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사역을 하다보면!

'심지어 교인들 조차도' 

"우리가 헌금 하면 목사님들이 다 가지는거 아니에요?"라고 묻는 경우가 참 많다.

 

"그만큼 교회 재정이 공개되지 않았다"라고...

말하고 싶을 수도 있겠으나...

대한 민국의 25명 이상의 교회에는 '장로'가 있는 경우가 대다수이고, 

그렇게 '당회' 또는 '운영회'가 조직되며!

당회는 '제직회(직분자들의 모임:보통 3개월에 한 번씩 모임)'나

'공동의회(세례교인 이상이면 모이는 거의 전교인의 모임)'를 통해서!

재정 상황을 고지하게 되어 있기 때문에!

교회 재정이 '불투명 하다'거나 '공개되지 않았다'는 말은 

대다수의 교회에서는 옳지 않다.

 

사실 교인들 조차도 교회의 회의에 관심이 없고, 

회의를 한다고 해도 

예배가 끝나면 집으로 돌아가기 바쁘다보니 

'재정 상황'은 알 수가 없는게 당연하다. 

그러면서...

'교회 헌금은 목사님들이 다 가진다'고 생각하는 건 좀 아니라고 본다.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과는 많이 (꽤 많이) 동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특히나 '부교역자'에 해당하는 '부목사, 전도사' 들은 말도 안되는 박봉에 시달린다.

 

출처 https://m.blog.naver.com/lawfirmnow/222889108305

위의 도표는 2023년도 기준 '중위소득표'이다. 

4인 가구의 중위소득 100%는 540만원이다. 

그러니까 

540만원 정도를 받아야 

대한민국에서 중산층? 또는 안정적인 재정 운영이 가능하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 소득보다 높거나 낮으면 퍼센테이지가 달라지는데, 

아래의 표를 보면 이해가 빠르겠다.

 

출처 https://blog.naver.com/crown215/223092321348

즉, 4인가구인데 300만원 초반대 월급을 받는다면 

중위 60퍼센트 소득이 된다는 것이다. 

 

이정도 월급이면 어느정도인가?

2023년 최저 생계비를 살펴보자

출처 https://m.blog.naver.com/lawfirmnow/222889108305

4인가구 최처 생계비가 320만원이다. 

이 말이 무슨 뜻인가?

중위 소득 60%면!

최저 생계비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이 320만원이!

지금 내가 받고 있는 '사례비'이다. 

교회 사역으로는 20세 때부터 시작을 했고 

현재 27년째 사역중이다. 

물론 '목사'가 된 이후 사례로 생각하자면 14년차 부목사이다. 

그것도 한 교회에서 10년 정도 사역을 해서 이정도 사례비이다. 

참고로 5인가구이다. 

 

내가 적게 받는다고 떼쓰고 싶은 것이 아니다.

사실 내가 받고 있는 사례비를 

다른 비슷한 상황의 목사들에게 공개하면 

엄청난 부러움을 산다. 

 

왜냐하면!

부목사가 아닌 '담임목사' 초봉이 300만원 초반대이다. 

그것도 잘 받는 사람이 그렇다. 

내가 아는 '초임 담임목사들' 사례비는 270만원 정도이다. 

 

즉, 최저생계비도 안되는 사례를 받으면서 사역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나 나의 경우에는 감사하게도 한 교회에서 10년이나 있으면서 호봉이 올랐지만,

교회 사역의 특성상 

부교역자는 자주 교회를 옮겨야 하는데, 

교회를 옮기면 대부분 그 교회에서 정한 사례비 체계를 따라야 하기에 

호봉 따위는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그저 해당 교회에서 정한 초봉에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 

 

부목사의 초봉 사례비도 천차 만별이다. 

대부분 240만원에서 270만원 선이다. 

그 이상으로 주는 교회는 그리 많지 않다. 

 

전도사 사례비는 어떠한가?

교육전도사 사례비는 90만원~120만원이다. 

신학대학원을 다닌다면 학비의 반액을 지원해준다.

거의 대부분의 교회가 이렇다. 

어떨 것 같은가?

나는 신학대학원을 다니면서 

식사비를 충당하지 못해서 점심시간에 수돗물 마시는 전도사님들을 참 많이 봤다.

전도사에 대해서는 이정도만 하자.

왜냐하면 이 때에는 가정이 없거나 '신혼부부' 여서 부담이 크지 않을 뿐더러,

아직 '부양'의 책임이 덜하기에 '사명'을 이야기할만 하기 때문이다.

 

목사가 되고 연차가 오르면 '부양'의 무게가 점점 더 커진다. 

아이를 하나하나 낳고, 아이가 자라가면서!

재정적 부담이 커져간다. 

그렇다고 해서 투잡을 뛴다는 것도 쉽지가 않다. 

수요예배, 금요기도회가 있고 새벽기도가 있다. 

그 예배의 '설교'도 해야 한다. 

'설교'라는게 그냥 성경 한구절 읽고나서 '떠오르는 생각'을 떠드는게 아니다. 

성경을 연구해야하고, 원고를 구성해야 하며, 예화라든지 적용이라든지... 

종합 예술이라 생각될 정도로 고된 작업이다. 

- '했던 말 또 한다'는 말이 나오면 목회에 위기가 온다. 

- '성경구절 읽고' 떠드는 수준의 설교는 교인들도 다 안다. 

- 교인들은 설교 수준이 떨어지는 걸 원치 않는다!(그건 목회자가 더 원하는 바다)

사실상 주일 대예배 설교를 한다면 '한 주'만으로 설교 준비가 다 되지 않는다. 

그건 그야말로 

일과시간에도 설교준비만 할 수 있는 여유있는 목사님에게 해당되는 것이다.

대부분의 부교역자들은 '퇴근 이후에' 설교를 준비한다. 

설겆이도 해야 하고, 아이들도 씻겨야 하고, 청소, 빨리도 해야 한다. 

그러고 나서 설교준비다. 

새벽기도에 나가기 위해서 새벽 4시 30분에 일어나는데, 

그 전에 잠드는 시간은 새벽 1시~2시인 것이 부지기수다.

목사님들이 '간암'으로 돌아가신 분들이 많은 건 이런 이유가 많다고 한다.

 

투잡? 꿈이다. 

사모가 일하면 된다고?

교회 문화가 쉽지 않다. 

이 이야기는 다음에 기회가 되면 하자. 

 

어쨌든!

부목사의 사례비, 월급... 

그정도이다. 

10년 전에 지금 있는 교회 이전의 교회에서 

부목사 초봉이 120만원이었다. 

내가 그 교회 떠날 때 '현실을 반영하겠다'고 해서 들어보니 150만원이 되었다고 하더라...

 

과연!

교인들이 하는 헌금을 목회자들이 다 가진다는 말이 정당할까?

특히나 부교역자들에게 그런 이야기를 하는게 얼마나 큰 상처인지 알기나 할까?

 

사명이니까 돈 생각하면 안된다고?

사명 감당 할 수 있도록!

교회가 도울 수 있다고 생각하는게 맞지 않을까?

만일에 '가톨릭'이나 '불교'처럼 홀홀단신이고 '부양가족'이 없다면 상관 없을 것 같다.

그러나 목사는 다르다!

사도바울은 자기 제자인 목사 디모데에게 이렇게 말했다.

 

디모데전서 5:8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

목사는 교회를 돌보는 목자이면서,

가족을 책임져야 하는 가장이다. 

교회는 이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교회가 너무 작고, 재정적으로 약해서...

돕고 싶어도 도울 수 없는 교회도 있다. 

그런 상황에서는 목사도 감당해야 할 부분이 있을터다!

그러나 대부분 어느정도 재정적으로 자립한 교회는 이러한 책임을 생각해야 한다. 

 

'목사가 수억대 수십억대의 재산을 가지고 있다'는 식의 자극적인 언론기사에 

90%? 아니 98%의 그렇지 않은 목회자들까지 부당한 눈초리를 받게 된다. 

그렇지 않다. 

우리는 교인들이 낸 헌금을 독식하는 존재가 아니다. 

 

아이가 크면서 집에 들어가면!

아내가 이런 말을 한다. 

"첫째 아이가 영어 학원에 다니고 싶데요."

나도 내 자식 보내고 싶다...

영어학원...

728x90

-  내가 다니는 교회의 예배 질이 떨어져서
-  강단의 설교가 마음에 차지 않아서
- 교회의 누군가에게 시험 들어서

그외의 여러가지 이유로 예배를 폐하거나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하고있다면, 그 것 때문에 괴롭고 힘들다면

시편 중에서도 '다윗의 시, 곧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라는 제목을 곱씹어 생각해보자.

다윗은 십수년동안 성전에 올라가지 못했다.
다윗 당시에는 아직 성전이 세워지기 전이기 때문에, 성막에 가지 못했다고 보면 되겠다.
사울 왕이 다윗을 죽이려 쫓아다니는 중이다. 혹 성전에 가게 되면 바로 잡힐 텐데 어찌 갈 수 있겠는가?
그야말로
'어쩔 수 없이' 예배 드릴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다윗의 마음은 항상 성전(성막)을 향해 있었고, 언제든지 성전에 달려갈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다윗의 마음을 기뻐 받아주셨고, 그의 시를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가 되게하셨다.

우리는 어떤가? 혹... 정말 생명이 달린 문제 때문에 예배에 나오지 못하는 경우도 있을터다. 그렇다면 '성전을 고대했던' 다윗을 기억하자. 다윗의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고 또 찾자...
그러나 그렇지 않다면, 그저 개인적 나태함으로 인해 또는 이런 저런 상황에 치어서 예배가 무너져 있다면 '성전에 올라가자'
예배의 자리를 찾아 가고, 찬송의 고백을 하며, 기도 하자. '주님 저 왔습니다.' 그리고 말씀을 듣자. 들어보자. 과연 그러한가 생각하고 고민하자. 예배 마무리 축도에 머리를 숙이자.
하나님을 사모하고 찾는 자를 하나님은 언제든지 맞이해주신다.

728x90

이번에 주례 부탁을 받았는데, 

요구 사항이 특이했습니다.

결혼식장 일정 때문에 예식 전체가 10분 이내에 끝나야 하고,

설교는 웬만하면 1분만에 마쳐주십사 했던 겁니다. 

 

우와! 

설교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한동안 고민하다가...

아래와 같은 내용으로 준비했습니다. 

 

-------------------------------------------------

 

"결혼은 한몸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아담과 하와가 인류 최초의 결혼식을 할 때였습니다.

 

주례자이신 하나님은 이렇게 선언하셨습니다. 

"이제 두 사람은 한 몸이다."

 

결혼을 통해서

두 사람은 한 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게 무슨 의미인지 잘 생각해보세요!

'둘이 한 몸이 되는 것'은

'사랑'을 통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결혼을 통해서 된다는 말입니다.

 

오늘 결혼하시는 두 분께서는!

'사랑해서' 결혼하는 것이지만!

사랑이 결혼생활을 지속시키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오늘부터 시작되는 '결혼'이라는 관계가!

두 사람을 '사랑'을 지탱해 줄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이 짝지어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이혼도장도, 어떤 공권력도, 심지어 결혼한 당사자 조차도!

오늘의 결혼을 취소시킬 수 없습니다. 

이 결혼의 주도자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입니다.

두 사람이!

하나님께서 맺어주신 '한 몸'을 평생 지키고자 노력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죽음이 두 사람을 가르는 그 날까지' 

이 결혼을 복되게 하실 것이고!

결혼의 출발점이 '사랑'이었던 것처럼!

그 마지막도 '사랑이었다'고... 고백하게 하실 겁니다.

 

'한 몸'이라 했습니다. 

내 손, 발, 눈, 입, 귀... 그 무엇하나도 떨어뜨리지 않으실 거잖아요?

서로를 '내 몸'처럼 귀하게 여기시고!

'죽음이 두 사람을 가를 때까지'

'평생의 동반자'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아무래도 1분 넘겠네요..^^;;;

 

https://www.youtube.com/@user-vp3bt8zs1k/featured

 

성경 중심의 설교

최윤식 목사의 설교와 설교에 대한 고민을 공유하는 채널입니다. 총신대학교 신학과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www.youtube.com

 

728x90

큰 음녀에게 내릴 심판

 

요한계시록을 해석할 때에!

항상 염두해 둘 것이 있다.

바로 이 책의 제1 독자들이다. 

비록 성경이 모든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일지라도

성경의 기록은 

사도 요한이 기록했던 당시의

정황과 시대상을 토대로 나온 것이다. 

 

요한계시록을 받아들었을

초대교회 성도들은 

배움이 깊지 않았다. 

 

고린도전서1:26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이런 이들에게 복잡한 해석이 필요한 

(잘 못 해석하면 지옥가는)

편지를 썼을리 만무하다. 

 

요한계시록은 '그림책'이다. 

아무리 학문이 짧아도 누구나 이해하도록

기록한 책이라는 말이다. 

 

하늘을 나는 용이 나오고, 

입에서 불이 나온다느니...

이런 표현들 하나하다가 그림의 언어이다.

이 글을 통해 하나님이 하시려는 말씀은!

단순한 것이다.

"하나님이 이기신다"는 것이다. 

 

박해와 고난이 일상이었던 당시에!

이와같은 그림 언어로!

'승리'를 보여주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 일이었겠는가?

 

오늘날 '일곱머리 열뿔'이 

교황이네, 컴퓨터네, 무슨 교단이네...

이런 해석들이 분분한데, 

정작 2000년 전에 성도들과는 

상관이 없는 해석들이다. 

 

생각해보라!

당신은 서기 4000년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에 대해 관심이 있는가?

 

그렇게 보았을 때!

일곱머리 열뿔은

당시의 교회를 박해하던 '로마'이다.

분명 당시 로마는 '열뿔 달린 괴물'처럼

무서운 박해를 가했다.

그러나!

그의 뿔이 '열이든, 백이든, 천이든' 

결국 그 뿔은 뽑힐 것이요, 

하나님이 승리하실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적용할 것은 하나다!

교황이니, 베리칩이니, 세계정부 수장이니...

이런저런 말에 헛된 두려움에 빠지지 말고!

그 모든 것을 이기시고 승리하시는

그리스도를 더욱 바라봐야 할 것이다. 

 

본문 설교 링크

https://youtu.be/doVNhUEoIhE

728x90

"아빠, 아담과 하와는 천국에 갔나요?"

 

오늘 아침에 아이들이 물었던 내용이다. 

'그렇네... 아담과 하와는 범죄했고 예수님을 믿지도 않았는데

 과연 천국에 갔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답은? 

"물론이지!'

 

"에이! 성경에 그런 이야기가 없는데 어떻게 알아요?"

 

어쨌건, 이런 질문을 하는 아이들이 대견했고, 

목사 아빠로서 기분이 매우 좋았다. 

이럴 때는 빨리 답을 해주는 것이 인지상정.

 

우리가 구원 받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해서 죽어주셨기 때문이다. 

이것을 '대속'이라고 부른다.

 

하나님은 구약시대 내내 이 '대속'에 대해 알려주셨다.

어떤 이스라엘 사람이 죄를 지었을 때

소나 양과 같은 짐승이 대신 죽어서 

그 사람의 죄를 대신 하게 했다. 

 

물론, 짐승이 인간의 죄를 온전히 사할 수는 없다. 

짐승의 죽음은 

궁극적인 죄사함을 나타내시는 예수님의 예표이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했을 때!

그들은 자신들의 벌거벗음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자신에게 수치였다. 

이 수치를 가리기 위해 나뭇잎으로 

옷을 만들어 입었지만, 

바람이 불면 부스러져 수치를 가릴 수 없었다.

스스로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이 때 하나님이 그들에게 베푸신 은혜가 무엇인가!

창세기3: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가죽옷'을 만들기 위해서는 

어떤 짐승이 희생되어야 한다. 

피흘리고 죽어야한다. 

 

무슨 말인가!

하나님은 아담 하와에게

그들의 죄를 위한 대속의 예표를 보여주셨단 말이다.

즉, 아담과 하와는 

예표되신 예수님 안에서 죄사함을 받았다는 것이고,

구원 받고 천국에 들어갔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 아들 아벨은

처음부터 짐승으로 제사를 드릴 줄 알았을 터이다. 

창세기4:4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728x90

교회에서 사역하기 위해서는 

여느 취업과 마찬가지로 이력서 자기소개서 등

사역하고자 하는 교회에 제출해야 한다. 

 

만일 서류 전형에 통과 하면 

이차로는 면접을 하게 되는데, 

부목사의 면접의 경우에는 

담임목사 또는 기존에 있는 선임목사가 

면접을 진행하고, 

담임목사 면접의 경우에는

해당 교회의 담임목사가 이미 은퇴(또는 원로 추대)가 

된 상태이므로 임시 당회장과 

시무장로가 면접을 진행하는 경우가 많다. 

 

여기서는 담임목사 면접으로 진행하고자 한다. 

담임목사 면접의 경우 

장로의 주된 관심사는 

'숫자를 늘려줄 수 있느냐?'하는 것이다. 

비판으로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장로는 교회를 치리하는 주체로서 

해당교회의 지속적인 존재를 고민하기에 

'숫자'에 대한 생각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을 이해하지 못한채

'숫자에 꽉막힌 꼰대'로 대하면 

일단 면접에서는 떨어진다고 생각하면 된다. 

그만큼의 책임감을 가진 장로를 이해하는 마음!

그 마음을 가지고 대해보자.

훨씬 편안하게 면접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양보하지 못하는 진리의 영역이 있다.

숫자, 부흥은 '하나님의 영역'이다. 

그걸 인정하지 않고 숫자 불리기에 

열을 올리다보면, 기존 성도도 상처를 입고,

결국 담임목사 자신에게도 부매랑이 날아온다. 

 

그 사실을 분명히 하라!

"사람을 늘리고, 숫자를 많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역이라고 확신합니다."

 

그 다음이 중요하다. 

"그럼에도, 저는 숫자를 늘리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지 알고 있습니다." 

"물론 그렇게 한다고 해서 

100% 사람이 몰린다고 장담은 못하지만

이전의 사역에서 이러이러한 방법으로 했을 때

부흥을 경험했습니다."

라고 말함으로서

분위기를 자신의 것으로 가져와야 한다. 

 

 

또한 면접 보는 교회에 대해 미리 알아보는 센스도

필요하다. 

지역의 인구 분포라든지, 교회의 역사라든지, 

알 수 있을 내용은 파악해서

교회에 맞는 솔루션을 말할 수 있다면, 

굉장히 점수를 얻을 수 있다. 

 

자신이 지금까지 해왔고, 배워왔던 목회를 정리하고

어떤 방향의 목회를 하고 싶은지, 

최종적으로 목회를 통해 무엇을 이루고싶은지

구체적으로 답을 듣고 싶어 한다. 

이런 부분은 평소에 고민하며 생각해 두자. 

 

또한, 임시당회장이 주로 묻는 질문은 이렇다. 

기도생활은 어떻게 하며 얼마나 하는지

책을 어느정도나 읽으며 가장 감명깊은 책, 최근에 읽은책 등

그 내용을 알려달라고 할 수 있다. 

미리 준비되어 있다면 당황하지 않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면접의 분위기를 내것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질문에 끌려 다니다보면 

점점 더 식은 땀이 나는 상황으로 몰릴 수 있다.

면접의 질문이 점차로 쉬워진다면 

잘풀리는 것으로 생각하면 된다.

 

이러저러한 방법들이 있지만, 

면접이 끝났다면 

더이상 미련을 두지 말라!

그곳에서 사역을 하는 건 

전적으로 하나님의 영역이다. 

내가 아쉬워할 필요는 없다. 

다만, 이곳에서 사역을 하게 되든지 아니든지

다음에 혹시 올 기회를 준비하는 것이 지혜일 것이다.

728x90

교회에서 '목회자가 교인을 섬긴다'라는 말을 할 때,

'섬김'이라는 개념을 오해하는 모습을 보곤 한다.

 

교회 사무실에서 목회자가

교인의 팩스를 대신 보내주는 걸 섬김이라 하고, 

환우가 몸이 아파서 집이 지저분 할 때 

목회자가 가서 청소해주면 섬김이라고 한다. 

교인들이 모일 때에 

목회자가 사비를 털어서 음료를 사면 섬김이고,

예배 시간에 주보, 헌금 봉투 챙겨주면

그게 섬김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물론 이것도 '섬김'의 모습일 수 있다. 

그러나 

'목회자의 섬김'이라고 할 때!

'그 섬김'과는 거리가 많다. 

 

단도직입적으로 목회자의 섬김이란

'말씀을 전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성도들을 먹이는 것이

진정한 '목회자의 섬김'인 것이다. 

 

구약 시대 레위인 역시도 제사장 지파로서 

이스라엘을 섬기는 역할을 했다. 

여기서의 섬김 역시도 

이스라엘 백성들의 사소한 일들 까지 돌보는

일이 아니었다. 

제사와 희생 제물을 드리는 일들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를 맺게 하는 것,

그래서 백성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존재하도록 돕는 것,

그것이 그들의 '섬김'이었다. 

 

교회의 목회자도 마찬가지이다. 

성도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존재하게 돕는 

유일한 방법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여러 교회에서 여러 목회자를 모시면서

두 극단의 '섬김'을 경험했다. 

한 목회자는 '말씀 전함'을 '섬김'으로 정의 했고, 

또 다른 목회자는 '교인의 사소한 일들을 돕는 것'을 '섬김'이라 했다.

교역자들에게 각각의 스타일 대로 '섬김'을 요청했다. 

 

처음에는 '사소한 일들을 돕는 봉사'가 옳다고 나도 생각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목회자들의 소위 '사소한 봉사'를 받는 교인들은 

목회자를 점차로 '심부름 꾼' 그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많은 일을 시키려 들었고,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고 여겼으며, 

원하는 대로 조금이라도 해주지 않으면 

시험에 들었다느니, 내가 헌금을 얼마를 하고 있다느니,

짜증을 내거나 화를 내는 일이 적지 않았다. 

 

반면, '말씀 전함'을 '섬김'으로 여기는 교회를 보자. 

나는 '극단적'이라고 했다. 

그분은 오히려 교역자가 '사소한 봉사'를 하지 못하도록 하셨다.

심지어 교역자실을 '말씀 준비하는 공간'으로 

교인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무거운 거 드는 일이라든지, 청소같은 일 역시 

교역자가 '해서는 안되는 일'이었다.

대신에!

교역자들은 '말씀 설교'에 목숨을 걸어야 했다.

설교 메시지는 분명해야 했고, 

한 번 한 번의 설교를 위해 시간과 몸을 갈아 넣어야 했다.

설교를 제대로 하지 않았을 때는 불호령이 떨어졌다. 

어땠을까?

교인들은 

자신들의 '사소한 필요'를 채워주지 않는 것에 대해

어떠한 불만도 없었다. 

오히려 그런 일들은 교인들이 스스로 도맡으려 했다.

교회의 존재와 사역에 만족했고, 

교역자들을 존중해주었다. 

 

요한3서 1:2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목회에서의 '섬김'은 '영혼을 섬기는 것'이다. 

성도의 영혼을 섬기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다. 

 

여전히 교회의 교역자들은 

온갖 잡무에 피곤해 하는 것을 본다. 

행사 준비에, 교인들의 형편과 필요 채우는 일에, 

예배 숫자 늘리는 일에, 교회의 여러 행정과 사무에, 

대부분 '설교 준비'는 집에와서 밤늦게 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강단의 설교가 약해질 수 밖에 없는 구조이다. 

 

'섬김'의 본질을 다시 생각해보고 바른 섬김을 회복하는

교회를 세워보자.

 

728x90

내면세계의 질서와 영적 성장 2부~5부까지 한꺼번에 읽고 끝내려 한다.

2부 시간사용
시간을 잘 사용하는 것은 ‘내면세계의 질서를 세우는’ 중요한 요소다.
돈과 재정에 대해서 예산을 세우고 사용하지 않으면 항상 부족한 것 처럼!
시간 역시도 미리 계획하지 않으면 항상 부족함에 쫓기듯 살아갈 수 밖에 없다.
시간에 쫓겨 사는 사람이 ‘내면 세계’의 질서를 세우는건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무질서한 상태에 있는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거의 누리지 못한다.”p.134.
“한정된 시간에도 같은 원칙이 적용된다.
꼭 써야할 경상비와 하고 싶은 일에 소요되는 임시비를 철저히 구별해야 한다”p.136.
“어느날 나는 내가 가장 중요한 시간을 할애한 일들이 공통점을 가지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것은 혹 무시된다 하더라도 절대로 즉시 고함치지는 않는 일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면, 내가 영적 훈련을 소흘히 한다고 해서 하나님은 당당 고함치시지는 않는다.
나는 얼마동안은 그런대로 버틸 수 있다.
그리고 가족을 위한 시간을 할애하지 않았을 때도 가족들은 잘 이해하고 용서해준다.
가끔 즉각적 반응과 관심을 요구하는 일부 교인들보다 더 관대한 편이다.
비극적인사실은, 그것들이 너무 오래 무시되면 마침내 가족관계나 휴식 영적 훈련 등이 심각한 지경에 처하여 그 결과를 모면하기에는 너무 늦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p.160.

 

질문.

 1) 하나님과 만남의 시간은 얼마나 가지시는지요? 주로 언제?

 2) 내 시간의 우선순위는 주로 무엇인가요?

 3) 내 시간에서 '경상비'와 '임시비'의 비율은?

3부 지혜와 지식
뛰어난 운동 선수가 장거리 운동에서 페이스 조정을 실패하는 경우가 있다.
장거리 운동에서는 뛰어난 운동신경보다는 꾸준한 노력이 더 필요하다.
삶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타고난 명석함으로 인생의 초반에 잘 나가는 사람이 있지만, 책을 읽고 연구하면서 자신을 채워가지 않으면! 결국 마지막까지 달려나아갈 수 없게 된다.
마치 ‘한번도 읽히지 않은 위대한 책자’ 처럼! 겉모양은 훌륭하나 쓰이지 않은 것과 간다.

"지성은 사고하고, 분석하고, 혁신할 수 있도록 운련되어야 한다. 내면세계의 질서가 바로잡히 사람들은 사고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한다. 그들의 정신은 늘 깨어있고 활발하게 활동하며 매일 새로운 정보를 입수하며 정기적으로 새로운 발견과 결론을 창출해 낸다."p.174.

"다른 사람들의 비판에 귀 기울일 때에도 항상 성장이 이루어진다. 그렇게 하기란 어느 누구에게도 쉽지 않다. 네비게이토 창설자인 도슨 트로트맨은 자신에 대한 모든 비판을 잘 다루는 법을 터득했다. 아무리 공정하지 못한 비판처럼 보일지라도 그는 항상 그것을 기도의 골방으로 가지고 가서 주님 앞에 사실대로 털어놓곤 했다. 그러고 나서 '주님, 이 비판 속에 감춰져 있는 진실의 알맹이를 보여 주옵소서'... 나는 일말의 진리도 담겨 있지 않은 비판은 거의 들어보지 못했다. 어떤 진리는 아주 사소했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진리였다."p.202.

 

질문.

 1) 요즘 한참 배우고 있는 분야는 무엇인가요? '자기 분야'와 '비전공? 분야'

 2) 앞으로 배우고 싶은 것이 있다면?

 3) 다른 사람이 나에 대해 비판하는 말을 들었을 때 어떻게 받아들이시나요?

4부 영적인 힘
사실상 이 이야기를 하려고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한 것 같다.
인생의 모든 버팀목이 사라져버렸을 때!
그는 자신의 내면에서부터 그 힘을 이끌어내야 한다.
오직 ‘영적인 힘’만이!
그를 모든 어려움에서 버티고 이기게 할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어야 한다.
침묵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헤아릴 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잘 새겨야 한다.
찬송하며, 송축하며, 고백하라!
이러한 신앙의 기본기들을 회복하면서!
세상을 이길 힘을 내면에서부터 갖추어가야 한다.

"분명한 게 하나 있다 만일 우리가 영적 훈련을 쌓기로 결심하지 않는다면, 언젠가 하워드 러틀리지처럼 그러한 도전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을 후회할 날이 올 것이다."p.221.

"내면의 정원을 계속 돌보고 하나님의 영이 거기에 거하시면 꾸준히 수확을 거두게 된다. 그러면 어떤 열매를 수확할까? 용기, 희망, 사랑, 인내, 기쁨 평안 같은 것들이다. 자제력이라는 흔치 않은 능력, 악을 분별하고 진리를 찾아내는 능력도 거두게 된다."p.224.

"그리스도인이 흔히 무시하는 매우 중요한 다섯가지 영적 훈련 - 침묵과 고독 추구, 찬양, 규칙적으로 하나님께 귀기울이기, 사색과 묵상의 경험, 예배하고 중보하는 기도"p.232.

 

질문.

 1) 영적 훈련을 쌓기로 결정한 때는 언제인가요? 계기는?

 2) 그리스도인이 흔히 무시하는 다섯가지 영적 훈련중에서 내가 가장 약한 분야는?


5부 회복
이제 연세가 많은 작가는
자신의 인생에서 중요한 두가지를 제시한다.
하나는 친구들이다.
대문자F. 로 지칭되는 친구들은 무슨 이야기든 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자신의 잘못도 진심으로 지적해 줄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좋은 친구를 붙여달라고 기도하라.
또 하나는 ‘쉼’이다.
참된 쉼은 ‘여가’ 이상의 의미가 있다.
이는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접붙여 있어야하가는 것이다.

 

질문.

 1) F친구가 있는가?

 2) 참된 안식으로서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을 매주일 하고 있는가?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