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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엔 책의 세번째 파트 '걷다'이다.

사실 이 파트는 읽으면서
크게 감흥이 있지는 않았다.

모든 종교와 철학의 지도자들이
걸으면서 새로운 길을 열었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예수님의 사역 역시도
걸으면서 일어났다고 말한다.
그러고보면
예수님은 스스로를 '길'이라 하셨다.

예수님은 걸어서 사람들을 찾아가셨고
마지막 십자가를 지실 때도
골고다의 언덕 길을 오르셨다.
그런 의미에서!
'어쩌면'
걷는 것이
예수님의 길을 따르는 방편이 되지 않겠는가?

예수께서 걸으면서
만나는 사람들을 고치셨고, 가르치셨고,
회복시키셨다면,
교회 역시도
걷다보면!
교회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또한!
영적인 배고픔을 가진 사람들도!
걸어서 교회에 오고
걸어서 말씀을 배우고
걸어서 심방 하며!
길에
그리스도인의 자취를 남겨야 하지 않을까?

최근 '순례의 걷기'가 유행하는 것도
그런 인간의 본성이
작용하고 있는 건 아닐까?


이로서
'교회는 지금 대사회적 복지'로
'먹다' '듣다' '걷다'의
세가지 동사들을 다루었다.

개인적으로는
'먹다'와 '듣다'는 공감이 되었지만,
마지막 '걷다'에는 마음이 가지 않았다.
그럼에도!
신학을 공부하지 않은 사람이
이렇게까지나 기독교의 핵심을
꿰뚫는 데는 감탄을 금치 못하겠더라.


여기서 나눔을 위한 질문들

1. 얼마나 걸으세요?

2. 걸음을 통해서 효과(효능?)를 본 일이 있나요?

3. 꼭 걸어보고 싶은 길이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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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질문은 '듣다' 파트이다.

기독교의 상징은 하나님의 말씀을 '빵'에 비유한다.
그것이 '빵'이라면 그 말씀을 '먹는 자'가
영생을 얻는다고 한다.

이것을 인간의 실존으로 이야기 해볼까?
'빵'으로 이야기하면 '먹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야기하면
'듣는 것'이다.

교회의 '복지'는
'먹는 것'에 이어서!
'듣는 것'으로 나아가야 할 이유이다.


작가가 먼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듣는 것'이 우선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마르다와 마리아 이야기이다.
마르다는 예수님을 접대하기 위해
열심히 음식을 준비하고 일하는 중이다.
그와중에!
마리아는 앉아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다.
마르다 입장에서는 속상할 노릇이다.
언니는 이렇게 고생하는데
이 동생은 어찌 저리 철이 없단 말인가!
게다가!
고대 사회에서 여자는
앉아서 말씀을 들을 입장에 있지 못했다.
마땅히 음식을 준비해야 옳았다.

마르다는 예수님께 고자질한다.
"예수님! 마르다에게 너도 일좀 하라고
이야기좀 해주시죠!"

예수님의 대답은 무엇인가?
누가복음10:41,42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봉사'와 '듣는 일' 중의 '취사선택'이 아니다.
적어도 '말씀을 들을 때'는
봉사의 일을 내려 놔야 한다는 것이다.
봉사에 치우쳐서
하나님의 말씀을 먹지(듣지) 못하게 되는 것은
영적 기근을 초래하는 일이다.

1. 마르다의 경험을 비추어
요즘 내 마음을 분주하게 하는 일은 무엇인가?
그것이 말씀보다 앞서 있지는 않은가?

2. 요즘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에 들어오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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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인 말씀이 육적인 필요보다 앞서는가?"
이 질문에서 출발해야 한다.
무엇이 영원한 생명이고, 진짜 삶이고,
행복인지 찾아야 한다.
이 질문을 해결하고 출발해야 계속 교회에 나온다.

교회의 복지 역시 이 점을 염두해야 한다.
교회가 사회를 위해 벌이는 많은 사역이
과연 무엇을 위한 것인지 점검해야 한다
(p.111)

교회가 사회를 위해 너무 많은 일을 하려고
들지 않았으면 한다.
우리에게 제일 급하고 중요한 것은
정치 경제가 아니고 생명인 것이다.
생명을 놓치면 세상을 놓친다.
그리스도인의 생명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데 달려 있다.
(p.113)

예수님을 영접한지 얼마 되지 않으신 분이
이토록이나 기독교의 진리를
꿰뚫어 볼 수 있다는게 놀라울 뿐이다.
심지어 신학을 하는 교수들 중에도
교회의 대사회 복지를
'먹는 것'에 방점을 두는데
이분은 진정한 '먹음'인
'말씀 들음'을 말하고 있다.

다시 한 번 감탄해 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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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경건서적 독서모임'으로 준비한 책은
'내면 세계의 질서와 영적 성장' - 고든 맥도날드
이다.
이 책은 어렸을 때?
20대일 때 읽었던 책이고
내용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굉장히 여운이 컸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얼마 안되어서
이분이 성?적으로 어려움을 겪었고
오랜 시간 자숙하다가
어느날 복귀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리고 이번에
경건서적 독서모임을 하려고 알아보니
이 책이 다시금 스테디셀러에 올라 있었다.
'다시 한 번 보면 어떤 느낌일까?' 싶어서
다시금 책을 들었다.


이 책은
'공적 세계' 즉 우리 일상의 삶을 위해서
'내면 세계' 자신의 영혼을 희생하고 있지는
않은지...
스스로 돌아보라고 묻고 있다.
요즘 유행하는 '워라벨'이
'워킹, 라이프 밸런스'라면
이 책은
'스라벨'
'스피릿, 라이프 밸런스'를 묻고 있는 거다!

내면 세계의 질서가 무너지면
'싱크홀'과 같은 문제가 발생한다.
지하수가 사라지면서
지반을 지탱해야 할 공간이 생기고
곧장 지반이 무너지게 된다.
내면세계의 질서가 무너지면
우리가 쌓아놓은 삶의 지반이
역시나 무너지게 된다.

읽으면서 떠오르는 질문들을 기록해보자.

"1장 싱크홀 증후군"

1. 바쁘게 살아오면서 자신의 내면 상태를
깊이 돌아본 기억이 있는가?

2. 내가 되고 싶었던 인생을 지금 살고 있는가?

3. 모든 것이 잘 되고 있는 순간에
불안하고, 공허한 마음이 들었던 때가 있는가?

4. '내면 생활을 정비하는 시간을
규칙적으로 가지고 있는가?'
(양이 아니라 질에 대한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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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4장에서
예수님은 승천할 것을 말씀하시면서
'보혜사'를 보내주신다고 약속하신다.


이 때 예수께서는
16절에서
"또 다른 보혜사"를 주신다고 한다.
여기서 '또 다른'이라는 말은
원래 보혜사가 있다는 것이고,
원래의 보혜사는 예수님이다.

즉, 보혜사이신 성령이 하시는 일은
원래 보혜사이신 예수께서 하셨던 일
이라는 것이다.

이 일에 대해서 몇가지 생각해 볼 것이 있다.

'보혜사'란 무엇인가?
한문으로 풀어보자면
保惠師이다.
'지킬 보, 은혜 은, 스승 사'인데,
지키시고, 은혜 주시고, 가르치시는 분
이라는 것이다.
헬라어로는
파라클레이토스인데
법정용어이고
영어로는 카운셀러로 번역된다.
우리로 치면 '변호사'라고 할 수 있을까?

그러나 오늘날의 일반적인 변호사와는
결이 다르다.
고대사회의 변호사는
변호비용을 받으면 맡은 건만 처리하고
끝나는 변호사가 아니었다.
그야말로 함께 하면서, 지켜주고, 보호해주고
멘탈케어도 해주는 든든한 존재였다.

지키고, 은혜주고, 가르치는
한자에서 말하는 내용들을
한꺼번에 수행하는 존재가 '보혜사'라는 것!

예수께서 제자들과 그렇게 함께 하셨고!
이제 성령께서 믿는 모든 사람과 함께 하신다.

이는 이후 고난 받는 모든 성도들에게
큰 위로가 되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받은 박해는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뿔뿔이 흩어져서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하고
붙잡히면 부당한 재판을 받아
결국 사자의 밥이 되었는데...

그럼에도 그들은 외롭지 않았다.
'보혜사'가 계셨기 때문이다.
함께 하시면서
보호하시고, 은혜로 채우시고,
가르치시는!
그분 안에서
모든 성도는 기꺼이 고난을 이겨낼수 있었다.

여기서 또 한가지!
'또 다른' 보혜사라 함은!
예수님 역시 보혜사이시며,
예수님과 성령님은 한 분임을 나타낸다.
그래서
18절에서는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보혜사 오심을 '내가 오리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바로 앞에 있는
성부와 성자의 관계에 이어져 있어 흥미롭다.
빌립이 '아버지(하나님)'을 보여달라 했을 때,
예수님은 9절에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예수님과 하나님은 한 분 이라는 것!

이로서!
요한복음 14장은!
그 자체로서
'삼위일체'의 진리를 보여주고 있다.
'또 다른' 보혜사라는 말에
엄청난 신학이 담겨 있었던 것이다.

자!
오늘 우리에게도 '보혜사' 성령님이 계신다.
믿어지시는가?
믿어지는 것!
이것 역시 성령의 하시는 일이다.

26절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그러므로!
힘든 세상을 사는 우리는
오늘도 '성령 충만을 구해야 한다'
주님은 약속하셨다.

누가복음 11:13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오늘도 성령 충만을 구하며 살자!
보혜사의 도우심을 입어
일어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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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 지역에서 시작된 교회가 짧은 시간에 유럽 전역으로 퍼져 간 가장 큰 이유는 ‘박해’였다.

[행8:1] 사울은 그가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있어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행8:4]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

놀랍게도 기독교는 박해를 받을 수록 오히려 더 확산되고 커져 갔던 것이다.
카르타고의 교부 터툴리안은 이렇게 말한다.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다”


유다의 박해 때문에 로마로 퍼진 교회는
이번엔 로마로부터 박해를 받게 된다.

그런데!
교회가 박해 받는 이유가 어처구니 없다.

첫째. ‘무신론자’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인정하지 않았다. 어떤 형상도 만들지 않았다. 무엇보다 황제를 신으로 추앙하지 않았다.
수많은 신을 섬겼던 당시 사람들에게, 무엇보다 신격화 되어 숭배를 받던 황제에게!
형상을 섬기지 않는 이들은 그저 정신나간 무신론자일 뿐이었고, 황제 숭배 거절은 체제 위협의 대상이 되었다.

둘째. 근친상간을 조장한다. 이들은 서로를 ‘형제, 자매’라고 불렀다. 동시에! 불신자와의 결혼을 거부하고 신자들간의 결혼을 장려했다.
형제 자매라 부르면서 자기들끼리의 결혼이라니!
그들이 보기에 그리스도인들은 윤리적으로 타락한 자들이라고 판단했다.

셋째. 식인을 즐긴다. 그리스도인들은 모일 때마다 성찬식을 했는데, ‘이것은 내 살’이고 ‘내 피’라는 선언과 함께 먹고 마셨다.
교회 밖에서 듣기에 이러한 선언은 ‘식인을 즐기는 행위’로 비쳤고 이것이 박해로 이어졌다.

무엇보다 ‘네로 황제’가 기독교 박해의 큰 도화선이 되었으니,
주후 64년 로마의 대화제로 도시의 대부분이 소실되었을 때,
황제를 향했던 원망의 화살을!
기독교인에게 돌렸던 것이다.
이로서 대 박해가 시작되었다.

로마 역사가 타키투스의 ‘연대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어떤 자들에게는 짐승 가죽을 입혀 개들에게 찢겨 죽게 했고
어떤 자들은 십자가에 달거나 불태워 죽였고,
날이 캄캄해지자 횃불로 사용된 이들도 있었다…
사실상… 한 사람의 잔인성을 만족시키기 위해 고통을 당했다.”

네로의 박해가 얼마나 끔찍했는지
당시의 사람들은 네로를 요한계시록에서 말하는 ‘짐승의 숫자 666’이라고 믿기까지 했다.
실제로 네로를 ‘게마트리아’라는 문자를 숫자화 한 조합으로 계산하면 666이 된다.

네로 황제의 박해 이후로
기독교인은 공공연히 황제들에게 박해거리가 되었다.
교회사에서는 로마에서 일어난 박해의 횟수를 10회로 간주한다.
‘네로, 도미티아누스,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막시미누스, 데키우스, 발레리아누스, 디오클레티아누스’

도미티아누스 - 자기를 신이라 주장했는데, 그리스도인들은 단호히 황제 숭배를 거절했고,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죽었다.
이 때에 그리스도인들은 ‘지하 무덤으로 숨었는데’ 이를 ‘카타콤’이라 한다.

트라야누스 - 황제 숭배를 강요하며 그리스도인 탄압.
이 때 사도 요한의 제자인 안디옥 감독인 이그나티우스가 순교.
교회 전승에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천국이 이런 어린아이의 것’이라 말씀하셨을 때 친히 품에 안으셨던 아이였다고.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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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앞에서 '이혼'이 가능한가?

결혼식장에서 남녀는 '혼인 서약'을 한다. 

그 내용은 어쨌거나 죽을 때까지, 평생 

서로를 버리지 않고 함께 하겠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실제로 살아보면 그게 쉽지 않더라.

결혼을 하고 실감하는 것은

'왜 사람들이 이혼하는지 알겠다'는 마음이랄까?

그런 위기들을 넘기며 사는 것이 

어쩌면 결혼생활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성경은 '이혼'을 어떻게 말하는가?

결혼의 원리에 대해 가장 명확하게 

나오는 곳은 예수님과 바리새인의 대화에서다

이혼에 대해 묻는 바리새인에게 

예수님은 이리 말씀하신다.

 

마가복음 10:9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더라"

 

결혼관계는 '하나님이 짝지어주신 관계'이다.

'사람이 나누지 못한다' 했다. 

즉, 서로가 합의 했어도, 

법원에서 이혼 도장을 찍어도...

인간적인 어떤 행위나 행정력이 있어도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여전히 '부부'라는 것!

 

하나님 앞에서 이혼이 성립되는 것은!

상대방이 죽었을 때 뿐이다. 

결혼 관계는 '죽을 때까지' 유지되는 관계다.

 

로마서 7:2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 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나느니라"

 

자, 이러하다면!

어떤 사람이 이혼하고

전 남편이 살아 있는데 

재혼을 한다? 어떻게 되겠는가?

 

로마서 7:3
"그러므로 만일 그 남편 생전에

다른 남자에게 가면 음녀라"

 

오늘날 이혼과 재혼이 빈번해 진 시대에

이런 말씀은 두렵기 짝이 없다.

 

오직!

재혼을 하고자 한다면!

상대방이 죽은 이후 뿐인 것이다. 

 

로마서7:3하

"...그러나 만일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자유롭게 되나니 

다른 남자에게 갈지라도 

음녀가 되지 아니하느니라"

 

고린도전서 7:39
"아내는 그 남편이 살아 있는 동안에

매여 있다가 남편이 죽으면

자유로워 자기 뜻대로 시집 갈 것이나

주 안에서만 할 것이니라"

 

이것이 성경의 원리이다. 

 

물론!

이혼하고 재혼했다고 해서 

지옥에 가는 것도 아닐 것이다.

술담배 한다고 지옥가는 것 아니고,

도둑질 했다고 지옥 가는 것 아니고,

거짓말 했다고, 미워했다고, 

이런 저런 죄를 지었다고...

지옥 가는건 아닐터다. 

 

우리 구원의 유일한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는 믿음이다.

 

그럼에도.

구원 받았다는 사람이

천국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뜻에 

민감하지 못하고

그저 나 자신의 상황과 필요에만 

치우쳐 있다면

하나님 앞에서 옳은 일일까?

 

예수님 시대에도 이혼은 있었다. 

모세도 이혼증서를 떼주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마가복음10:5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마음이 완악함으로 말미암아 

이 명령을 기록하였거니와"

 

이런 일들이 있다고 해서

그게 옳은 건 아니라는 거다.

인간의 완악함을 나타내는 증거일 뿐!

자!

하나님 앞에서 완악한 자로 

살아서야 되겠는가?

 

이미 이혼을 한 사람도, 

재혼을 한 사람도,

하나님 앞에서 죄인임을 고백해야 할 것이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거기에 함몰되어

어둡게 살라는 것은 아니다.

누구나 잘못이 있고, 죄인으로 산다.

용서 받은 죄인으로서!

여전히 기쁨으로 살아가되!

 

예수께서 어떤 여인에게

말씀하신 바와 같이 

요한복음8:11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

그 죄가 반복되지 않도록!

살아가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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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41장

하나님께서는 열방을 재판의 자리로 부르신다. 

 

1절 "섬들아 내 앞에 잠잠하라

민족들아 힘을 새롭게 하라 

가까이 나아오라 그리고 말하라 

우리가 서로 재판 자리에 가까이 나아가자"

 

재판의 주제는 

"누가 참 신인가?"이다. 

 

하나님께서는 친히 자신을 증거하신다.

무엇으로?

'미래에 있을 일들을 미리 보여주심으로'

그것도 100년 후, 200년 후에 있을 

미래의 사건들이다. 

 

이사야 39장까지에서는!

하나님께서 15년 더 살게 된 히스기야에게

'유다가 바벨론에 망하게 될 것'을 말씀하셨는데...

이미 이 말씀부터가 엄청난 예언이어다.

 

왜냐하면 이 당시에 세계의 지배자는 

앗수르였고, 바벨론은 그리 대단치 않았기 때문!

그랬는데, '유다가 바벨론에 망한다니' 

이미 여기서부터 믿을 수 없는 일이었으나

100년후에 실제로 그 일이 일어났던 것이다. 

 

물론, 이정도의 일은 '우연의 일치'라 할지 모른다.

그래서다. 

하나님께서는 유다가 바벨론에 망한뒤

70년뒤에 유다 포로를 회복시킬!

한 사람의 '이름'을 알려주신다. 

 

"바사왕 고레스"

 

이사야 44:28
고레스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내 목자라  그가 나의 모든 기쁨을 성취하리라

하며 예루살렘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중건되리라 하며 성전에 대하여는

네 기초가 놓여지리라 하는 자니라

 

이사야 45:1
여호와께서 그의 기름 부음을 받은

고레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그의 오른손을 붙들고

그 앞에 열국을 항복하게 하며

내가 왕들의 허리를 풀어

그 앞에 문들을 열고
성문들이 닫히지 못하게 하리라

고레스가 나타나기 200년 전에!

이미 그의 이름을 말씀하신다. 

또한 그가 어떻게 세계를 지배할지도

그 방법까지도 알려주신다. 

'왕들의 허리를 풀어 

그 앞에 문들을 연다' 하는데!

바벨론의 마지막 왕 벨사살의 폭정 때문에

고레스가 선전포고를 하자 

고레스에게 속한 성주들이 일제이 

성문을 열었다고 한다.

 

오늘 41장에서 이름까지는 알려주지 않지만

명백히 '고레스'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2절 "누가 동방에서 사람을 일깨워서

공의로 그를 불러 자기 발앞에 

이르게 하였느냐 

 열국을 그의 앞에 넘겨주며 

그가 왕들을 다스리게 하되..."

 

과연 이러한 신이 있을것인가?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4절 "이 일을 누가 행하였느냐

 누가 이루었느냐

 누가 처음부터 만대를 불러내었느냐

나 여호와라 

처음에도 나요 

 나중 있을 자에게도 내가 곧 그니라"

 

그리고 이러한 일들은 

역사가 요세푸스의 글이 그대로 남아있다.

 

하나님은 만군의 주요 만물의 주관자이시다.

반면에!

인간이 섬기는 우상은 어떠한가?

 

7절"목공은 금장색을 격려하며 

 망치로 고르게 하는 자는 메질꾼을 격려하며

이르되 땜질이 잘 된다 하니 

그가 못을 단단히 박아

우상을 흔들리지 아니하게 하는도다."

 

하나님은 인간을 인간을 세우시는 분이다.

우상은? 인간이 세워줘야 하는 것이다.

 

"누가 참 신인가?"

하나님의 백성은 누구를 의지해야 하는가!

 

이 하나님이

버러지처럼 진토에 놓인

자기 백성에게 말씀하신다. 

14절 "버러지같은 너 야곱아,

너희 이스라엘 사람들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너를 도울 것이라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이니라!"

 

어떠한 시대를 살지라도

하나님의 백성이 의지해야 할 것은 

분명하다!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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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2:1-10

 

1 사흘째 되던 날 갈릴리 가나에 혼례가 있어 예수의 어머니도 거기 계시고

2 예수와 그 제자들도 혼례에 청함을 받았더니

3 포도주가 떨어진지라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이르되 저들에게 포도주가 없다 하니

4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5 그의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

6 거기에 유대인의 정결 예식을 따라 두세 통 드는 돌 항아리 여섯이 놓였는지라

7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즉 아귀까지 채우니

8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하시매 갖다 주었더니

9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도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 온 하인들은 알더라 연회장이 신랑을 불러

10 말하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하니라

 

 

1. 물이 포도주로 바뀐 사건에 대하여.

 예수님의 첫번째 기적이었다. 예수님은 어머니 마리아와 결혼 잔치 자리에 참석하시게 되는데, 이럴 수가 잔치에 포도주가 떨어진 것이다. 당시 포도주가 모자란 것은 주인의 큰 수치였고, 잔치의 비용을 신랑의 가족이 부담해야 했는데, 신부 가족이 신랑 가족을 고발할 수도 있었다. 

 이런 위기의 상황에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예수님께 이 상황을 고했고, 예수님은 손씻는 물두멍에 물을 채우라 하셨고, 그 물은 최상품의 포도주로 변하여 잔치의 위기를 모면하게 되었다.

 

2. 이 사건의 의미들을 알아보자.

 이 사건의 전체 의미는 '새 시대'이다. '유대교'라는 옛 율법의 시대에서 '기독교'라는 복음의 새 시대가 열린 것이다. 물과 포도주가 다른 것처럼 새 시대는 옛시대와 완전히 다른 것이다.

 1절에 보면 '사흘 째 되든 날'이라 했다. 언제부터 사흘째인가!

 1장19절에 보면 '첫째 날'엔 요한의 자기 증언이 있었다. 

 1장29절에 '이튿날' 즉 '둘째 날'에 '예수께서 요한에게 나아오셨다.' 

 1장35절에서 '또 이튿날' 즉 '셋째 날'에 '요한은 두 제자를 예수님께 보낸다' 

 1장43절에 '이튿날' 즉 '넷째 날'에 나다나엘과 만나신다. 

그리고!

 2장1절 '사흘째 되던 날' 즉 '일곱째 날'에 예수님은 물을 포도주로 만드신다. 

 이 날은 안식일이었다. 

 즉, 옛 율법에 속한 안식의 날은 참된 안식을 주지 못함을 보여준다. 

 2장6절 유대인의 정결 예식을 위해 준비된 '돌 항아리'가 '여섯' 있었던 것을 보라!

 6은 불완전함, 또는 부족함을 뜻한다. 

 옛 유대교의 '정결법'은 그들을 정결하게 하지 못한다. 

 예수님의 오심은 그들을 정결하게 하심이었다. 

 그래서다!

 마리아가 잔치집의 문제를 예수님께 말했을 때!

 예수님은 3절 '내 때가 이르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여기서 '내 때'는 예수님의 십자가 지시는 때이다. 

 요한복음12:23, 27, 13:10, 16,32, 17:1절에 계속해서 '내 때'를 말씀하셨다. 

 그 때는 '십자가를 지시는 때'이다. 

 예수님의 때는 아직 오지 않았지만! 

 예수께서는 '물로 포도주를 만드사 문제를 해결하신다.' 

 

 예수께서 '때가 이르지 않았음에도' 기적을 행하신 이유!

 '십자가 지시는 때'를 나타내기 위함이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신다' 

 물로 상징되는 옛 시대는 막을 내리고, 포도주로 상징되는 새 시대를 여신다.

 

 예수님은 부족한 포도주를 채워주셨다. 

 이로서 예수님이 교회의 신랑되심을 보여주신다. 

 예수님은 마리아를 '어머니'라 부르지 않고 '여자여'라고 불렀다. 

 낮춰 부르는 것이 아니라 당대에 사용했던 '존칭'임에도

 '어머니'에게 쓸만한 표현은 아니다. 

 즉슨!

 이 '첫 표적'을 통해!

 예수님과 마리아 사이에 관계가 재 설정된 것이다. 

 

 가나 혼인 잔치는!

 새 날을 여시는 예수님의 선전포고와도 같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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