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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이것만으로도 당혹스러운데!

하나님은 두번째 집에갈 부류를 말씀하십니다.

6절

"포도원을 만들고 그 과실을 먹지 못한 자가 있느냐?

그는 집으로 돌아갈지니 

전사하면 타인이 그 과실을 먹을까 하노라"

 

이것도 당혹스러은 일입니다.

표면적으로 보자면

수확한 포도 과실이야 

금방 집에서 가서 먹고 오면 될 일이잖아요?

그런거면 이런 조건에 나오지도 않았겠죠.

 

레위기19:23-25절을 보면

이 말씀의 진위를 알 수가 있습니다. 

먼저 23절

"너희가 그 땅에 들어가 각종 과목을 심거든

그 열매는 아직 할례 받지 못한 

'삼년 동안' 

너희는 그것을 할례 받지 못한 것으로 여겨

먹지 말 것이요!"

일단 3년간은 열린 포도는

그냥 바닥에 버려야 합니다. 

 

거기서 끝이 아니에요!

24절

"넷째 해에는 그 모든 과실이 거룩하니!

(이제 먹을 수 있겠나? 아니죠!)

여호와께 드려 찬송할 것이며"

4년 차 과실은 온전히 하나님께 드리라 합니다.

 

그리고 25절

"다섯째 해에는!

그 열매를 먹을지니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 소산이 풍성하리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여러분!

농사를 시작하고!

무려 5년이 지나서야!

그 과실을 먹을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농사 시작하고 5년이 아직 안됐냐?'

'전쟁터를 떠나서 집에 가라'는 거죠!

5년이나 되는데!

그 기간에 걸칠 사람들은 또 

얼마나 많을까요?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세번째 집에 갈 부류!

7절

"여자와 약혼하고

그와 결혼하지 못한 자가 있느냐?

그는 집에 돌아갈지니 

전사하면 타인이 그를 데려갈까 하노라 하고"

'약혼 한 사람도' 집에 가랍니다.

 

여러분...

약혼... 아직 결혼이 아니잖아요.

결혼이 얼마 남았든지

일단 약혼을 했으면 들어가라는 거죠.

군대 안가려고 마음 먹으면요!

여자 친구랑 계속 약혼 관계만

유지하면 되는 겁니다. 

이렇게 허술한 법이 어디 있겠어요?

게다가!

결혼 하잖아요?

결혼 한 사람에게도 혜택이 있습니다.

신명기24:5

"사람이 새로이 아내를 맞이하였으면 

그를 '군대로 내보내지 말것이요'

아무 직무도 그에게 맡기지 말 것이며

그는 '일 년 동안' 한가하게 집에 있으면서

그가 맞이한 아내를 즐겁게 할지니라"

결혼 한 사람은 또 1년 면제입니다.

 

와... 여기까지만 해도 

사람이 눈에 띄게 줄었을 겁니다. 

 

그런데...

마지막 집에 갈 조건을 보면요.

앞의 세가지 부류와는 차원이 다릅니다.

이거 하나면!

앞에 있는 이유도 

사실상 아무 필요가 없을지 모릅니다.

 

뭐라고 하세요?

8절입니다.

"책임자들은 또 백성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두려워서 마음이 허약한 자가 있느냐

그는 집으로 돌아갈지니...."

세상에!

전쟁이 무서운 사람은 집에 가랍니다.

 

전쟁 안 무서운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전쟁을 앞두고 이게 할 말입니까?

다 도망가버리지 않겠어요?

 

성경에 그 실 예가 있어요.

사사시대 기드온이라는 사람이

전쟁을 위해서 백성들을 소집했을 때!

하나님께서 실제 이걸 실행하셨습니다. 

 

사사기7:3

"이제 너는 백성의 귀에 외쳐 이르기를

누구든지 두려워 떠는 자는 

길르앗 산을 떠나 돌아가라 하라 하시니..."

자 여러분!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계속 보시죠.

"이에 돌아간 백성이 이만 이천 명이요!

 남은 자가 만명이었더라"

전체 3만 2천명 중에서!

2만2천명이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3분의 2 이상이 옳다구나! 하고

도망간 겁니다. 

이런 일이 벌어진다니까요.

 

그런데도!

하나님은 명령하시는 겁니다.

'위의 네가지 사항에 해당되는 

모든 사람은

다 집에 돌려보내라'

 

어쩌시겠다는 거에요?

몇명이 남든지!

그 남은 사람으로!

하나님이 싸우시겠다는 겁니다. 

 

그저 싸우는 것이 아니라!

그 소수의 사람으로라도!

이스라엘을 이기게 하시겠다는 거에요!

 

이게 하나님의 자신감입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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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20:1-9
 
하나의 구절에서 
'겁내지 말며, 두려워하지 말며,
떨지 말며, 놀라지 말라'라고
말씀하실 정도라면!
이 말은 
역설적으로 
'겁나고, 두렵고,
떨리고, 놀랄만한' 상황이란 걸
알 수 있습니다. 
 
어떠한 상황인가?
바로 '전쟁'입니다. 
최근 우크라이나나 가자지구에서
벌어지는 전쟁을 보면서
우리는 전쟁의 참상을 
실시간으로 목격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이런 일이 일어난다는 걸
상상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
 
이스라엘도 마찬가집니다. 
이제 가나안에 들어가면 
전쟁이 시작됩니다. 
피할 수 없는 정복 전쟁입니다.
 
그것도!
약자가 강자를 정복하는 전쟁입니다.
40년간 광야 생활 했던 이스라엘은
전투를 연습한 일이 없습니다. 
무기요? 말과 병거요? 
전쟁 할 수 있는 어떠한 도구도 
없습니다. 
 
그런데 적군은 어떻습니까?
40년 전 가나안 정탐을 다녀왔던
열 정탐꾼이 이렇게 보고했습니다.
 
민수기13:28
"그러나 그 땅 거주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고
심히 클 뿐아니라
거기서 아낙 자손을 보았으며"
32절 하~33절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거기서 네피림 후손인 아낙자손의 
거인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라"
 
이 보고를 듣고
사람들이 두려움에 빠졌고
믿음 없는 이 두려움 때문에!
이스라엘은 무려 40년간이나 
광야를 돌아야 했고,
20세 이상의 모든 사람이 심판받아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1절 말씀입니다.
"네가 나가서 적군과 싸우려 할 때에
말과 병거와 백성
너보다 많음을 볼지라도..."
 
 적들의 강대함은 여전합니다.
싸울만한 무기나 전력이 없는 이스라엘 입니다.
그들 입장에서 생각해보세요.
일방적인 학살을 당할게 분명한데
얼마나 겁이날까요?
얼마나 두렵고 떨리고
적들앞에 놀라게 될까요?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들에게 격려하십니다.
아니,
정확하게는 명령이죠.
즉 두려움은 불순종이라는 말이죠.

자, 이렇게까지 강하게 말씀하시는
이유는 뭘까요?

1절 후반절에 그 대답이 있습니다.
"...애굽 땅에서 너를 인도하여내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하시느니라"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시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 하나님이 어떤 분이세요?
답이 1절에 있지요?
뭐라고 되어있나요?
"애굽에서 너를 인도하여내신"
출애굽의 하나님이십니다.
당대 최강대국이 애굽, 이집트입니다.
그 강대국 애굽을 열 재앙으로 초토화시키셨고
홍해를 갈라 자기 백성을 건지시고
동시에 애굽의 병거와 마병을
수장시키신 분입니다.

그 하나님이!
지금도 이스라엘과 함께 하신다는거에요!
반드시 이기게하신다는겁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그 자신감을 어떻게 나타내시는지 보세요.

먼저 생각해보시죠.
전쟁을 한다고 하면
일단 사람이 많은게 좋을까요,적은게 좋을까요?
당연히 많은것이 좋지요!
군인을 소집하는 징집관 입장에서 생각해보면요.
어쨌거나 한 사람이라도 더 입대시키려 할겁니다.

제가 육군 만기 제대를 했는데요.
입대 전에는 어떻게든 안가고싶었거든요.
근데 제가 너무 문제가 없었던겁니다.
그래도 혹시나 신체검사에서 뭔가
하자가 있지않을까 기대했는데
결국 정상등급으로 입대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제가 올해 발바닥이 아파서
병원에서 엑스레이를 찍었는데...
세상에...
제가 평발이었답니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는데
제 때는 평발은 군 면제가 가능했거든요.

제 신체검사했던 군의관이
틀림없이 알았을텐데
그냥 정상인으로 찍어서
입대를 하게 만들었단 말입니다.

이게 징집관의 입장인거죠
'한 사람이라도 더 입대시키는 것'
한 사람이라도 인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말입니다.

정작 하나님께서 징집관에게 명령하시는 건!

전혀 다른 내용입니다. 

오히려 '한 사람이라도 더 

집으로 돌려보내라' 하시는 겁니다.

이게 하나님의 자신감이라는 거죠. 

 

오늘 본문에는 '집으로 돌아가야 할' 

적어도 네가지 조건이 나옵니다. 

하나 하나를 살펴보면 얼마나 당황스러운지요.

 

첫번째 집에 돌아가야 할 부류입니다.

5절

"책임자들은 백성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새 집을 건축하고 낙성식을 행하지 못한 자가 있느냐

그는 집으로 돌아갈지니 전사하면

타인이 낙성식을 행할까 하노라"

 

여기서 '낙성식'이란

'집을 짓고 하나님께 헌신하는 예식'을 뜻합니다.

성경에서는 오직 '성전과 관련해서만' 

이 단어가 쓰였고요. 

일반 개인의 집에 대한 '낙성식'은 

오늘 본문 이외에는 나오지 않아요.

그래서 '개인 소유의 집'에 대한 낙성식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정확히는 알 수 없는데, 

다행히 당시 문화에 대한 당시 문헌이 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에서 '낙성식'이라 하면 

가정의 가장이 '가족들이 새 집에 들어가서 정착할 때까지'

가정의 안정을 지키는 행위를 '낙성식'이라

인정했답니다. 

'낙성식'이라고 하지만 원문의 단어로 보면요!

'헌신하다' '개시하다' '시작하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일회성의 행사가 아니고!

훨씬 폭넓은 의미가 있고,

기간도 길었다는 겁니다. 

 

생각해보세요. 

"가장이 집을 짓고, 가족이 자리를 잡을 때까지!"

어느정도나 시간이 지나야 이게 가능할까요?

굉장히 주관적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는 작년쯤에 집을 지었어. 

그런데

아직 가족들이 자리를 못잡았네...

그러니 나는 집을 가야겠어'

이러면 할 말이 없어지는 겁니다. 

 

아닌 말로...

몇년 이내로 집 지은 사람들은 다 돌아가게 되는 거죠.

모인 사람들 중에 

'나는 낙성식을 아직 안 마쳤는데요?'

그러면 그들을 막을 수 없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은요?

보내라 하시는 거에요.

상관 없다는 거죠. 

 

그렇게 큰 무리가 우루루 빠져 나갑니다. 

 

이것만으로도 당혹스러운데!

하나님은 두번째 집에갈 부류를 말씀하십니다.

6절

"포도원을 만들고 그 과실을 먹지 못한 자가 있느냐?

그는 집으로 돌아갈지니 

전사하면 타인이 그 과실을 먹을까 하노라"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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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수아5:13-15

13 여호수아가 여리고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눈을 들어 본즉

한 사람이 칼을 빼어 손에 들고 마주 서 있는지라

여호수아가 나아가서 그에게 묻되

너는 우리를 위하느냐 우리의 적들을 위하느냐 하니
14 그가 이르되

아니라

나는 여호와의 군대 대장으로 지금 왔느니라 하는지라

여호수아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절하고

그에게 이르되

내 주여 종에게 무슨 말씀을 하려 하시나이까
15 여호와의 군대 대장이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 하니

여호수아가 그대로 행하니라

 

 

여호수아가 여리고로 가까이 이르렀습니다.

여리고는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가나안에서 첫번째로 싸우는 성입니다.

 

이 때 여호수아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지금까지 여호수아는 모세를 따르며

숱한 기적을 목격했습니다. 

열가지 재앙도 봤고, 40년 광야의 기적도 말이지요.

그럼에도!

이제 자신이 지도자가 되었을 때는 

마음에 두려움이 가득했습니다. 

'내가 과연 해낼 수 있을까?'

'어떻게 저 강대한 적을 상대할까?'

지혜도, 용기도, 실력도... 무엇하나 

자신이 없습니다. 

 

그럴 때에!

눈 앞에 어떤 사람이 서 있습니다. 

13절에 보시면 

'손에 칼을 들고 마주 서 있다' 하죠.

덜컥 겁이 납니다. 

칼을 빼들고 있다는 것은 

언제든지 공격할 준비가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보통 사람은 아닌듯 합니다. 

 

여호수아가 그에게 질문합니다. 

"너는 우리를 위하느냐? 우리 적들을 위하느냐?"

무슨 말이에요?

'너는 우리편이냐? 적이냐?' 묻는 겁니다. 

 

여러분 14절을 보세요!

이 사람의 정체가 뭡니까?

'여호와의 군대 대장'입니다. 

'여호와의 군대 대장'이라면 누구의 편이겠습니까?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편'이어야 하지 않을까요?

"걱정 하지 마라, 나는 너의 편이다" 해 주시면!

얼마나 든든하겠습니까?

 

그런데!!!

그의 대답은 뭐였나요?

"아니라!"입니다. 

이게 뭐에요?

'너는 누구편이냐?' 묻는데!

'아니라'는 대답은 뭔가 안 맞잖아요?

 

이게 도대체 무슨 뜻인가 싶어서!

영어 성경을 봤다는 것 아닙니까?

이거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Neither'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죠.

한국어로 번역하면 '아니라'가 맞긴 합니다.

그러나...

정확한 뜻은 이겁니다. 

"A도 아니고 B도 아니다"

둘 다 아니라는 뜻이에요!

 

의외의 말씀이죠.

하나님은 심지어 

'너의 편도 아니라고' 말씀하신 겁니다. 

 

대신에 주신 말씀은 뭐에요?

14절 중반절!

"나는 여호와의 군대 대장으로 지금 왔느니라"

이게 무슨 말이겠어요?

'나는 여호와의 군대 대장'이라는 말은 이겁니다.

"너가 여호와의 편에 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분명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편이십니다.

 

시편 118:6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가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까"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편이되사

그 백성을 눈동자같이 지키신다 했습니다. 

 

그러나 이 전쟁에서는 아닙니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하나입니다.

"네가 하나님의 편에 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니가 대장이 되어서 하나님이 도우시는게 아니라!

하나님이 대장이시고

너는 그의 뒤를 따르라 하시는 거에요.

 

여호수아는 뒤통수를 딱 맞은 느낌이었을겁니다. 

즉시 얼굴을 땅에 대고 그 앞에 엎드립니다.

그리고 묻습니다. 

"내 주여 종에게 무슨 말씀을 하려 하시나이까?"

군대 대장에게 한수 가르쳐달라 하는 거에요!

'하나님의 편에 선다는 건 어떤거냐?'는 거죠!

 

이에!

군대 대장이 답합니다. 

15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

 

신을 벗으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신을 벗는 행위'가 '종의 행위'라 하며

하나님의 종이 되라, 순종하라 고 말합니다만, 

저는 달리봅니다. 

 

'신을 벗으라'는 이유가 뭡니까?

'네가 선 곳이 거룩하기 때문'입니다. 

이건 '먹는 짐승, 먹지 못하는 짐승'의 구분에 따른 것입니다.

 

모세 율법에 보면 

먹지 못하는 짐승들이 있는데요!

먹지 못하는 짐승의 특징은 

'발이 땅에 가까울 수록 부정한 짐승'입니다. 

그래서 뱀이 가장 부정한 것입니다. 

온 몸을 땅에 비비고 다니니까요.

 

아담이 원죄를 범했을 때에!

하나님은 말씀 하셨습니다. 

창세기3:17

"땅은 너로인해 저주를 받았다"

 

이 상징성으로 인해!

땅에 붙어 사는 짐승, 새들은 

대부분 부정한 짐승으로 먹지 못하게 한 겁니다.

 

그런데!

지금 여호수아가 서 있는 땅은 어떻습니까?

'거룩한 땅'입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땅입니다.

일반적인 땅이라면 

신을 신어서 땅과 떨어져 있어야 하겠지만!

여기는 다릅니다. 

오히려 신을 벗어 땅에 붙어 있어야 합니다. 

 

무슨 말인가요?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께 붙어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임재 안에 있어야 한다는 거에요.

하나님의 말씀을 붙쫓아야 하고요.

모든일에 주님께 여쭈며 기도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께 붙어 있으면!

나머지는 하나님께서 일하신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군대 대장'입니다.

이기게 하시겠다는 증인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수아는 즉시 신을 벗었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확실해졌습니다. 

 

무엇하나 확실하지 않은 삶을 사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위기 앞에서 두려움에 떨 때에!

우리는 하나님께 붙어 있어야 합니다.

그분의 편에 서서

그분이 원하시는 것을 구해야 합니다. 

 

마태복음6:33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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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의 자료는 제가 사역 하면서
'서리 집사'에 대한 교육을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지를 
나름대로 고민하여 정리한 것입니다. 
생각나는대로 추가할 예정입니다.
 
- 서론 -
서리집사란 무엇인가?
(합동) 교회 헌법 정치 제3장 ‘교회 직원’
제3조 ‘교회의 임시직원’
4항 ‘남녀 서리 집사’
“교회 혹은 목사나 당회가 
신실한 남녀로 선정하여 
집사 직무를 하게 하는 자니
 그 임기는 1개년이다.”
교회법상 ‘서리집사’는 ‘안수집사’의
 직무를 보충하는 직분이다.
 

Ⅰ 기본기
에베소서6:13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① 주일 성수합시다. 
② 십일조와 헌금 생활에 충실합시다.
③ 교회 교육에 꼭 참여합시다. 
④ 매일 말씀과 기도 시간을 가집시다.
⑤ 잠 들기 전에 꼭 하루를 점검하며 회개합시다.

Ⅱ 뒷담화
잠언 11:13  
“두루 다니며 한담하는 자는 
남의 비밀을 누설하나 
마음이 신실한 자는 그런 것을 숨기느니라”
① 남의 말 하지 맙시다. 
② 들은 것을 전달하지 맙시다
③ 듣게 되거든 ‘그럴 수 있다’‘나도 한다’라고 넘어갑시다.
④ 성도간에 다투지 맙시다.

Ⅲ 돈거래
누가복음16:13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① 빌리지도 빌려주지도 맙시다. 
② 명의도 안됩니다.
③ 빌려주겠거든 ‘그냥 준다’고 생각되면 하세요.
④ 남의 돈 빌렸으면 값으세요.

Ⅳ 봉사
고린도전서4:2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① 직분자에게 대표기도는 기본기입니다.
② 무슨 일이든 하나님이 주시는 사명으로 감당합시다.

Ⅴ 조심해야 할 것

① 장례식장에서
로마서12:15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는 
신앙인의 언어가 아닙니다.
 - ‘믿는 사람이 왜 울어?’라는 말은 
상처를 크게 만듭니다. 슬픔에 공감합시다.

② 자기자랑
고린도후서10:17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할지니라”
 - 돈 자랑, 자식자랑, 학벌자랑은 
타인에게 박탈감과 좌절을 줍니다.
 - 영적 우월감, 체험 자랑 역시 타인을 질리게 만듭니다.
 - 무엇보다 귀 기울여 들어주는 사람이 됩시다.

③ 이단
요한이서1:10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하지 말라”
 - 이단이다 싶으면 즉시 대화를 끊읍시다. 
 - 교회 밖의 성경공부는 매우 위험합니다. 
인터넷으로 하는 성경공부도 주의합시다.
 - 주변 사람들의 언어 태도가 이상하거든 교회에 알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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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수의 계절이 왔다.

교회도...

이 계절이 되면 '추수'비슷한 걸 한다.

 

소위 '초청예배'라는 것이다.

이런 행사가 없는 교회가 있을까?

 

그야말로 교역자와 교인들을

있는 힘껏 짜내서 

목표한 숫자를 달성해야 하는

인원 동원 행사다.

 

뭐 좋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 초청하고 초대하는

일이야 누가 뭐라고 하겠는가?

 

그런데...

그걸 꼭 '예배시간'에 한다.

예배...

예배가 '목적' 아니었나?

예배의 중심은 하나님이라 가르치지 않았나?

그러고서 교회는

예배를 '수단'으로 사용한다.

아무리 전도를 위해서라도 

수단은 수단이다.

초청잔치 경험해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그야말로 아수라장이다.

 

주차문제부터, 자리싸움,

아이가 울면 눈치 보기...

 

이런 저런 일들로

초청예배에 왔다가 

교회랑 정 떼는 사람도 

적지 않다.

 

정말 예배가 뭔가를 좀 고민하고

목회를 하면 좋겠다.

예배를 예배되게 하면!

부흥은 따라오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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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청년이 갑자기 교회에 나오지 않아
무슨 일인가 싶어
심방을 했다.
시험에 들었다고 한다.

무슨 시험이었는가?
청년의 아버지가
크게 사업을 하시던 분이었는데
그분이 신앙에 재미를 붙이고
모처럼 교회 생활을 열심히 하셨단다.

어느날부터인가
교회에 한 장로님이
청년 아버지에게 가까이 하면서
그렇게 돈을 빌려달라 하셨다는 거다.
또 교회에 무슨 행사가 있거나 하면
집사님에게 돈을 내라는 식으로
자꾸 돈을 요구하셨단다.

교회에 내는 헌금이야 그렇다고 치고
빌린 돈을 값지 않고
오히려 더 빌려달라는 식이었단다.

결국 고민이 많았던 아버지가
가족에게 이 일을 털어놨고
이 말을 들은 청년은!
이날까지의 신앙을 놔버리고 말았다.

항상 이런 식이다.
교회에서 돈 빌리는 거...
이거 좋게 끝나는 적이 없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돈 빌려 놓고
값지 않으면서!
'빌린 돈이 재수 없어서 사업 망했다'라고
망언을 하면서 교회에 사단이 나기도 했다.

그렇다.
목회 현장에서
절절하게 깨달은게 있다.

교인들간에
돈은 빌려주는게 아니다.

1. 남의 돈 빌려 쓰고는 고마워하는 사람 못봤다.
2. 빌린돈을 값아야 할 빚으로 여기는 사람 못봤다.
3. 일이 잘못되면 심지어 빌린 돈 탓도 한다.

돈이란게 원래 그렇다.
빌려주면 시험거리가 될 뿐이다.

그래서 나는 목회에서
'돈 빌림에 대해'
몇가지 원칙을 세웠다.

1. 돈은 빌려주는 거 아니다!
안빌려주면 그 사람만 잃지만
빌려주면 그 사람도, 돈도, 신앙도 잃는다.

2. 빌려줘야겠다면 '받지 않을 각오도 하라'
받으면 감사하게 될 것이고
받지 않으면 내가 도운 셈 치면 된다.

3. 돈 빌리는 문제는 지극히 개인간의 문제다.
이걸로 교회의 분란을 만들지 말라.
교회는 누구의 편도 들어줄 수 없다.
언제든지 양쪽의 말을 들어보면
양쪽 다 나름의 이유가 있다.
교회가 이 문제에 뛰어들면 풍비박산이다.
차라리 일반 법에 호소하는 것이 깔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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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설교 할 때에
정말 열심히 원고를 쳐다본다.
영상으로 내가
설교하는 모습을 보자면
고개를 들고 있는 모습보다는
숙이고 있을 때가 확연히 더 많다.

물론, 일반적인 설교론과는
배치되는 걸 나 스스로 잘 안다.
신학을 배울 때에
설교 전달의 기본은
청중을 보는 것이고
효과적인 전달을 위해서
적극적인 제스쳐가 필수라 했다.

그러나 나는
나름의 사역 커리어를
쌓아가면서 이러한 기준을 버렸다.

계기는
내가 모셨던 한 담임 목사님의
목회 철학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은 들리는 것이다"


눈빛이니 제스쳐 같은 것이 아니라!
메시지 자체가 중요하다는 것.
실제로
그래서 그 목사님은
본당에 있는 대형 모니터도
설교시간이 되면 끄게 하셨다.
2000여명 교회여서
뒷자리에서는 설교자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지만
상관 없었다,
설교는 '들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저게 뭔가 싶었다.
말도 안된다는 생각이 컸다.

왜냐하면
부교역자들에게도 같은 기준을
요구하셨기 때문이다.
부교역자들이 설교할 때에
제스쳐를 하거나 하면
반드시 불호령이 떨어졌다.
똑바로 서서
손 붙이고
자기 원고하고 씨름을 하게 하셨다.

이래서야
성도들이 말씀을 들을 수 있겠는가?

그런데!!!


놀랍게도
성도들은 말씀에 집중했다.
아닌말로
어줍잖은 제스쳐들이
오히려 소통을 방해해왔음을
제스쳐를 끊고
메시지에 집중했을 때에야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

그 교회에서 사역을 마친 후에!
나는 당시 목사님의
'설교 철학'을
나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내가 쓸 수 있는 설교 준비의
모든 시간을!
오롯이!
더 완벽한 원고를 만드는데
할애했다.
예배 직전까지 원고와 씨름했다.
원고를 외운다거나,
기타 전달을 위한 이런 저런
기교를 배제했다.

부끄러운 말이지만!
이후로 10년 넘는 시간동안!
많은 이들에게
설교에 대해서만큼은
인정받고 있다.

교회 성도들에게나
같이 사역하는 목회자들에게나
다른 것은 몰라도
설교에 있어서는
확실한 성과를 보여왔다.

목회가 무엇인가?
'내양을 먹이라'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먹이는 것
아닌가?
제대로 된 음식을 먹여야지!
음식 아닌 것을
아무리 포장해봐야
'양은 굶주릴 수 밖에 없다'
교인 일만명을 모은들!
그 목회는 실패다!

고개를 숙이고
원고랑 씨름하는 모양새일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잘 준비되어 있다면!
그 말씀은
예배의 현장에서
강력한 불로 변한다.

'저 목사는 고개를 숙이고 설교하네'
'원고를 다 안외웠나보네'

아니다!
메시지에 집중해보라!
제대로 해석된 말씀인지!
'과연 그러한지'
그것부터 헤아려 보라!

교회에 필요한 건!
쇼맨이 아니라
'설교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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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보다 많은 성도들이 

신앙에서 '생활'을 놓치곤 한다.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 받는다' 

'의롭다 함을 얻고 천국 간다'

이정도는 알지만,

이후 '오랜 시간' 살아가는 일들에 

대해서는 30년을 생활 해도 모른다.

 

사사기 말씀에 

'제 소견에 옳은대로 행했다'는 말이 

나오는데,

오늘날의 신앙생활이 

그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예를 들어 

장례식에 가면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라는 표현이

거의 표준이다.

그런데

이 표현이 과연 신앙인에게 합당한가?

아니다. 

'명복'의 사전적 정의는

'죽은 뒤에 저승에서 받는 복'이다.

 

기독교 신앙에서 '죽음 이후'에는 

'영복'과 '영벌' 두가지 뿐이다.

'천국' 아니면 '지옥'이다.

'더할 수 없는 복'이거나

'복 없는 저주'다.

그런 의미에서 

성경에 '명복'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놀랍게도 교회의 장로이신 분인데도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는 인사를 하신다.

 

헌금에 대해 생각해보자.

십일조에 대해서 

오늘날에 여러 관점이 있다.

적어도 대한민국의 보수적인 신학을 

견지하는 '합동 교단'에서는

십일조가 폐지 되지 않았다고 믿는다.

십일조는 '율법이 오기 이전' 즉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바쳤던 것이 그 출발점이었고,

예수께서도 십일조에 대해

'이것도 폐하지 말라'하심으로 

십일조에 대한 계속성을 인정하셨다.

 

여기서는 십일조 폐지 여부를 

말하려는게 아니고,

당연하게 십일조가 교회의 

표준 헌금임을 인정하면서 

십일조에 대해서 이야기해보겠다.

 

십일조의 기본 정신은 

'하나님의 것'이라는 '인정'이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십일조를 '자신의 것'으로 

'적선하는 양' 하고 있다.

 

쪼개고 쪼개서

이만큼은 우리 교회에, 이만큼은 선교단체에

이만큼은 어려운 이웃에게...

 

좋은 마음인 걸 알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월권이다.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라 했는데,

마치 내것인양 기분을 내고 있는 것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십일조는 자신이 신앙생활하는 교회

'말씀 듣고'  '치리를 받는'

자신이 등록 되어 있는 교회에

조건 없이 드림이 기본이다.

 

 

이렇듯

신앙 '생활'에도 

'성경적인 기준'이라는 것이 있을 터인데

많은 이들이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해 나가고 있다.

 

자, 이제 

정말로 기준을 세워야 할 때다!

일상에서, 

요람에서 무덤에 이르기까지

'기독교인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나 하나 기준을 세워야 할 때이다.

 

초대 교회 성도들에게는 확실히 

그러한 기준점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기준점들을

지키기 위해서 많은 것들을 희생했다.

 

술, 제사, 주일지킴...

생각해보면 오늘날에는 어리석어 보이는

이러한 기준들이

'기독교라는 신앙'을 

당시에는 뭔가 다른 종교로 보이게 만들었다.

적어도 오늘날처럼

물에 물탄듯

이도저도 아닌 

그저 '예수 천당'의 맹탕 공동체는

아니었던 것 같다.

 

오늘날 성경적인 신앙 '생활'은 무엇인가?

'성경적인' 기준을 바로 세우고

세상과 '다름' 

'구별됨' 

즉, '거룩'한 교회를!

다시 회복해야 하겠다.

 

누군가의 말대로 

'모든 것은 디테일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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