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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위대한 일을 이루려면
아니 위대하지 않더라도
뭔가를 이루려하면
무언가 대단한 행동을 해야한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다니엘을 보자
다니엘은 무엇을 했는가?

공부도 열심히 했을 것이다.
다니엘이 모든 사람들보다
뛰어났다는것은
그가 얼마나 학문 연구에 힘썼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다만,
성경은 거기에 주목하지않는다.
다니엘 전반을 보면
다니엘은 기도하는 사람이었다고 말한다.
다니엘은 어떠한 상황에도 기도했다.

느부갓네살의 꿈을 해석할 때도 기도했고
사자굴에 던져졌던 이유도
기도 때문이었다.

그리고 여기!
다니엘 9장에서
다니엘은 하나님의
약속의 때를 발견하고
또다시 기도를 시작한다.

회개한다.

어쩌면 회개할것이
하나도 없을 사람인 것 같은데..,
이스라엘이 포로되는데
어떠한 책임도 없는 다니엘이
그 조상의 죄를 자신의 죄처럼
회개한다.

어쩌면 이것이 예수님의 모습 아닐까?
죄없으신 예수님
우리의 죄에대해
아무런 책임도 없으신 예수께서
우리 죄를 대신하셨다.
겟세마네에서
마치 죄인처럼 기도하셨다.

그리고 어쩌면
이것이 우리가 오늘날 가져야할
태도다.

히브리서 13장
"17.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그들은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신들이 청산할 자인 것 같이
하느니라
그들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그건 내잘못이 아니야" 라고
억울해 마지않는 사람이 아니라
"내 죄! 우리의 죄입니다" 라고
기꺼이 짐을 지는 사람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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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개에는 두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구원의 과정으로서 회개다.
이것을 회심이라고도 하는데
'마음을 돌이켜 하나님께로 향하는 것'이다.
구원의 과정, 신학 용어로는
'구원의 서정' 은
1소명 2중생 3회심 4신앙 5칭의
6양자 7성화 8성도의 견인 9영화

이중에 세번째 단계인 회심이란
인생에 한 번 있는 일이다.
그다음이 '신앙'이고
그 다음이 '칭의' 인데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고 칭해주신것이
어찌 번복 될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그 이전 단계인 회심역시도
번복 되지 않는것이다.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라고
하신 말씀은
회심하라는 부르심이다.


두번째 그때그때 지은 자범죄를
고백하고 그 죄에서 돌이키는 회개다.
이것이 아마도 일반 사람들이 생각하는
회개일 것이다.

그런데 성경에서 두번째 의미의 회개가
어떻게 쓰이는지 보면
놀랍다.

두번째 의미에서의 회개를 하지 않는
사람은 사실상 첫번째 회개도
하지 못한 사람이다.

요한계시록 9장
20. 이 재앙에 죽지 않고 남은 사람들은
손으로 행한 일을 회개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여러 귀신과 또는
보거나 듣거나 다니거나 하지 못하는
금, 은, 동과 목석의 우상에게 절하고
21. 또 그 살인과 복술과 음행과
도둑질을 회개하지 아니하더라

이 본문에서 '행위'를 회개하지 않는 자들은
결국 망하는 자들이었다.

반대로 자기 행위를 회개할 줄
아는 사람들은 어떤가?

고린도후서 7장
9. 내가 지금 기뻐함은
너희로 근심하게 한 까닭이 아니요
도리어 너희가 근심함으로
회개함에 이른 까닭이라
너희가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게 된 것은
우리에게서 아무 해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고린도교인들은 고린도 전서에서
바울에게 그들의 행위로 인해
책망을 받았다.
이럴 때에 그들은 회개함으로서
자신들이 구원의 백성임을
증거할 수 있었기에
바울은 기뻐했다.


즉!
두가지 회개는 다르지 않고
함께 간다는 말이다.

회심한 사람은
당연히 회개하는 삶을 살게 되고
회개는
그가 회심자라는 것을 증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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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살 때부터 교육전도사를 하며 설교를 해왔으니
벌써 25년 이상 교회 강단에서 설교를 해왔다.

어린이 설교부터 청소년, 청년 설교를 거쳐
부흥회 설교, 대예배 설교, 구역 설교까지
온갖 설교를 해 오면서!
설교에 대해 참 많이 고민했고,
섬겼던 담임목사님들을 통해서 배워왔다.

이제는 설교에 대해 배워왔던 것들에 대해서
나름대로 정립하고 정리해두는 것이 좋을 듯하다.

가장 먼저 설교 하면 해야 할 생각은 이거다!
“설교란 무엇인가?”
어렵지 않은 질문이다.
설교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하나님의 백성인 성도들에게 선포하는 것‘이다.

다만,
성경에 있는 구절을 그대로 대독하는 것을
설교하하지는 않는다.
성경은 2000여년 전에 완결된 책이다.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동일하지만
말씀을 들었던 사람들이 달랐고,
시대가 다르다.
문화가 달랐고, 나라도 다르다.
당시의 말씀이 과연 어떤 의미인지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많은 것들을 고려해야 한다.

예를 들어서
성경에 어떤 여성이 대단한 일을 이루었다고
생각해보자.
이런 말씀을 보고서는
“여자도 할 수 있다”는 식으로 해석한다면!
당시의 문화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당시에 ’여성’에 대한 개념은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사람의 숫자에도 넣지 않았을 정도‘이다.
그런 시대에 ’여성이’ 어떤 일을 이뤘다면,
이건 굉장히 ’이례적인‘ 사건인 것이다.
’여자도 할 수 있다‘는 메시지보다는
’여자가 나설 수 밖에 없는 당시의 이유‘를
먼저 찾는 것이 우선 되어야 한다.

물론,
여자는 뭘 하지 말라는 말은 아니다.
다만, 성경을 해석하는데 있어서
당시에 대한 이해를 뛰어넘어서
오늘날의 시각으로 성경을 봐서는
’하나님이 의도하셨던 원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게 된다는 거다.

또한, 성경을 해석하는 또 하나의 틀은
’정경적인 해석 방법‘이다.
’정경적‘이라는 표현은 주로 신학교에서 배우는 표현인데,
성경을 ’하나의 주제로 해석해 가는 것‘이다.
대표적인 관점이 ’언약적 관점’이다.
하나님께서 가장 먼저 ‘아담과 언약을 맺으시고’
이후 ’노아, 아브라함, 모세, 다윗에 이르기까지’
언약을 맺으시며,
마침내는 예수께서 ‘새언약’을 맺으시면서
언약의 절정기를 맞는 것이다.

이러한 다양한 틀로 성경을 정당하게 해석하면
하나님의 의도하셨던 의미가
(내 경우에는)
떠오른다.
그것을 오늘날의 청중이 이해 할 수 있도록
정리하고 설명하면서 도전하는 것!
이것이 설교라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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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때 마침 두어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저희의 제물에 섞은 일로 예수께 고하니

2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 같이 해 받음으로써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3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4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 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5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누가복음13장1절~5절

 

최근 전 세계적인 재앙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는다는

기사를 접하게 된다. 

 

특히나 리비아에서 일어난 홍수 피해는

한꺼번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을 수 있는지

여실히 보여주었기에 충격이 크다.

 

이런 일들을 보면서!

사람들은 안타까워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점점 무감각해지기도 한다.

 

성경은 이런 일들을 일어날 때에!

무엇을 생각하라 하시는가?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 

깔려 죽은 열여덟 명을 생각할 때!

당시의 사람들은

그들이 하나님의 징계를 받는다고

생각했다.

 

실로암 망대에 깔려 죽었다는 것은

당시 본디오 빌라도의 

예루살렘 개조 사업을 도왔다는 것이고

이들이 친 로마파라는 의미이다.

 

하나님의 백성

같은 민족인 이스라엘을 등지고

로마의 편을 들었으니

하나님이 징계할만하다고 생각한 것이지

 

그러나 예수님은 아니라 하신다.

그들이 왜 죽었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그들에게 일어난 일은

지나간 일일 뿐이다.

중요한 건!

다가오고 있는 일이다.

 

하나님의 심판의 날이 다가오고 있다.

AD70년 로마가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성전까지 돌 위에 돌 하나 남기지 않고

파괴할 날이 다가온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심판이고!

이 심판을 피할 자가 없을 것이다.

 

회개하지 아니하면!

이들에게도 똑같은 심판이 임할 것이다.

이 말은!

망대에 치어 죽은 사람이 회개 안 했다는

뜻이 아니다!

그들의 죽음은 그들의 죽음일 뿐이다.

살아 있는 자들이여!

지금 살아 있는 사람들은!

그들이 더 의로워서 살아 있는 것이 아니다.

그저 하나님의 오래 참으시는 

인내 때문에!

심판을 유보해 두셨을 뿐이다.

 

예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하나다!

지금이 기회다!

회개할 기회이다.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으며!

빨리 구원의 길을 찾아야 한다.

 

리비아 홍수를 접한 우리는!

마땅히 그들에 대한 동정심을 가져야 한다.

마땅히 도울 수 있는 손을 내밀어야 한다.

 

다만!

거기서 만족해서는 안된다.

내가, 우리가 과연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회개의 증거가 있는가?

 

이 마지막 때에!

우리 자신을 반드시 돌아봐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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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17:14
 

"압살롬과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르되 
아렉사람 후새의 계략은 아히도벨의 계략보다 낫다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압살롬에게 화를 내리려 하사
아히도벨의 좋은 계략을 물리치라고 명령하셨음이더라"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가!
 
아히도벨의 계략이 후새의 계략에 밀렸다. 
사실 아히도벨의 계략이 더 좋은 것이었다(고 본문이 말한다).
그럼에도 아히도벨의 계략이 받아들여지지 않은 이유는
하나님의 간섭하심 때문이었다. 
여기서는 '명령'이라 한다. 
잠언 19:21
"사람의 마음에는 많은 계획이 있어도
오직 여호와의 뜻만이 완전히 서리라"
하나님의 뜻만이 완전히 서는 것이다.
 
@그게 다인가?
 
아니다. 
사실 이 이야기에는 몇가지 당황스러운 지점이 있다.
아히도벨의 계략을 파하신 것은!
다윗을 지키시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이 사건에 있어서 
다윗에게 정당성이 있을까?
사실 좀 더 이야기를 들여다보면 
그렇지 않다고 느끼게 될 것이다. 
 
다윗에게 반기를 들었던 '압살롬'에게도 
나름의 아픔이 있었고 원한이 있었다. 
자기 여동생이 강간을 당했는데 
아버지인 다윗이 감싸주지 않았다. 
압살롬은 이 일로 인해 아버지와 멀어졌고
여동생에게 나쁜짓을 한 배다른 형을 죽였다.
그 연장선에 이 반란 사건이 있는 것이다. 
 
아히도벨도 마찬가지다. 
사실 아히도벨은 다윗의 든든한 모사였다.
역대상 27:33
"아히도벨은 왕의 모사가 되었고
아렉 사람 후새는 왕의 벗이 되었고"
아마 젊을 때부터 다윗과 함께 했을 것이고,
다윗의 하나님을 함께 경험했을 것이다.
그랬을 텐데...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에!
아히도벨은 자기가 먼저 압살롬의 편에 섰다.
사무엘하 15:12
"제사 드릴 때에 압살롬이 사람을 보내
다윗의 모사 길로 사람 아히도벨을
그의 성읍 길로에서 청하여 온지라
반역하는 일이 커가매
압살롬에게로 돌아오는 백성이 많아지니라"
그러더니 아히도벨은 다윗에게 적대적인 계략을
계속해서 내고 있다. 
다윗이 도망가면서 성에 둔 후궁 열명을 
성 위에서 공개적으로 범하여 
아버지 다윗과의 관계를 돌이킬 수 없게 했다.
무엇보다!
도망친 다윗을 죽이는 일에 대해서 적극적이었다.
자기가 직접 나서서 다윗을 죽이겠다 한다. 
왜 이렇게까지 변했을까?
아히도벨의 족보를 보면 고개가 끄덕여지는 
지점이 보인다. 
사무엘하 23:34
"마아가 사람의 손자 아하스배의 아들 엘리벨렛과
길로 사람 아히도벨의 아들 엘리암"
아히도벨의 아들로 엘리암이라는 사람이 있다.
그리고
사무엘하 11:3
"다윗이 사람을 보내 그 여인을 알아보게 하였더니
그가 아뢰되 그는 엘리암의 딸이요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가 아니니이까 하니"
다윗이 범한 '밧세바'가 
엘리암의 딸이었고, 아히도벨의 손녀였던 것이다.
 
사랑하는 손녀의 집안을 망친 사람이
자기가 그토록 따랐던 다윗왕이었다니...
아마 이런 분노가 다윗에 대한 복수로
이어진 듯 하다. 
 
다윗은 어쩌면 이들에게는 
원수처럼 보였을 가능성이 크다. 
다윗의 잘못이다. 
그럼에도불구하고!
하나님은 여전히 다윗의 편이시며
다윗을 대적하는 압살롬과 아히도벨 
두 사람을 다 대적하신다. 
이런 부분에 대한 지적도 하고싶다. 
 
@ 결론으로 내고 싶은 이야기는?

다윗에게 있어서
아들 압살롬도, 평생을 함께 했던 아히도벨도
절대 원수가 되고 싶지 않았던 관계였다.
그럼에도 다윗을 죽이려 들정도로
다윗에 대한 미움이
그들의 마음에 가득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결국
밧세바 사건
그 하나로 귀착되는 것이다.
다윗의 후궁 열명이 아들 압살롬에게 범해진 것도
사무엘하12장12절
"너는 은밀히 행하였으나 나는 온 이스라엘 앞에서
백주에 이 일을 행하리라 하셨나이다 하니"
이 말씀의 성취였고,
아히도벨이 다윗을 대적한 것도
밧세바 사건이 발단이었다.

다윗의 범죄가
다윗을 이렇게까지 몰아세운 것이다.
죄의 결과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나는 하나님께 택함 받았으니까,
구원은 받았으니까,
대강 살아도 상관 없겠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다윗이야말로 택함받은 사람이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했다.
그럼에도!
그가 범죄했을 때
그가 치러야 했던 댓가는 상상을 초월했다.

게다가 이런 일들을 결과로
남유다와 북 이스라엘이 나뉘는
단초까지 제공했으니
다윗의 죄는 그야말로 '나비효과'와
다를바 없었다.

내가 지금 짓는 죄의 후폭풍이
얼마나 클지를 생각해보라!
그만큼 하나님이 죄를 미워하시는 분이심을
명심 또 명심해야 할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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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 9:1-3

다니엘이 '서책'으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말씀을 깨달았다고 한다.
다니엘이 어떤 사람인가?
스스로도 엄청난 계시를 받았던 사람이지 않은가?
그럼에도!
다니엘은 예레미야의 책을 묵상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알고 있었다.

설교자들이 빠지는 함정 중에 

자기 설교를 생각하느라 남의 설교를 듣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이건 나 역시도 마찬가지이다. 

다른 목회자의 설교 속에서 진리를 발견하지 못하는 사람은 자기 생각에 갇혀서 하나님의 더 큰 뜻을 분별하지 못하게 되지 않을까?


그리고
예레미야의 글이라니!
예레미야는 사실상 평생 사역 속에서
사람들에게 인정 받은 적이 없다.
죽을 때까지!

그러나 지금!
다니엘에 의해서 예레미야의 말이 다시 살아서 그 시대속에서 성취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진리의 말씀을 결코 땅에 떨어뜨리지 않으신다. 

반드시 열매맺게 하시고, 성취되게 하신다. 

말씀 사역자들은 이러한 확신을 가지고 오늘 전해야 하는 말씀을 가감없이 전해야 한다. 

 

 

다니엘은 70년만에 포로생활이 마친다고 했던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는 운명론, 숙명론같은 것에 빠지지 않았다.
'어차피 일어날 일'이라며 손 놓지 않았다.
오히려 기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마음이 되었다.

'참된 신앙'이란 복음의 내용을 듣고 '동의'하는 이상의 것이다.

이보다 훨씬 더 진지한 어떤 것이다.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에 응답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함을 증거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약속을 간구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없다.

"기도는 믿음을 행사하는 주요한 요소다"(칼빈)

다니엘의 기도가!
그 일을 이루는 열쇠였던 것이다.
병거도, 칼이나 창도 아니었다.
하나님의 역사를 위하여!
85세 노인의 기도가 필요했던 것이다.
여러분의 기도도 마찬가지다.
여러분이 기도할 때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누가 알겠는가?
나이도, 능력도, 실력도 아니다!
그저 기도하겠다는 마음!

그걸 사탄이 싫어라 한다.
기도하는 자를 사자굴에 던져 넣겠다니!
이게 말이되나?
마귀가 그토록이나 기도를 방해하려 했던 것은
하나님의 역사를 막기 위함이지 않겠는가?

다니엘은 어릴 때 부터!
기도의 능력을 믿었고, 경험했던 사람이다.
왕의 꿈을 해석할 때에도!
친구들에게 말하지 않았는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이 은밀한 일에 대하여 긍휼히 여기사 자기 다니엘과 동무들이 바벨론의 다른 박사와 함께 죽임을 당치 않게 하시기를 그들로 구하게 하니라 (단2:18, 개역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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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로교회에서는
주님 오시는 날까지 교회에 계속될 직분으로 '장로'와 '안수집사'를 두고 있다.
두 직분은 성경에서 유래되었고 종교개혁을 통해 재천명 된 바 교회의 공적 직분이라 하겠다.
참고로 '목사'도 '장로'다.
구체적으로는 '가르치는 장로'가 '목사'다.

그렇다면 '권사'와 일년 직인 '서리집사'는 무엇인가? 이 두 직분은 역사속에서 교회의 필요에 따라서 임시적으로 만든 '임시직'이라 한다.

'권사'는 '장로의 직무'를
'서리집사'는 '안수집사의 직무'를 돕기 위해 세운 것이다.

헌법에 의하면
'심방' 등 교인을 돌보는 사역은 '장로의 역할'이다. 한국교회에서 주로 '목사들'이 이런 역할을 하지만, 엄연히 법으로 규정된 것이다.
성경만 봐도 '말씀 사역자'였던 사도들은 '말씀과 기도'에 전념하겠다고 천명했다.
장로들은 성도들이 들은 말씀대로 살았는가를 심방하며 점검하고 성도의 삶을 바로세워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장로의 회의 '당회'에서는!
교인들의 신앙생활에 대해 평가하고 필요하면 '징계'하는 '권징'을 시행하게 되어있다.
'당회'가 교회의 방향성을 결정하고, 재정을 책임지는 조직이라고 생각하겠지만(실제로 그렇게 운영되고 있음. 사실상 운영이사회가 된지 오래)
아니다!
오히려 헌법에서는 '당회'를 '치리회'라고 부른다.
신앙에 합당하지 않은 신자에 대해 징벌을 내리고 해벌하는 모임이라는 것이다.

사실 누군가를 징계한다거나 하는 것이 얼마나 조심해야 할 일인가!
그렇기 때문에 장로가 심방을 해야 함이 합당하다.

그 일이!
소수요 남자인 장로만으로 어렵기에!
장로를 돕는 역할로서 '권사'가 세워진것이다.
'기도, 심방, 위로, 세움'을 권사 고유의 사명이라 가르치는 분도 많지만
사실상 장로의 사역을 권사가 동역한다고 보는 것이 맞다.
그러므로
장로는 주일에 당회실에 앉아 있을 시간이 없는게 맞다. 교육부서에서부터 장년 모임에 이르기까지 모든 모임들에 관여 해야 하고, 각 성도들의 생활과 상태를 체크해야 한다. 그리고 같은 교구의 권사들의 도움을 받아서 심방을 정하고 목회자에게 보고해야 한다.
'장로가 목회자가에 보고한다'는 말이 생소할지 모르겠다. 그런데 그게 법이다.
"정치 제5장 지리장로 제4조 장로의 직무 5항 : 특별히 심방할 자를 목사에게 보고한다."

- 다음에 기회있으면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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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갈 때에 너희를 나의 원하는 것과 같이 보지 못하고 또 내가 너희에게 너희의 원치 않는 것과 같이 보일까 두려워하며 또 다툼과 시기와 분냄과 당짓는 것과 중상함과 수군수군하는 것과 거만함과 어지러운 것이 있을까 두려워하고" (고후12:20, 개역한글)

위의 말씀은 고린도 교회에 있는 여러 죄악의 목록이다.
성도에게 있어서는 안될 성품이며, 교회됨을 파괴하는 죄악들이다.
그 중에 눈에 띄는 오늘의 제목은 '거만함'이다.
교회에서 잘 설교 되지 않으면서도, 교회에서 (어쩌면) 많이 만날 수 있는 악한 성품이다.

신약에서는 오늘 제시했던 구절에서 단 한 번 나왔던 단어이기 때문일까?
왜 강단 설교에서 만나기 어려운지는 잘 모르겠다.

나도 돌아보니 27년 동안 교회에서 설교하면서 '거만함'을 경고하는 설교를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다.
그러니까
교회 안에 뿌리 깊이 박혀 있으면서도 밝히 드러나지 않는 죄악이 아닐까 싶다.

거만함은!
사도바울이 '두려워할 정도로' 교회에 해악을 끼치는 태도이다.

거만함은 어디에서 오는가?
내가 다른 사람보다 더 높다고 생각할 때에 거만함이 싹튼다.

내가 더 높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요소는 무엇이던가?
1. 부(돈)이다.
2. 계급이다. 교회에서는 직분일 것이다.
3. 타고난 성품이기도하다.

1. 돈이 많은, 부한 자들은 거만해지기 쉽다.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딤전6:17, 개역한글)

마음을 높이는 것을 '교만'이라 할 수도 있겠으나!
그 높은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낮추어 보고 깔본다면 그것이 거만함이다.
교회 안에는 자신의 부유함으로 다른 사람을 낮추어 대하는 사람이 의외로 있다.

교회 안에 가난했던 한 사람이 있었다. 가난이 그 사람에게 큰 콤플렉스였다. 그러다가 어떠한 계기로 그가 갑자가 부유해진 것이다. 그 날부터 그 사람은 교회 안에 기피대상이 되었다. 이사람 저사람에게 간섭을 하고 큰소리를 쳤다. 조금이라도 자기에게 섭섭하다고 느껴지면 '감히 나에게'라는 태도를 보이며 호통을 쳤다.  교회 사람들 중 누구도 그에게 가까이 가려 하지 않았다. 심지어 동네에서도 그에 대한 소문이 좋지 않았다. 그는 가난했을 때보다 더 고립되었지만, 그 사람은 자신의 비참함을 알아채지 못했다.
"거만한 자는 지혜를 구하여도 얻지 못하거니와 명철한 자는 지식 얻기가 쉬우니라" (잠14:6, 개역한글)

2. 계급이 높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만해지기 쉽다.
특히 직분이 높은 사람들이 그렇다.

어떤 대형 교회의 성도가 은혜를 받고 지역에서 전도지를 열심히 돌리고 있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 교회의 장로에게 전도지를 주게 되었다.
거만한 그 장로는 어떻게 반응했을까?
역시나 그 성도에게 호통을 쳤다.
'감히 나를 알아보지도 못하느냐?'고.
그 일로 인해 그 성도와 가족은 교회를 떠났으나, 그 장로는 그 사람이 교회를 떠났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고 신경도 쓰지 않았다.

3. 타고난 성품이 있다.
돈이건, 계급이건, 무엇이든지 자기가 남보다 높다고 생각하면 그것으로 남을 깔보거나 함부로 대하는 태도를 보이는 사람이다.

교회의 한 장로는 본래 작은 차를 타고 다니던 사람이었다. 그러다 한 번은 외제차를 타는 사람과 실랑이를 벌였고 그에게 망신을 당했다고 생각했다. 그날로 바로 외제차를 타더니 아무데서나 자기 앞에 방해가 된다 싶은 차량에게는 있는 힘껏 클락션을 눌렀다. 심지어 교회 주차장에서도 그러다가 지역 주민하고 크게 싸우고 교회가 곤란을 겪게 되었다.

어떤 이유로건!
거만한 사람의 거만한 태도 때문에!
교회가 얼마나 큰 상처를 입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거만한 사람의 또 하나의 특징은!
상대방이 상처를 받던 어떻게 되던 신경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목회자로서는 뭐라 할 수도 없고 난감하다.
왜냐하면,
이런 사람은 자신의 거만함을 지적하는 사람을 못견뎌 한다. 자기가 제일 잘하는 줄로 착각한다.
책망을 해서 소용이 있는 사람에게 책망하지 않겠는가?
잠언은 거만한 사람의 특징을 이렇게 말한다.

"거만한 자를 징계하는 자는 도리어 능욕을 받고 악인을 책망하는 자는 도리어 흠을 잡히느니라" (잠9:7, 개역한글)

거만한 자를 건드리면 건드리는 사람만 손해를 본다는 거다.

"거만한 자를 책망하지 말라 그가 너를 미워할까 두려우니라 지혜 있는 자를 책망하라 그가 너를 사랑하리라" (잠9:8, 개역한글)

그래서 성경도 거만한 자를 '책망하지 말라' 한다.
이게 뭔줄 아는가?
'유기'다
'버려두라'는 거다.
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이라 나는 교만과 거만과 악한 행실과 패역한 입을 미워하느니라" (잠8:13, 개역한글)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잠16:18, 개역한글)

거만한 자는
누구보다 하나님이 미워하신다.
거만한자는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된다.

그러니!
거만한자여!
알아서 깨달으라!
거만한자여!
누구도 당신에게 '당신은 거만하다'고 말하지 않을테니!

- 주변의 사람들이 나를 슬슬 피하지는 않는지
- 나를 어려워하지는 않는지
- 내가 어떤 식으로 화풀이를 하는지
이런 것들을 스스로 살피면서!

스스로 거만함을 깨달으라!
그리고 회개하라!
악한 성품을 버리라!
그렇지 않으면...
'내가 망하는 줄도 모르는 채로 망하게 될 것이다'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빌2:3, 개역한글)

모든 사람이 '나보다 나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라!
어린 아이라도, 나보다 가난하고 별 볼일 없는 사람이라도 '나보다 나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라!
그렇게 관계를 새롭게 해보라!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깨닫는 은혜를 주시기를,
그리고 예수님의 성품 '겸손'을 배워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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