이 넘어간다 하지만, 고대사회는 안그랬거든요.

오후 6시쯤이 되면 벌써 다음날이 되는거에요.

 

예수께서 오후 3시에 돌아가시고 나서!

3시간 정도 후에 해가 지면!

안식일인 토요일이 됩니다.

그러면 유대인들은 모든 일을 멈춰야 됩니다. 안식일이니까요!

 

그러니 유대인들로서는 일정이 급했어요.

돌아가신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내려서!

아리마대 요셉이라는 사람이 자기를 위해서 만든 무덤에

예수님을 장사했습니다.

 

고대사회에서는 죽은 사람의 몸에 향료를 발랐는데!

예수님을 따랐던 여성들이 급히 향료를 구했던 것 같애요.

그런데 시간이 너무 없었던 겁니다.

그저 향료만 구해놓고!

안식일을 보내고서!

안식 후 첫 날 새벽에

예수님의 시신에 향료를 바르려 무덤에 왔던 거죠.

 

그런데!

무덤을 지키고 있어야 할 로마 군인이 없습니다.

이건 뭐지? 싶었는데!

동굴을 막고 있던 거대한 돌이 옆으로 굴려 있는 겁니다.

마가복음16:3,4절 볼까요?

서로 말하되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 주리요 하더니

눈을 들어본즉 벌써 돌이 굴려져 있는데 그 돌이 심히 크더라

 

이건 또 뭐지?’

무덤에 들어가보았는데!

무덤 안에 시체가 없어요.

 

그리고 그곳에서!

오늘 말씀 4!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천사들을 만나고!

천사의 선언을 듣게됩니다.

5,6절이에요.

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니 두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기억하라

예수께서 이전에 계속 말씀하셨던 대로! 다시 사셨다 한 겁니다.

 

이 말을 듣자 마자!

여자들이 사도들에게 뛰어가서

이 소식을 전하거든요.

여보세요 여보세요!

우리가 무덤에 갔는데

예수님의 시신을 보지 못했고, 천사들이 나타나서 예수님이 사셨다고 했습니다!”

 

그랬는데...

사도들이 그들의 말을 어떻게 대했는지 아세요?

오 정말입니까?’

할렐루야!’

그러지 않았습니다.

11절 보세요.

사도들은 그들의 말이 허탄한 듯이 들려 믿지 아니하나

 

사도들은 여자들의 말을 믿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허탄하게 들렸다고 했어요.

 

그도 그럴 것이!

고대사회에서는 여자들의 증언을 신빙성있게 받지 않았어요.

여자와 어린 아이를 사람 수에도 치지 않았던 시절이거든요.

여자들이 하는 말을 어떻게 믿어?’

이런 생각이 있었던 겁니다.

예수님의 제자였던 사도들이 이렇게 반응했다면!

사복음서를 처음 접했던 고대의 사람들은 어땠겠어요?

어떻게 여자들의 증언을 성경에 기록해놨지?”

 

어떤 의미에서!

실제 여자들의 증언이 사실이었더라도!

당시의 사람들을 믿게 하기 위해서는!

여자들의 증언 이야기는 빼는 것이! 더 효과적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여성 증인들의 내용을 사복음서가 공히 적은 것은!

역설적으로

그녀들의 이야기가 있는 그대로의 사실임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물론!

누가 증거 했다고 해서 부활이 사실이고 아니고가 결정되는 건아니에요!

부활은 사실이고!

우리는 그 사실을 믿음으로 구원 받았습니다.

 

다만!

하나님은 당시에 소외받던 소수의 여성들을!

부활의 첫 번째 증인으로 세우셨습니다.

 

해마다 부활절이면요.

한국교회 교단들은 몇 만명, 몇십만명이 모여서부활절 연합예배로

세를 과시합니다.

그것도 나름의 의미가 있겠지요.

하지만... 주님 보시기에는....

첫 번째 부활절 아침처럼...

소수의 몇몇명이라 할지라도...

매 주일 주님의 부활을 기억하며 예배하는!

우리의 작은 모임이 더 귀해 보일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부활의 첫 열매이신 예수님과 함께!

영원이라는 시간에 잇대어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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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22:54-71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예수님을 세번 부인했던 베드로 이야기는
네 개의 복음서(마,막,눅,요)에서
공히 다룰 정도로
성경이 주목하는 장면입니다.

즉, 이 사건은
베드로 개인만의 경험이 아니라
모든 믿는 자들에게 주는
메시지, 혹은 경계라는 생각입니다.

성찬식 때
예수께서 '모든 사람이 나를 버릴 것'을
말씀하셨을 때,
모든 제자들은 한결같이
'자신은 아닐 거라' 장담했습니다.
특히 베드로는
'모든 사람이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주를 버리지 않을 거라'
강하게 주장했죠.

그러나,
주장이 강했던 만큼
꺾이는 것도 순식같이었습니다.

심지어
'이 사람은 예수와 함께 있었다'는
작은 소녀의 말에도
그는 두려워 떨었습니다.

사람들의 의심을 떨치고자
그자리에서 사람들이 시키지도 않은
예수 저주를 스스로 하다가
심문으로 받고 나오시는 예수님과
눈이 마주치기까지 했죠.

인간은 연약한 존재입니다.
누구도 자신에 대해서 확증할 수 없습니다.
저는 20년 이상 오랜시간 목사로 재직하면서
정말 많은 사람들이 변질 되는 걸
목격해왔습니다.

청렴과 정의를 항상 말씀하셨던 목사님이
연세가 들어가면 어느순간
아무렇지도 않게
돈 돈 거리는 모습을 봤습니다.

예수님을 위해서 살겠다며
선교사까지 생각했던 청년이
어느덧 교회까지 등지는 경우도 있지요.

우리는 우리의 연약함을 인정해야 합니다.
3년동안
예수님의 기적을 자기 두눈으로 목도하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직접 받은
베드로가 이렇게 무너졌다면,
우리는 얼마나 더 약한 존재들인가요?

이런 우리의 연약함을 인하여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셨던 겁니다.

우리가 우리의 믿음을 지키는게 아닙니다.
우리가 스스로 하나님을 위해 살지 못합니다.
주님의 은혜가
우리를 믿음의 사람으로 세우시는 겁니다.

[고전15:10]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사람들은
이 마음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주님 은혜가 아니면
우리는 하루도 살 수 없는 존재임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고난주간,
무너진 베드로를 보며
우리가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
다시 한 번 되새기고
다시 한 번
그분의 은혜를 간구하는
귀한 시간으로 삼읍시다.

은혜아니면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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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22:39-53

 

십자가를 앞두고

예수님은 감람산에서 기도하셨습니다.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기까지 기도하셨습니다.

 

그분의 기도제목은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였습니다.

 

참사람이셨기에 

예수님은 두려움에 사로잡히셨습니다.

십자가의 고통이란 건 

상상을 초월한 고통일 터입니다.

창에 찔리고 못박히는 고통도 크겠지만

'엘리엘리 라마사박다니'

하나님께 버림 받게 된다는

삼위일체이신 주님께 결코 있을 수 없는

'영적 단절'이 더할 수 없는 

두려움이셨을 터입니다. 

 

인류 역사의 분기점을 앞두고

예수님은 처절하게 기도하셨습니다. 

기도로서

예수님은 마음속의 두려움과 싸우셨고

아버지의 뜻에 자신의 의지를 굳게 하셨습니다.

 

기도 없는 우리네 삶을 돌아봅니다.

우리의 모습은 감람산에 잠들어 있는 

제자들과 그리 다르지 않습니다. 

그들의 머릿속에는 

예수님이 왕 되셨을 때 높은 자리에 오를 꿈 뿐입니다.

긴장도 두려움도 염려도 없습니다.

예수께서 저토록 간절히 기도하시는 모습 조차도

그들을 자극하지 못했습니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경고하신대로

그들 모두는 시험에 들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도 

기도하셨습니다. 

우리가 기도해야 할 이유는

이것 하나만으로도 충분하고도 남습니다.

 

이번 고난 주간은

멈춰 있던 기도를 회복하는

시간으로 삼읍시다.

 

시험에 들지 않게 

헛된 생각에 매이지 않게

하나님의 뜻에 나의 의지를 고정하도록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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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22:1-23

 

다음주일이 부활주일이고 성찬식도 있어서...

오늘은 성찬식에 대해서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성찬식이란 교회에서 예배시간에

모든 교인들이 떡과 포도주를 함께 먹고 마시는 예식입니다.

여기서 은 예수님의 찢기신 살을 상징하는 거고,

포도주는 예수님의 흘리신 피를 상징합니다.

 

이 성찬식에는

세례입교를 받은 사람만이 참석할 수 있습니다.

세례는 물로 죄를 씻는 상징인데요.

주로 목사님이 물을 머리에 얹거나,

침례교에서는 아예 물에 들어갔다가 나오기도 합니다.

세례는

이 사람이 죄사함을 받고 구원 받았다는 교회의 공적 선언입니다.

 

여기서 생각해볼게 있습니다.

하나님이 누군가를 구원하셨다면!

그 구원은 취소가 될까요? 안될까요?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구원했다가, 취소했다가, 또 구원 했다가...

이렇게 하실까요?

하나님은 실수하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그래서에요!

세례는

인생에 단 한 번만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 차원에서요...

여러분은 어린 아기 때 유아세례를 받았죠?

태어나서 2년 이내에 베푸는 세례를 유아세례라고 합니다.

어린 아이가 아직 복음에 대해서도 모르는데 왜 세례를 주는가 하면요.

이 아이도 믿음의 가정에서 태어난 아이이고,

이 아이를 믿음으로 키우겠다는 언약적 차원에서 세례를 주는 겁니다.

 

다만!

구원은!

부모의 믿음이 아니라 결국 자신의 믿음으로 받는거잖아요?

그래서 그 아이의 믿음을!

교회가 한 번 더 확증해주는 과정이 필요해요.

그런데!

이 아이는 이미 아기 때 세례를 받았거든요!

세례는 평생 한 번만 받는다고 했잖아요?

그래서입니다.

세례를 받은 아이는

15세 생일이 지나고 나면!

입교를 하게 됩니다.

모든 교인들 앞에서 신앙 고백을 하고!

교회의 공식적인 일원으로 받는 겁니다.

 

말하자면 일종의 성인식입니다.

실제로도 그런게!

세례나 입교를 받은 사람은!

그 때부터 교회에서 투표권을 가질 수 있습니다.

담임목사님 청빙투표같은 것 있잖아요?

그 투표자의 자격이 세례, 입교인입니다.

 

무엇보다!

세례, 입교를 받은 사람은!

성찬식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세례나 입교를 해야만 성찬식에 참여할 수 있다는 거죠.

 

여러분 성찬식 정말 중요한 예식입니다.

세례 성찬은 예수님이 직접 지정하신 두가지 예식이에요.

오늘 17-19절 말씀을 볼까요?

이에 잔을 받으사(포도주) 감사 기도 하시고 이르시되

이것을 갖다가 너희끼리 나누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이제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까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떡을 가져 감사 기도 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이게 역사상 최초의 성찬식 선언문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이 성찬을 지정하셨고!

예수님의 제자인 사도들은

이 성찬을 주님 다시 오시는 재림의 날 까지지키도록 가르쳤습니다.

고린도전서11:26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이후에 교회가

이 성찬식을 얼마나 소중히 여겼는지 보면요!

교회 권징의 거의 최종 보루로 둘 정도입니다.

 

나라에 법이 있는 것처럼

교회에도 교회 헌법이 있거든요.

그 법에!

교회에서 죄 지은 사람은 이렇게 벌을 주라 하는 권징의 순서가 있어요.

 

잘 들어보세요.

다 한자어여서 한자를 알면 어떤 벌인지 알 수 있어요.

 

첫 단계는 권계에요.

권면하고 훈계한다는 말입니다.

좋은 말로... ‘그러지 마세요... 그러면 안됩니다...’라고 훈계하는 게 권계에요.

 

그런데도 말을 안듣는다?

두 번째 단계는 견책입니다.

여기서 책망할 때’ ‘이에요.

그러니까 여기서는 좋은 말이 아니라 혼을 내라는 거죠.

단호하게 그러면 안됩니다! 정신차리세요!’라고 정신이 번쩍 들도록 혼내는 겁니다.

 

그래도 회개를 안한다?

세 번째 단계 정직입니다.

직분을 정지한다는 겁니다.

직분이 있는 사람은 그 직분의 일을 행하지 못하게 하는 거에요.

대표기도를 못하게 한다거나, 교회 봉사를 못하게 하는 거죠.

 

... 그런데도 회개를 안한다?

네 번째 단계는 면직입니다.

직분을 박탈하는거에요.

집사, 장로, 목사라고 하는 직분을 떼버리는 겁니다.

일반평신도가 되는거죠.

 

여기까지 했는데도 잘못을 인정안해요?

그러면 드디어!

수찬정지를 합니다.

성찬식에 참여하지 못하게 하는 겁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에 참여하지 못하게 하는 거에요.

 

그렇게 수찬정지를 해도 회개 안한다?

최종적으로 출교를 합니다.

교회에서 쫓아내는 겁니다.

 

수찬정지 다음 단계가 출교지만,

수찬정지는 예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는 영적인 사망 선고이고요.

출교는 이미 영적으로 죽은 자를 떼 낸다는 점에서!

사실상 수찬정지가 가장 강력한 징계가 되는 겁니다.

 

실제로 중세시대에는

왕조차도! 교황이 수찬정지령을 내리면 두려워 떨었습니다.

수찬정지는 영적인 죽음이라고 생각했던 겁니다.

 

그러면!

성찬식이 도대체 어떤 의미길래!

교회가 이렇게까지 소중히여기는 걸까요?

 

우선은 기념입니다.

이건 예수님도 하신 말씀이죠!

19절이요.

또 떡을 가져 감사 기도 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생각해보면요!

예수께서 최후의 만찬을 하신 이 날이 유월절만찬입니다.

유월절이 어떤 날이에요?

먼 옛날, 이스라엘이 애굽의 노예였을 때!

모세를 통해 애굽에 열가지 재앙을 내리고!

이스라엘이 자유를 얻게 되는데!

마지막 열 번째 재앙이 애굽 땅에 있는 장자들이 다 죽는 재앙이었지요.

이 재앙을 피하기 위해서는!

문설주에 어린양의 피를 발라아 했는데!

양의 피를 바른 집은, 죽음의 천사가 넘어갔다 해서!

넘을 유, 넘을 월자를 써서 유월절이라 합니다.

 

!

유월절의 밤이 지나면

쫓겨나듯이 애굽에서 나오게 될 겁니다.

그래서에요!

모세는 내일이면 당장 우리가 출애굽할거고!

그러면 먹을 것이 없을테니까!

너희는 무교병을 구워서 준비하라 한 겁니다.

원래 빵을 만들려면 빵을 부풀리는 이스트(누룩)를 넣어야 되는데!

그러면 시간이 많이 걸리니까

급히 만들기 위해서!

이스트 없이 빵을 구우라 했던 겁니다.

그게 무교병이에요!(없을 무, 누룩 효, 절기 절)

 

무교병을 구워 먹었던 때를 기념해서!

후대의 이스라엘은 매년 유월절을 기억해서 무교병을 먹었습니다.

 

그리고!

그 유월절 무교병 먹는그 때에!

예수님은 새롭게 구원을 기념하는 성찬식을 지정하셨습니다.

그 날 밤이 지나면!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예수님의 피로 인해!

죽음지옥

예수 믿는 사람을 넘어가게 될 것입니다.

 

성찬식은!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면서!

2000년 전 죽음과 지옥이 넘어간 사건을 기억하는 예식입니다.

 

다만!

성찬식은 기념으로만 끝나지 않아요.

 

예수님은!

이 떡을 내 몸이라 하셨고,

포도주를 내 피라 하셨습니다.

 

가톨릭 교회에서는 떡과 포도주가 실제로 예수님의 살과 피로 변한다

가르칩니다만, 그건 아니고요.

 

우리가 떡과 포도주를 마실 때마다!

우리는 단순한 음식을 먹는게 아니고요!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래서 성찬식 때 보면...

떡과 잔을 먹으면서 감정에 북받치고, 은혜 받는경험을 종종하게 됩니다.

 

성찬식은!

주님을 경험하는 특별한 예식입니다.

 

여러분이 속히 입교공부를 하고

하루라도 더 빨리 입교를 받으시기를 바라고요!

교회의 일원으로서 성찬식이라는 특별한 예식에 참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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