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믿음은 크리스천과 같은 고향 사람이었다. 

고향 이름이 '멸망의 도성'이었던 것 같다. 

 

믿음은 

크리스천이 이곳을 떠났다는 소문을 듣고 

용기를 내어 뒤늦게 길을 떠나온 사람이다. 

 

여기서 성도의 영향력에 대해서 생각해본다.

우리는 종종 '영향력을 행사해야겠다'는

강박관념에 빠지곤 한다.

이런 조바심이 위험한 것이

스스로를 낙담시키고 

주변의 사람들을 정죄하게 되기 때문이다.

 

존번연의 글은 의미심장하다.

크리스천은!

그저 자신의 구원을 위해 길을 떠났을 뿐이다.

그런데!

죄에서 떠나기 위한 개인의 몸부림을 

지켜보는 사람이 있었던 거다!

같은 고민을 하던 사람이 있었던 거다.

크리스천의 고민과 결단과 행동은!

그를 지켜보던 다른 사람의 결단으로 이어졌다.

'나 자신이 하나님 앞에(코람데오)사는 것'이 

중요하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통해서 

여러 역사를 이루어 가신다. 

 

--- 계속 ---

 

작가가 믿음을 등장시킨 이유가 있다.

믿음 역시도 크리스천과 같은 경로로 

여기까지 이르렀다.

하지만, 크리스천과 같은 경험을 한건 

아니었다. 

 

크리스천은 '낙심의 늪'에 빠져서 고생했지만, 

믿음은 늪에 빠지지 않고 좁은 문에 이르렀다.

 

그 과정에 믿음은 

크리스천이 만나지 못했던 '바람둥이'라는 

여자를 만나서 미혹을 받는다. 

 

크리스천은 곤고산에서 누군가를 만나지 않고

계속 그 산을 올랐었다.

믿음은? 산 중턱에서 

'첫 사람 아담'을 만나서 또 다시 미혹을 받는다.

 

아담의 미혹에 잠시 마음이 흔드렸던 믿음은

이후에 모세에게 붙잡혀서 두드러 맞는다.

마음으로 지은 죄도 죄이기 때문!

모세는 자비 베푸는 법을 알지 못한다며

믿음을 죽일 기세로 공격했다.

 

그 때에 

'손과 옆구리에 구멍이 있는' 사람 즉, 주님께서

모세를 만류하셨고, 

믿음은 계속해서 길을 갈 수 있었다. 

믿음을 때린 사람은 모세였다.

또한 크리스천은 '아름다움'이라는 궁전에서

쉼과 은헤를 받을 수 있었지만 

믿음은 그곳을 낮시간에 지났기에

그냥 지나쳐 갔고, 

 

겸손의 골짜기에서는 

또 다시 미혹을 받는다. 

'불만'이라는 사람이 믿음에게 '돌아가자'고 설득한다.

또, '수치'라는 사람은 종교를 의지하는 이들을 

조롱하며 믿음에게 수치심을 주려 했다. 

 

이처럼!

'믿음'이 지나온 길은 '크리스천'과 같은 경로였지만

그들의 경험은 전혀 달랐던 것을 볼 수 있다. 

그렇다!

신앙의 길은!

모두가 똑같이 가는것만이 아니다. 

이런 사람은 이런 경험을 

저런 사람을 저런 경험을 한다. 

그러나!

전혀 다른 경험을 했음에도!

두 사람은 서로 공감하며 

이야기를 주거니 받거니 한다. 

왜냐고?

신앙의 원리는 똑같기 때문이다!

 

세상에 속하지 말고!

하나님의 편에 서서 가는 것 말이다. 

 

크리스천의 길이 대적들과 싸우며 가는 길이라면

믿음의 길은 계속다가오는 미혹을 이기는 길이었다

 

우리 각 사람이 어떤 모양의 시험을 당할지라도!

신앙의 원칙을 지키며 살아가면 

넘지 못할 산을 없을 것이다. 

 

728x90

이번엔 책의 세번째 파트 '걷다'이다.

사실 이 파트는 읽으면서
크게 감흥이 있지는 않았다.

모든 종교와 철학의 지도자들이
걸으면서 새로운 길을 열었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예수님의 사역 역시도
걸으면서 일어났다고 말한다.
그러고보면
예수님은 스스로를 '길'이라 하셨다.

예수님은 걸어서 사람들을 찾아가셨고
마지막 십자가를 지실 때도
골고다의 언덕 길을 오르셨다.
그런 의미에서!
'어쩌면'
걷는 것이
예수님의 길을 따르는 방편이 되지 않겠는가?

예수께서 걸으면서
만나는 사람들을 고치셨고, 가르치셨고,
회복시키셨다면,
교회 역시도
걷다보면!
교회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또한!
영적인 배고픔을 가진 사람들도!
걸어서 교회에 오고
걸어서 말씀을 배우고
걸어서 심방 하며!
길에
그리스도인의 자취를 남겨야 하지 않을까?

최근 '순례의 걷기'가 유행하는 것도
그런 인간의 본성이
작용하고 있는 건 아닐까?


이로서
'교회는 지금 대사회적 복지'로
'먹다' '듣다' '걷다'의
세가지 동사들을 다루었다.

개인적으로는
'먹다'와 '듣다'는 공감이 되었지만,
마지막 '걷다'에는 마음이 가지 않았다.
그럼에도!
신학을 공부하지 않은 사람이
이렇게까지나 기독교의 핵심을
꿰뚫는 데는 감탄을 금치 못하겠더라.


여기서 나눔을 위한 질문들

1. 얼마나 걸으세요?

2. 걸음을 통해서 효과(효능?)를 본 일이 있나요?

3. 꼭 걸어보고 싶은 길이 있다면?

728x90

이번 질문은 '듣다' 파트이다.

기독교의 상징은 하나님의 말씀을 '빵'에 비유한다.
그것이 '빵'이라면 그 말씀을 '먹는 자'가
영생을 얻는다고 한다.

이것을 인간의 실존으로 이야기 해볼까?
'빵'으로 이야기하면 '먹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야기하면
'듣는 것'이다.

교회의 '복지'는
'먹는 것'에 이어서!
'듣는 것'으로 나아가야 할 이유이다.


작가가 먼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듣는 것'이 우선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마르다와 마리아 이야기이다.
마르다는 예수님을 접대하기 위해
열심히 음식을 준비하고 일하는 중이다.
그와중에!
마리아는 앉아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다.
마르다 입장에서는 속상할 노릇이다.
언니는 이렇게 고생하는데
이 동생은 어찌 저리 철이 없단 말인가!
게다가!
고대 사회에서 여자는
앉아서 말씀을 들을 입장에 있지 못했다.
마땅히 음식을 준비해야 옳았다.

마르다는 예수님께 고자질한다.
"예수님! 마르다에게 너도 일좀 하라고
이야기좀 해주시죠!"

예수님의 대답은 무엇인가?
누가복음10:41,42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봉사'와 '듣는 일' 중의 '취사선택'이 아니다.
적어도 '말씀을 들을 때'는
봉사의 일을 내려 놔야 한다는 것이다.
봉사에 치우쳐서
하나님의 말씀을 먹지(듣지) 못하게 되는 것은
영적 기근을 초래하는 일이다.

1. 마르다의 경험을 비추어
요즘 내 마음을 분주하게 하는 일은 무엇인가?
그것이 말씀보다 앞서 있지는 않은가?

2. 요즘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에 들어오는가?

--------------------------------

"영적인 말씀이 육적인 필요보다 앞서는가?"
이 질문에서 출발해야 한다.
무엇이 영원한 생명이고, 진짜 삶이고,
행복인지 찾아야 한다.
이 질문을 해결하고 출발해야 계속 교회에 나온다.

교회의 복지 역시 이 점을 염두해야 한다.
교회가 사회를 위해 벌이는 많은 사역이
과연 무엇을 위한 것인지 점검해야 한다
(p.111)

교회가 사회를 위해 너무 많은 일을 하려고
들지 않았으면 한다.
우리에게 제일 급하고 중요한 것은
정치 경제가 아니고 생명인 것이다.
생명을 놓치면 세상을 놓친다.
그리스도인의 생명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데 달려 있다.
(p.113)

예수님을 영접한지 얼마 되지 않으신 분이
이토록이나 기독교의 진리를
꿰뚫어 볼 수 있다는게 놀라울 뿐이다.
심지어 신학을 하는 교수들 중에도
교회의 대사회 복지를
'먹는 것'에 방점을 두는데
이분은 진정한 '먹음'인
'말씀 들음'을 말하고 있다.

다시 한 번 감탄해 마지 않는다.

728x90

이번에 '경건서적 독서모임'으로 준비한 책은
'내면 세계의 질서와 영적 성장' - 고든 맥도날드
이다.
이 책은 어렸을 때?
20대일 때 읽었던 책이고
내용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굉장히 여운이 컸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얼마 안되어서
이분이 성?적으로 어려움을 겪었고
오랜 시간 자숙하다가
어느날 복귀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리고 이번에
경건서적 독서모임을 하려고 알아보니
이 책이 다시금 스테디셀러에 올라 있었다.
'다시 한 번 보면 어떤 느낌일까?' 싶어서
다시금 책을 들었다.


이 책은
'공적 세계' 즉 우리 일상의 삶을 위해서
'내면 세계' 자신의 영혼을 희생하고 있지는
않은지...
스스로 돌아보라고 묻고 있다.
요즘 유행하는 '워라벨'이
'워킹, 라이프 밸런스'라면
이 책은
'스라벨'
'스피릿, 라이프 밸런스'를 묻고 있는 거다!

내면 세계의 질서가 무너지면
'싱크홀'과 같은 문제가 발생한다.
지하수가 사라지면서
지반을 지탱해야 할 공간이 생기고
곧장 지반이 무너지게 된다.
내면세계의 질서가 무너지면
우리가 쌓아놓은 삶의 지반이
역시나 무너지게 된다.

읽으면서 떠오르는 질문들을 기록해보자.

"1장 싱크홀 증후군"

1. 바쁘게 살아오면서 자신의 내면 상태를
깊이 돌아본 기억이 있는가?

2. 내가 되고 싶었던 인생을 지금 살고 있는가?

3. 모든 것이 잘 되고 있는 순간에
불안하고, 공허한 마음이 들었던 때가 있는가?

4. '내면 생활을 정비하는 시간을
규칙적으로 가지고 있는가?'
(양이 아니라 질에 대한 질문이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