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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6:6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리시리라"

 

'골방기도'라고 하면!

참 낭만적으로 느껴집니다. 

뭔가 하나님과 나만의 은밀한

장소인듯 하잖아요.

 

하지만...

막상 '골방기도를 하시나요?'라고

물어보면!

많은 분들이 유구무언입니다. 

집에 있다고 해서

가족들이 있는데

'나 기도한다 문열지 마라'

하고 방에 들어가 버린다면

가족들에게 실례이기도 하거든요.

 

무엇보다 집에 있다고 해서

현대인들이 기도시간 챙길만큼

여유롭지도 않잖아요.

퇴근해서 집에 가면

씻고 밥먹고 설거지하고

이런 저런걸 하다 보면 금새 잘 시간입니다.

아침시간도 마찬가지고요. 

일어나 눈 뜨면 출근하기 바쁘죠.

 

그렇게 놓고 보면 

골방기도라는 것도

로망일 뿐이지 

현실성은 많이 떨어지는 주제이긴 합니다. 

 

그런데말입니다. 

이건 예수님 시대의 사람들도 

그리 다르지 않았습니다. 

고고학자들에 따르면!

예수님 당시에 일반인들은 

보통 방 한칸짜리 집에 살았다고 합니다.

지금 처럼 안방, 작은방, 옷방...

이렇게 분류되어있지 않았다는 거에요.

거기에

식구는 좀 많아요?

자녀가 기본 다섯명씩은 있었을 거란 말이죠.

그 아이들이 점잖게 있을리가 만무합니다.

그 많은 식구들 밥하고 빨래하고...

온갖 일을 하다보면!

'골방기도요?'

사치도 이런 사치가 없을 겁니다. 

 

예수께서 이런 현실을 모르실리가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입니다.

모든 성경 학자들은!

이 말씀을 

'공간적인 의미'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1500년대 종교개혁자 칼빈도

마찬가지였어요.

이 말씀은 '단절된 공간'을 강조하는게 아니라

했습니다. 

 

이 구절 바로 앞에서!

이런 전제를 말씀하셨어요.

마태복음6:5

"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기도를 경계하면서!

'골방기도'를 말씀하신 겁니다. 

 

주님께서 염두하신 것은!

사람을 의식하면서 하는 모든 기도였습니다.

사람이 많아도 상관 없습니다. 

금요기도회처럼!

수많은 사람들이 모인 자리도 괜찮습니다.

 

마치 골방에 있는 것 처럼!

기도할 때는

'오로지 하나님께만 주목하라'는 요구입니다.

 

사람을 의식하게 되면요!

우리 기도가 흔들립니다.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들리게 하려고

큰소리로 기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제가 그랬습니다. 

한참 기도원에 다녔을 때!

저는 그 장소에 있는 누구보다 크게 

기도하려고 그야말로 악을 써댔습니다.

그리고 제가 가장 큰소리를 냈을 때!

뭔가 희열을 느꼈습니다. 

"이겼다!" 이런 마음이랄까요?

나 혼자 영광받아 버린 겁니다. 

 

또 어떤 분은 

큰소리로

다른 교인의 잘못을 지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나님! ~~집사님 돈값게 해주세요!"

"하나님 ~~ 궘사님 회개하게 해주세요!"

이러면서 누군가의 잘못을

남들 들으라고 크게 말합니다. 

그거... 하나님이 안들으십니다.

주변 사람들만 듣고요.

자기 평판만 안좋아집니다. 

 

정 반대로 사람 신경쓰는 분이 계세요.

내가 기도 크게 하면 누가 들을 까봐

중얼중얼거리면서 기도하시는 거에요.

중얼거리면서 기도하면 기도가 잘되나?

그런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오히려 

'내게 부르짖으라'고

숱하게 말씀하셨습니다. 

 

크게하냐 작게하냐의 문제라기보다는!

어떤 기도의 장소에서든지!

오직 하나님께만 집중하라는 겁니다.

 

그분이 누구세요?

'아버지'입니다.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제 아이가 지금 가지고 싶은 장난감이 있습니다.

가격이 꽤 나갑니다. 

'이정도나 되는 걸 어떻게 사주나' 생각하는데

아이가 제게 매달려서 계속 구하는 거에요.

"아빠~ 사주세요~

네? 아빠~ 사주세요~"

끝도 없이 이야기합니다. 

 

아... 비싼데...

이거 부담이 큰데...

싶은데...

자꾸 이야기하면 넘어갈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이는요

아빠라면 사줄수 있을 거라고 믿고

매달리는 거거든요.

저는 재정에 따라 안될지 모르겠지만!

세상의 주인이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는 약속하시는 겁니다.

 

뭐라고요?

'갚으시리라'

특이한 표현을 쓰셨어요!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기도했다고해서

그게 하나님 입장에서 

'갚을 일'까지 될까요?

 

돈이건 물건이든 

빌리면 갚는 것이 인지상정이잖아요?

 

하나님은

우리 기도를 그렇게 대하시겠다는 겁니다.

 

우리가 우리의 것을 구했을 뿐인데!

마치 빌린 것을 갚는 것 처럼!

우리의 기도에 응답해주시겠다는 거에요.

 

여러분!

이게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에요!

 

지금,

기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으십니까?

지금까지 기도하지 않아서 

엄청 손해봤다는 생각이 들지 않으세요?

우리 기도합시다. 

갚으신다 하잖아요!

아빠만 빤히 쳐다보면서

"아빠? 사주세요~"라고 매달리는 아이처럼!

우리 하나님께 매달립시다. 

 

이 자리가

여러분의 골방이 되시기를 바라고요!

이곳에서 약속된 응답을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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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이것만으로도 당혹스러운데!

하나님은 두번째 집에갈 부류를 말씀하십니다.

6절

"포도원을 만들고 그 과실을 먹지 못한 자가 있느냐?

그는 집으로 돌아갈지니 

전사하면 타인이 그 과실을 먹을까 하노라"

 

이것도 당혹스러은 일입니다.

표면적으로 보자면

수확한 포도 과실이야 

금방 집에서 가서 먹고 오면 될 일이잖아요?

그런거면 이런 조건에 나오지도 않았겠죠.

 

레위기19:23-25절을 보면

이 말씀의 진위를 알 수가 있습니다. 

먼저 23절

"너희가 그 땅에 들어가 각종 과목을 심거든

그 열매는 아직 할례 받지 못한 

'삼년 동안' 

너희는 그것을 할례 받지 못한 것으로 여겨

먹지 말 것이요!"

일단 3년간은 열린 포도는

그냥 바닥에 버려야 합니다. 

 

거기서 끝이 아니에요!

24절

"넷째 해에는 그 모든 과실이 거룩하니!

(이제 먹을 수 있겠나? 아니죠!)

여호와께 드려 찬송할 것이며"

4년 차 과실은 온전히 하나님께 드리라 합니다.

 

그리고 25절

"다섯째 해에는!

그 열매를 먹을지니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 소산이 풍성하리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여러분!

농사를 시작하고!

무려 5년이 지나서야!

그 과실을 먹을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농사 시작하고 5년이 아직 안됐냐?'

'전쟁터를 떠나서 집에 가라'는 거죠!

5년이나 되는데!

그 기간에 걸칠 사람들은 또 

얼마나 많을까요?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세번째 집에 갈 부류!

7절

"여자와 약혼하고

그와 결혼하지 못한 자가 있느냐?

그는 집에 돌아갈지니 

전사하면 타인이 그를 데려갈까 하노라 하고"

'약혼 한 사람도' 집에 가랍니다.

 

여러분...

약혼... 아직 결혼이 아니잖아요.

결혼이 얼마 남았든지

일단 약혼을 했으면 들어가라는 거죠.

군대 안가려고 마음 먹으면요!

여자 친구랑 계속 약혼 관계만

유지하면 되는 겁니다. 

이렇게 허술한 법이 어디 있겠어요?

게다가!

결혼 하잖아요?

결혼 한 사람에게도 혜택이 있습니다.

신명기24:5

"사람이 새로이 아내를 맞이하였으면 

그를 '군대로 내보내지 말것이요'

아무 직무도 그에게 맡기지 말 것이며

그는 '일 년 동안' 한가하게 집에 있으면서

그가 맞이한 아내를 즐겁게 할지니라"

결혼 한 사람은 또 1년 면제입니다.

 

와... 여기까지만 해도 

사람이 눈에 띄게 줄었을 겁니다. 

 

그런데...

마지막 집에 갈 조건을 보면요.

앞의 세가지 부류와는 차원이 다릅니다.

이거 하나면!

앞에 있는 이유도 

사실상 아무 필요가 없을지 모릅니다.

 

뭐라고 하세요?

8절입니다.

"책임자들은 또 백성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두려워서 마음이 허약한 자가 있느냐

그는 집으로 돌아갈지니...."

세상에!

전쟁이 무서운 사람은 집에 가랍니다.

 

전쟁 안 무서운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전쟁을 앞두고 이게 할 말입니까?

다 도망가버리지 않겠어요?

 

성경에 그 실 예가 있어요.

사사시대 기드온이라는 사람이

전쟁을 위해서 백성들을 소집했을 때!

하나님께서 실제 이걸 실행하셨습니다. 

 

사사기7:3

"이제 너는 백성의 귀에 외쳐 이르기를

누구든지 두려워 떠는 자는 

길르앗 산을 떠나 돌아가라 하라 하시니..."

자 여러분!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계속 보시죠.

"이에 돌아간 백성이 이만 이천 명이요!

 남은 자가 만명이었더라"

전체 3만 2천명 중에서!

2만2천명이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3분의 2 이상이 옳다구나! 하고

도망간 겁니다. 

이런 일이 벌어진다니까요.

 

그런데도!

하나님은 명령하시는 겁니다.

'위의 네가지 사항에 해당되는 

모든 사람은

다 집에 돌려보내라'

 

어쩌시겠다는 거에요?

몇명이 남든지!

그 남은 사람으로!

하나님이 싸우시겠다는 겁니다. 

 

그저 싸우는 것이 아니라!

그 소수의 사람으로라도!

이스라엘을 이기게 하시겠다는 거에요!

 

이게 하나님의 자신감입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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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20:1-9
 
하나의 구절에서 
'겁내지 말며, 두려워하지 말며,
떨지 말며, 놀라지 말라'라고
말씀하실 정도라면!
이 말은 
역설적으로 
'겁나고, 두렵고,
떨리고, 놀랄만한' 상황이란 걸
알 수 있습니다. 
 
어떠한 상황인가?
바로 '전쟁'입니다. 
최근 우크라이나나 가자지구에서
벌어지는 전쟁을 보면서
우리는 전쟁의 참상을 
실시간으로 목격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이런 일이 일어난다는 걸
상상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
 
이스라엘도 마찬가집니다. 
이제 가나안에 들어가면 
전쟁이 시작됩니다. 
피할 수 없는 정복 전쟁입니다.
 
그것도!
약자가 강자를 정복하는 전쟁입니다.
40년간 광야 생활 했던 이스라엘은
전투를 연습한 일이 없습니다. 
무기요? 말과 병거요? 
전쟁 할 수 있는 어떠한 도구도 
없습니다. 
 
그런데 적군은 어떻습니까?
40년 전 가나안 정탐을 다녀왔던
열 정탐꾼이 이렇게 보고했습니다.
 
민수기13:28
"그러나 그 땅 거주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고
심히 클 뿐아니라
거기서 아낙 자손을 보았으며"
32절 하~33절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거기서 네피림 후손인 아낙자손의 
거인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라"
 
이 보고를 듣고
사람들이 두려움에 빠졌고
믿음 없는 이 두려움 때문에!
이스라엘은 무려 40년간이나 
광야를 돌아야 했고,
20세 이상의 모든 사람이 심판받아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1절 말씀입니다.
"네가 나가서 적군과 싸우려 할 때에
말과 병거와 백성
너보다 많음을 볼지라도..."
 
 적들의 강대함은 여전합니다.
싸울만한 무기나 전력이 없는 이스라엘 입니다.
그들 입장에서 생각해보세요.
일방적인 학살을 당할게 분명한데
얼마나 겁이날까요?
얼마나 두렵고 떨리고
적들앞에 놀라게 될까요?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들에게 격려하십니다.
아니,
정확하게는 명령이죠.
즉 두려움은 불순종이라는 말이죠.

자, 이렇게까지 강하게 말씀하시는
이유는 뭘까요?

1절 후반절에 그 대답이 있습니다.
"...애굽 땅에서 너를 인도하여내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하시느니라"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시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 하나님이 어떤 분이세요?
답이 1절에 있지요?
뭐라고 되어있나요?
"애굽에서 너를 인도하여내신"
출애굽의 하나님이십니다.
당대 최강대국이 애굽, 이집트입니다.
그 강대국 애굽을 열 재앙으로 초토화시키셨고
홍해를 갈라 자기 백성을 건지시고
동시에 애굽의 병거와 마병을
수장시키신 분입니다.

그 하나님이!
지금도 이스라엘과 함께 하신다는거에요!
반드시 이기게하신다는겁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그 자신감을 어떻게 나타내시는지 보세요.

먼저 생각해보시죠.
전쟁을 한다고 하면
일단 사람이 많은게 좋을까요,적은게 좋을까요?
당연히 많은것이 좋지요!
군인을 소집하는 징집관 입장에서 생각해보면요.
어쨌거나 한 사람이라도 더 입대시키려 할겁니다.

제가 육군 만기 제대를 했는데요.
입대 전에는 어떻게든 안가고싶었거든요.
근데 제가 너무 문제가 없었던겁니다.
그래도 혹시나 신체검사에서 뭔가
하자가 있지않을까 기대했는데
결국 정상등급으로 입대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제가 올해 발바닥이 아파서
병원에서 엑스레이를 찍었는데...
세상에...
제가 평발이었답니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는데
제 때는 평발은 군 면제가 가능했거든요.

제 신체검사했던 군의관이
틀림없이 알았을텐데
그냥 정상인으로 찍어서
입대를 하게 만들었단 말입니다.

이게 징집관의 입장인거죠
'한 사람이라도 더 입대시키는 것'
한 사람이라도 인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말입니다.

정작 하나님께서 징집관에게 명령하시는 건!

전혀 다른 내용입니다. 

오히려 '한 사람이라도 더 

집으로 돌려보내라' 하시는 겁니다.

이게 하나님의 자신감이라는 거죠. 

 

오늘 본문에는 '집으로 돌아가야 할' 

적어도 네가지 조건이 나옵니다. 

하나 하나를 살펴보면 얼마나 당황스러운지요.

 

첫번째 집에 돌아가야 할 부류입니다.

5절

"책임자들은 백성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새 집을 건축하고 낙성식을 행하지 못한 자가 있느냐

그는 집으로 돌아갈지니 전사하면

타인이 낙성식을 행할까 하노라"

 

여기서 '낙성식'이란

'집을 짓고 하나님께 헌신하는 예식'을 뜻합니다.

성경에서는 오직 '성전과 관련해서만' 

이 단어가 쓰였고요. 

일반 개인의 집에 대한 '낙성식'은 

오늘 본문 이외에는 나오지 않아요.

그래서 '개인 소유의 집'에 대한 낙성식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정확히는 알 수 없는데, 

다행히 당시 문화에 대한 당시 문헌이 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에서 '낙성식'이라 하면 

가정의 가장이 '가족들이 새 집에 들어가서 정착할 때까지'

가정의 안정을 지키는 행위를 '낙성식'이라

인정했답니다. 

'낙성식'이라고 하지만 원문의 단어로 보면요!

'헌신하다' '개시하다' '시작하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일회성의 행사가 아니고!

훨씬 폭넓은 의미가 있고,

기간도 길었다는 겁니다. 

 

생각해보세요. 

"가장이 집을 짓고, 가족이 자리를 잡을 때까지!"

어느정도나 시간이 지나야 이게 가능할까요?

굉장히 주관적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는 작년쯤에 집을 지었어. 

그런데

아직 가족들이 자리를 못잡았네...

그러니 나는 집을 가야겠어'

이러면 할 말이 없어지는 겁니다. 

 

아닌 말로...

몇년 이내로 집 지은 사람들은 다 돌아가게 되는 거죠.

모인 사람들 중에 

'나는 낙성식을 아직 안 마쳤는데요?'

그러면 그들을 막을 수 없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은요?

보내라 하시는 거에요.

상관 없다는 거죠. 

 

그렇게 큰 무리가 우루루 빠져 나갑니다. 

 

이것만으로도 당혹스러운데!

하나님은 두번째 집에갈 부류를 말씀하십니다.

6절

"포도원을 만들고 그 과실을 먹지 못한 자가 있느냐?

그는 집으로 돌아갈지니 

전사하면 타인이 그 과실을 먹을까 하노라"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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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19:1-6

 

1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2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3 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으며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4 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도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

5 해는 그의 신방에서 나오는

신랑과 같고 그의 길을

달리기 기뻐하는 장사 같아서

6 하늘 이 끝에서 나와서

하늘 저 끝까지 운행함이여

그의 열기에서 피할 자가 없도다

 

 

오늘 시는 다윗의 시 인데요

아마도 오늘 우리들처럼 

야외 모임을 나왔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자연을 보는 순간!

하나님의 영광에 압도되었습니다. 

1절 말씀 처럼!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는 겁니다.

그냥 '보여준다'는 것도 아니고, 

'드러내는' 것도 아니고,

'선포한다'는 건!

굉장히 강한표현이죠!

넓고 푸른 하늘이  

"봐라! 이건 하나님의 영광이다"라고

자기에게 외치고 있더라는 거에요.

 

밤이 되었습니다.

궁창이 아름다운 별로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 줍니다.

 

'하늘은 왜 저리도 푸를까!'

'밤하늘의 별들은 어찌 저리 빛날까?'

오늘날의 과학으로야 

이런저런 설명을 할 수 있겠지만요!

 

"왜 저렇게 아름다울까?" 묻는다면!

이건 다른 문제입니다. 

과학으로 설명하면 할 수록!

오히려 이 모든 것을 만드신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만 커질 뿐입니다.

 

2절에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한다' 하는데!

매일 낮과 밤이 이어지고 

이에 따라 계절이 바뀌지요.

 

낮과 밤이 바뀌는 이유는 뭔가요?

지구가 자전, 스스로 돌기 때문입니다.

지구가 돌면서 태양 방향이면 낮이고

태양 반대방향이면 밤입니다. 

 

그런데 왜 계절이 바뀌는가?

지구가 약간 기울어서

공전, 태양 주위를 돌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사는 '북반구'가

태양과 가까이 있으면 여름이요, 

지구가 반대편에 있어서 '북반구'가

태양과 멀어지면 겨울입니다.

 

자 생각해보세요.

태양과 같은 거리에서

악간의 기울기만으로 

뜨거운 여름과 추운 겨울이 됩니다.

그렇다는 말은!

지구가 태양과

조금이라도 가까워지거나 멀어진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뻔하지 않습니까?

지구 온도가 1도만 올라가도 

재앙적인 일이 일어난다고들 하잖아요?

 

그렇게 본다면!

지구는 태양과 절묘한 거리를 두고

'공전'과 '자전'을 하고 있는 겁니다. 

과학자들의 계산대로라면

무려 45억년동안 말이죠!

 

이것도 참 신비에요.

태양 주변으로 45억 바퀴 도는 동안!

어떻게 조금의 오차도 없이

같은 자리를 돌 수 있었던 걸까요?

우주공간에 지구가 도는 '길'이라도 

있었던 걸까요?

 

놀랍게도 

다윗은 비슷한 이야기를 합니다.

지구에서 봤을 때

지구의 자전은 

태양이 뜨고 지는 것으로 보이지요.

5절입니다.

"해는 그의 신방에서 나오는 신랑과 같고

그의 길을!

달리기 기뻐하는 장사 같아서"

 

마치 '길'이라도 깔아놓은 양!

천체는 '정해진 방식'대로 움직입니다.

 

'우연일까요?'

이런 현상이 '우연'이라면 

그것이야말로 '기적'이지 않을까요?

 

오히려 하나님의 설계와

창조의 손길로 보는 것이 

훨씬 이성적으로 보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이렇게 말합니다.

3,4절!

"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도다"

 

모처럼 야외에 나왔는데

자연을 만끽하시면서

다윗의 고백을 회복하는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더욱 선명하게

하나님과 동행하는 

좋은 기회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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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때 마침 두어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저희의 제물에 섞은 일로 예수께 고하니

2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 같이 해 받음으로써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3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4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 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5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누가복음13장1절~5절

 

최근 전 세계적인 재앙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는다는

기사를 접하게 된다. 

 

특히나 리비아에서 일어난 홍수 피해는

한꺼번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을 수 있는지

여실히 보여주었기에 충격이 크다.

 

이런 일들을 보면서!

사람들은 안타까워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점점 무감각해지기도 한다.

 

성경은 이런 일들을 일어날 때에!

무엇을 생각하라 하시는가?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 

깔려 죽은 열여덟 명을 생각할 때!

당시의 사람들은

그들이 하나님의 징계를 받는다고

생각했다.

 

실로암 망대에 깔려 죽었다는 것은

당시 본디오 빌라도의 

예루살렘 개조 사업을 도왔다는 것이고

이들이 친 로마파라는 의미이다.

 

하나님의 백성

같은 민족인 이스라엘을 등지고

로마의 편을 들었으니

하나님이 징계할만하다고 생각한 것이지

 

그러나 예수님은 아니라 하신다.

그들이 왜 죽었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그들에게 일어난 일은

지나간 일일 뿐이다.

중요한 건!

다가오고 있는 일이다.

 

하나님의 심판의 날이 다가오고 있다.

AD70년 로마가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성전까지 돌 위에 돌 하나 남기지 않고

파괴할 날이 다가온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심판이고!

이 심판을 피할 자가 없을 것이다.

 

회개하지 아니하면!

이들에게도 똑같은 심판이 임할 것이다.

이 말은!

망대에 치어 죽은 사람이 회개 안 했다는

뜻이 아니다!

그들의 죽음은 그들의 죽음일 뿐이다.

살아 있는 자들이여!

지금 살아 있는 사람들은!

그들이 더 의로워서 살아 있는 것이 아니다.

그저 하나님의 오래 참으시는 

인내 때문에!

심판을 유보해 두셨을 뿐이다.

 

예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하나다!

지금이 기회다!

회개할 기회이다.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으며!

빨리 구원의 길을 찾아야 한다.

 

리비아 홍수를 접한 우리는!

마땅히 그들에 대한 동정심을 가져야 한다.

마땅히 도울 수 있는 손을 내밀어야 한다.

 

다만!

거기서 만족해서는 안된다.

내가, 우리가 과연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회개의 증거가 있는가?

 

이 마지막 때에!

우리 자신을 반드시 돌아봐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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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17:14
 

"압살롬과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르되 
아렉사람 후새의 계략은 아히도벨의 계략보다 낫다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압살롬에게 화를 내리려 하사
아히도벨의 좋은 계략을 물리치라고 명령하셨음이더라"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가!
 
아히도벨의 계략이 후새의 계략에 밀렸다. 
사실 아히도벨의 계략이 더 좋은 것이었다(고 본문이 말한다).
그럼에도 아히도벨의 계략이 받아들여지지 않은 이유는
하나님의 간섭하심 때문이었다. 
여기서는 '명령'이라 한다. 
잠언 19:21
"사람의 마음에는 많은 계획이 있어도
오직 여호와의 뜻만이 완전히 서리라"
하나님의 뜻만이 완전히 서는 것이다.
 
@그게 다인가?
 
아니다. 
사실 이 이야기에는 몇가지 당황스러운 지점이 있다.
아히도벨의 계략을 파하신 것은!
다윗을 지키시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이 사건에 있어서 
다윗에게 정당성이 있을까?
사실 좀 더 이야기를 들여다보면 
그렇지 않다고 느끼게 될 것이다. 
 
다윗에게 반기를 들었던 '압살롬'에게도 
나름의 아픔이 있었고 원한이 있었다. 
자기 여동생이 강간을 당했는데 
아버지인 다윗이 감싸주지 않았다. 
압살롬은 이 일로 인해 아버지와 멀어졌고
여동생에게 나쁜짓을 한 배다른 형을 죽였다.
그 연장선에 이 반란 사건이 있는 것이다. 
 
아히도벨도 마찬가지다. 
사실 아히도벨은 다윗의 든든한 모사였다.
역대상 27:33
"아히도벨은 왕의 모사가 되었고
아렉 사람 후새는 왕의 벗이 되었고"
아마 젊을 때부터 다윗과 함께 했을 것이고,
다윗의 하나님을 함께 경험했을 것이다.
그랬을 텐데...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에!
아히도벨은 자기가 먼저 압살롬의 편에 섰다.
사무엘하 15:12
"제사 드릴 때에 압살롬이 사람을 보내
다윗의 모사 길로 사람 아히도벨을
그의 성읍 길로에서 청하여 온지라
반역하는 일이 커가매
압살롬에게로 돌아오는 백성이 많아지니라"
그러더니 아히도벨은 다윗에게 적대적인 계략을
계속해서 내고 있다. 
다윗이 도망가면서 성에 둔 후궁 열명을 
성 위에서 공개적으로 범하여 
아버지 다윗과의 관계를 돌이킬 수 없게 했다.
무엇보다!
도망친 다윗을 죽이는 일에 대해서 적극적이었다.
자기가 직접 나서서 다윗을 죽이겠다 한다. 
왜 이렇게까지 변했을까?
아히도벨의 족보를 보면 고개가 끄덕여지는 
지점이 보인다. 
사무엘하 23:34
"마아가 사람의 손자 아하스배의 아들 엘리벨렛과
길로 사람 아히도벨의 아들 엘리암"
아히도벨의 아들로 엘리암이라는 사람이 있다.
그리고
사무엘하 11:3
"다윗이 사람을 보내 그 여인을 알아보게 하였더니
그가 아뢰되 그는 엘리암의 딸이요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가 아니니이까 하니"
다윗이 범한 '밧세바'가 
엘리암의 딸이었고, 아히도벨의 손녀였던 것이다.
 
사랑하는 손녀의 집안을 망친 사람이
자기가 그토록 따랐던 다윗왕이었다니...
아마 이런 분노가 다윗에 대한 복수로
이어진 듯 하다. 
 
다윗은 어쩌면 이들에게는 
원수처럼 보였을 가능성이 크다. 
다윗의 잘못이다. 
그럼에도불구하고!
하나님은 여전히 다윗의 편이시며
다윗을 대적하는 압살롬과 아히도벨 
두 사람을 다 대적하신다. 
이런 부분에 대한 지적도 하고싶다. 
 
@ 결론으로 내고 싶은 이야기는?

다윗에게 있어서
아들 압살롬도, 평생을 함께 했던 아히도벨도
절대 원수가 되고 싶지 않았던 관계였다.
그럼에도 다윗을 죽이려 들정도로
다윗에 대한 미움이
그들의 마음에 가득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결국
밧세바 사건
그 하나로 귀착되는 것이다.
다윗의 후궁 열명이 아들 압살롬에게 범해진 것도
사무엘하12장12절
"너는 은밀히 행하였으나 나는 온 이스라엘 앞에서
백주에 이 일을 행하리라 하셨나이다 하니"
이 말씀의 성취였고,
아히도벨이 다윗을 대적한 것도
밧세바 사건이 발단이었다.

다윗의 범죄가
다윗을 이렇게까지 몰아세운 것이다.
죄의 결과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나는 하나님께 택함 받았으니까,
구원은 받았으니까,
대강 살아도 상관 없겠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다윗이야말로 택함받은 사람이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했다.
그럼에도!
그가 범죄했을 때
그가 치러야 했던 댓가는 상상을 초월했다.

게다가 이런 일들을 결과로
남유다와 북 이스라엘이 나뉘는
단초까지 제공했으니
다윗의 죄는 그야말로 '나비효과'와
다를바 없었다.

내가 지금 짓는 죄의 후폭풍이
얼마나 클지를 생각해보라!
그만큼 하나님이 죄를 미워하시는 분이심을
명심 또 명심해야 할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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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두가지 인생을 대비한다. 

 

하나는 쫒기듯 사는 인생이다. 

이는 황금새작에 갇힌 인생과도 같다.

무언가를 이루고 성공하기위해 

그것만을 쫓아가는 인생이다.

자기 손 안에 있는 것을 놓치지 않으려고

발버둥친다. 

 

이스라엘의 초대왕 사울이 그랬다.

그는 모든 것을 갖춘 사람이었다. 

첫째는 '부' 둘째는 '외모' 셋째는 '체격'

사람들이 부러워할만한 모든 요소를 갖춘 그는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고!

내면 세계를 계발하기도 전에 

성공하고 말았다. 

너무 빨리 찾아온 성공은 오히려 

그를 실패의 구덩이로 떨어트린다.

 

그는 세상을 정복해야 할 대상으로 보았다. 

블레셋과의 전쟁을 앞뒀을 때 

제사 드려야 할 사무엘을 기다리지 못하고

자신이 직접 제사를 집례한다. 

그는 그저 일을 진행시키려는 조급증에 빠져 있었다.

 

훗날에는 백성의 신망을 얻은 젊은 다윗에게

끊임없이 집착하는데 모든 에너지를 쏟았다.

성경에서는 그의 분노가 폭발하는 장면이 

여러분 나온다. 

그는 쫓겨다니는 인물의 전형이다.

p.75

"안타깝게도 우리 사회는 수많은 사울들, 

즉 재산을 쌓고 인정받고 성취하기 위해

쫓겨다니다가 황금 새장에 갇힌 사람들로 

가득 차있다."

 

이렇듯 세상 대다수의 사람들이 

'쫒기는 삶'을 살고 있다면, 

그 반대편에는 '부름받은 삶'을 사는 

사람들이 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세례요한이다.

세례요한은 

세상적인 표현대로라면 엄청난게 성공한

선지자였다. 

그가 있는 곳 마다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제자들도 여럿이 있었다. 

 

그런데 어느날!

예수라는 인물이 나타났고, 

세례요한을 따랐던 사람들이 

이제는 예수에게로 관심을 옮겼다.

마치 사울에게서 다윗에게로 

저울이 기우는 모양새다. 

이럴 때에!

세례요한은 사울과 달리 행동한다. 

오히려 기뻐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역사상 가장 유명한 고백중의 하나가

이 때에 나왔다. 

 

부름 받은 사람은 

자신이 청지기임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 어느것도 자신의 소유가 아니었다. 

그저 하나님이 잠시 맡기셔서 관리하는

청지기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나의 재물, 목사에게는 교인들, 

심지어 자녀들에이르기까지...

그래서 이러한 것들을 잃었을 때에

심각한 위기에 빠지지 않는다. 

오히려 내면은 더욱 강해지곤 한다. 

 

 

세상의 대다수인 '쫓기는 삶'을 사는 '우리'는

과연 변화될 수 있는가?

 

사도 바울이 그 가능성을 보여준다. 

부르심을 받기 전의 바울은 

자신의 성공을 위해 사는 사람이었다.

출신 가문도 좋았고, 명석했으며, 

좋은 학파에서 공부를 해서 

보장된 성공의 길을 가고 있었다.

그 성공의 길을 가로막는 것이 있다면

수단을 가리지 않고 넘으려 들었다.

그래서 초대교회 기독교인들을 박해했던 것이다.

그랬던 바울이!

어느날 예수님을 만났다. 

그리고 부름받은 삶을 살기 시작한다. 

추구해왔던 세상적 성공의 삶이 

'분뇨'처럼여겨졌다고 한다. 

바울에게 있었던 변화는

우리 역시 기대할 수 있는 변화일 터다. 

 

 

p.121.

"우리 자신의 내면세계를 들여다볼 때 

나는 사울이 될 것인지 

아니면 요한이 될 것인지 

거의 매일 씨름해야 하는 문제라는 것을 

발견한다."

 

 

질문

1. '맡겨진 것'을 '내 소유'처럼 여기는 것이 있나요?

2. '쫒기는 삶'과 '부름 받은 삶'중에 나는 어디인가요?

3. 지금 하나님은 나를 어떤 일로 부르고 계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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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 장이다.

그런데 지금와서 보니까 

전체에서 두번째 장이 아니더라.

총 5부까지의 큰 주제가 있고, 

이 두번째 장은 

'서론'의 두번째 장이다. 

아직 갈길이 멀다는 뜻이다.

 

서론의 두번째 장은

내면세계의 중요성을 보여준다.

 

제목은 '조종실에서 보는 시각'이다.

 

저자는 내면세계를 

핵잠수함의 조종실에 비유하고 있다.

미국 핵잠수함인 오하이오함의 내부

핵잠수함은 종종 여러 어려움에 직면한다.

그럴 때에 

잠수함을 위기에 빠트리는 것은 

외부의 요인들이 아닐때가 많다.

오히려 내부 조종실에 

질서가 잡혀 있지 않고 

지휘계통 등에 혼선이 생기면 

위험에 노출된다고 말한다.

 

외부의 위험 요소들은 

내부에서 잘 파악하여 적절히 대처하면

얼마든지 피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부의 질서가 무너져 있으면

잠수함은 작은 위협에도 

쉽게 무너지고 만다. 

 

48페이지를 보자

"삶에 개인적으로 긴장과 압박이 가중될 때

왜 우리는 삶의 조종실로 가는 대신

 더 빨리 뛰고, 더 강력하게 저항하고,

더 나은 전문가가 되려 하는 것일까?

우리 시대는 내면세계보다는 외적 영역의 

온갖 소소한 데 더 많은 관심을 쏟고 있다.

내면세계만이 우리가 그 어떤 외부의 광풍이라도

헤치고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얻을

유일한 장소인데도 말이다."

 

50페이지

"잠수함의 함장이 무언가 심싱치 않은 일이 

일어나고 있다고 느꼈을 때 어떻게 행동하는가!

그는 곧바로 조종실로 향했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위험에 대처하는데 필요한 모든 역량이

거기에 있다는 것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

그가 지휘하던 잠수함은 

외부 도색이나 속력, 승무원들의 결속력 등을 볼때

미 해군에서 가장 탁월한 잠수함일 수도 있다.

그러나 조종실이 무질서한 상태에 있다면

도색, 속력, 훌륭한 승무원 등 

그 모든 것이 전혀 무의미할 것이다."

 

즉 이런 말이다. 

잠언 4:23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질문들

1. 나는 위기때마다 어디로 먼저 달려가는 편인가?

2. 자신의 내면 세계를 얼마나 돌보고 있는가?

내면세계를 돌보기 위한 시간을 얼마나 내고 있는가?

3. 내면세계를 돌보기 위한 나만의 노하우가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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