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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앞에서 '이혼'이 가능한가?

결혼식장에서 남녀는 '혼인 서약'을 한다. 

그 내용은 어쨌거나 죽을 때까지, 평생 

서로를 버리지 않고 함께 하겠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실제로 살아보면 그게 쉽지 않더라.

결혼을 하고 실감하는 것은

'왜 사람들이 이혼하는지 알겠다'는 마음이랄까?

그런 위기들을 넘기며 사는 것이 

어쩌면 결혼생활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성경은 '이혼'을 어떻게 말하는가?

결혼의 원리에 대해 가장 명확하게 

나오는 곳은 예수님과 바리새인의 대화에서다

이혼에 대해 묻는 바리새인에게 

예수님은 이리 말씀하신다.

 

마가복음 10:9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더라"

 

결혼관계는 '하나님이 짝지어주신 관계'이다.

'사람이 나누지 못한다' 했다. 

즉, 서로가 합의 했어도, 

법원에서 이혼 도장을 찍어도...

인간적인 어떤 행위나 행정력이 있어도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여전히 '부부'라는 것!

 

하나님 앞에서 이혼이 성립되는 것은!

상대방이 죽었을 때 뿐이다. 

결혼 관계는 '죽을 때까지' 유지되는 관계다.

 

로마서 7:2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 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나느니라"

 

자, 이러하다면!

어떤 사람이 이혼하고

전 남편이 살아 있는데 

재혼을 한다? 어떻게 되겠는가?

 

로마서 7:3
"그러므로 만일 그 남편 생전에

다른 남자에게 가면 음녀라"

 

오늘날 이혼과 재혼이 빈번해 진 시대에

이런 말씀은 두렵기 짝이 없다.

 

오직!

재혼을 하고자 한다면!

상대방이 죽은 이후 뿐인 것이다. 

 

로마서7:3하

"...그러나 만일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자유롭게 되나니 

다른 남자에게 갈지라도 

음녀가 되지 아니하느니라"

 

고린도전서 7:39
"아내는 그 남편이 살아 있는 동안에

매여 있다가 남편이 죽으면

자유로워 자기 뜻대로 시집 갈 것이나

주 안에서만 할 것이니라"

 

이것이 성경의 원리이다. 

 

물론!

이혼하고 재혼했다고 해서 

지옥에 가는 것도 아닐 것이다.

술담배 한다고 지옥가는 것 아니고,

도둑질 했다고 지옥 가는 것 아니고,

거짓말 했다고, 미워했다고, 

이런 저런 죄를 지었다고...

지옥 가는건 아닐터다. 

 

우리 구원의 유일한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는 믿음이다.

 

그럼에도.

구원 받았다는 사람이

천국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뜻에 

민감하지 못하고

그저 나 자신의 상황과 필요에만 

치우쳐 있다면

하나님 앞에서 옳은 일일까?

 

예수님 시대에도 이혼은 있었다. 

모세도 이혼증서를 떼주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마가복음10:5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마음이 완악함으로 말미암아 

이 명령을 기록하였거니와"

 

이런 일들이 있다고 해서

그게 옳은 건 아니라는 거다.

인간의 완악함을 나타내는 증거일 뿐!

자!

하나님 앞에서 완악한 자로 

살아서야 되겠는가?

 

이미 이혼을 한 사람도, 

재혼을 한 사람도,

하나님 앞에서 죄인임을 고백해야 할 것이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거기에 함몰되어

어둡게 살라는 것은 아니다.

누구나 잘못이 있고, 죄인으로 산다.

용서 받은 죄인으로서!

여전히 기쁨으로 살아가되!

 

예수께서 어떤 여인에게

말씀하신 바와 같이 

요한복음8:11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

그 죄가 반복되지 않도록!

살아가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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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41장

하나님께서는 열방을 재판의 자리로 부르신다. 

 

1절 "섬들아 내 앞에 잠잠하라

민족들아 힘을 새롭게 하라 

가까이 나아오라 그리고 말하라 

우리가 서로 재판 자리에 가까이 나아가자"

 

재판의 주제는 

"누가 참 신인가?"이다. 

 

하나님께서는 친히 자신을 증거하신다.

무엇으로?

'미래에 있을 일들을 미리 보여주심으로'

그것도 100년 후, 200년 후에 있을 

미래의 사건들이다. 

 

이사야 39장까지에서는!

하나님께서 15년 더 살게 된 히스기야에게

'유다가 바벨론에 망하게 될 것'을 말씀하셨는데...

이미 이 말씀부터가 엄청난 예언이어다.

 

왜냐하면 이 당시에 세계의 지배자는 

앗수르였고, 바벨론은 그리 대단치 않았기 때문!

그랬는데, '유다가 바벨론에 망한다니' 

이미 여기서부터 믿을 수 없는 일이었으나

100년후에 실제로 그 일이 일어났던 것이다. 

 

물론, 이정도의 일은 '우연의 일치'라 할지 모른다.

그래서다. 

하나님께서는 유다가 바벨론에 망한뒤

70년뒤에 유다 포로를 회복시킬!

한 사람의 '이름'을 알려주신다. 

 

"바사왕 고레스"

 

이사야 44:28
고레스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내 목자라  그가 나의 모든 기쁨을 성취하리라

하며 예루살렘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중건되리라 하며 성전에 대하여는

네 기초가 놓여지리라 하는 자니라

 

이사야 45:1
여호와께서 그의 기름 부음을 받은

고레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그의 오른손을 붙들고

그 앞에 열국을 항복하게 하며

내가 왕들의 허리를 풀어

그 앞에 문들을 열고
성문들이 닫히지 못하게 하리라

고레스가 나타나기 200년 전에!

이미 그의 이름을 말씀하신다. 

또한 그가 어떻게 세계를 지배할지도

그 방법까지도 알려주신다. 

'왕들의 허리를 풀어 

그 앞에 문들을 연다' 하는데!

바벨론의 마지막 왕 벨사살의 폭정 때문에

고레스가 선전포고를 하자 

고레스에게 속한 성주들이 일제이 

성문을 열었다고 한다.

 

오늘 41장에서 이름까지는 알려주지 않지만

명백히 '고레스'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2절 "누가 동방에서 사람을 일깨워서

공의로 그를 불러 자기 발앞에 

이르게 하였느냐 

 열국을 그의 앞에 넘겨주며 

그가 왕들을 다스리게 하되..."

 

과연 이러한 신이 있을것인가?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4절 "이 일을 누가 행하였느냐

 누가 이루었느냐

 누가 처음부터 만대를 불러내었느냐

나 여호와라 

처음에도 나요 

 나중 있을 자에게도 내가 곧 그니라"

 

그리고 이러한 일들은 

역사가 요세푸스의 글이 그대로 남아있다.

 

하나님은 만군의 주요 만물의 주관자이시다.

반면에!

인간이 섬기는 우상은 어떠한가?

 

7절"목공은 금장색을 격려하며 

 망치로 고르게 하는 자는 메질꾼을 격려하며

이르되 땜질이 잘 된다 하니 

그가 못을 단단히 박아

우상을 흔들리지 아니하게 하는도다."

 

하나님은 인간을 인간을 세우시는 분이다.

우상은? 인간이 세워줘야 하는 것이다.

 

"누가 참 신인가?"

하나님의 백성은 누구를 의지해야 하는가!

 

이 하나님이

버러지처럼 진토에 놓인

자기 백성에게 말씀하신다. 

14절 "버러지같은 너 야곱아,

너희 이스라엘 사람들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너를 도울 것이라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이니라!"

 

어떠한 시대를 살지라도

하나님의 백성이 의지해야 할 것은 

분명하다!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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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2:1-10

 

1 사흘째 되던 날 갈릴리 가나에 혼례가 있어 예수의 어머니도 거기 계시고

2 예수와 그 제자들도 혼례에 청함을 받았더니

3 포도주가 떨어진지라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이르되 저들에게 포도주가 없다 하니

4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5 그의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

6 거기에 유대인의 정결 예식을 따라 두세 통 드는 돌 항아리 여섯이 놓였는지라

7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즉 아귀까지 채우니

8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하시매 갖다 주었더니

9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도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 온 하인들은 알더라 연회장이 신랑을 불러

10 말하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하니라

 

 

1. 물이 포도주로 바뀐 사건에 대하여.

 예수님의 첫번째 기적이었다. 예수님은 어머니 마리아와 결혼 잔치 자리에 참석하시게 되는데, 이럴 수가 잔치에 포도주가 떨어진 것이다. 당시 포도주가 모자란 것은 주인의 큰 수치였고, 잔치의 비용을 신랑의 가족이 부담해야 했는데, 신부 가족이 신랑 가족을 고발할 수도 있었다. 

 이런 위기의 상황에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예수님께 이 상황을 고했고, 예수님은 손씻는 물두멍에 물을 채우라 하셨고, 그 물은 최상품의 포도주로 변하여 잔치의 위기를 모면하게 되었다.

 

2. 이 사건의 의미들을 알아보자.

 이 사건의 전체 의미는 '새 시대'이다. '유대교'라는 옛 율법의 시대에서 '기독교'라는 복음의 새 시대가 열린 것이다. 물과 포도주가 다른 것처럼 새 시대는 옛시대와 완전히 다른 것이다.

 1절에 보면 '사흘 째 되든 날'이라 했다. 언제부터 사흘째인가!

 1장19절에 보면 '첫째 날'엔 요한의 자기 증언이 있었다. 

 1장29절에 '이튿날' 즉 '둘째 날'에 '예수께서 요한에게 나아오셨다.' 

 1장35절에서 '또 이튿날' 즉 '셋째 날'에 '요한은 두 제자를 예수님께 보낸다' 

 1장43절에 '이튿날' 즉 '넷째 날'에 나다나엘과 만나신다. 

그리고!

 2장1절 '사흘째 되던 날' 즉 '일곱째 날'에 예수님은 물을 포도주로 만드신다. 

 이 날은 안식일이었다. 

 즉, 옛 율법에 속한 안식의 날은 참된 안식을 주지 못함을 보여준다. 

 2장6절 유대인의 정결 예식을 위해 준비된 '돌 항아리'가 '여섯' 있었던 것을 보라!

 6은 불완전함, 또는 부족함을 뜻한다. 

 옛 유대교의 '정결법'은 그들을 정결하게 하지 못한다. 

 예수님의 오심은 그들을 정결하게 하심이었다. 

 그래서다!

 마리아가 잔치집의 문제를 예수님께 말했을 때!

 예수님은 3절 '내 때가 이르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여기서 '내 때'는 예수님의 십자가 지시는 때이다. 

 요한복음12:23, 27, 13:10, 16,32, 17:1절에 계속해서 '내 때'를 말씀하셨다. 

 그 때는 '십자가를 지시는 때'이다. 

 예수님의 때는 아직 오지 않았지만! 

 예수께서는 '물로 포도주를 만드사 문제를 해결하신다.' 

 

 예수께서 '때가 이르지 않았음에도' 기적을 행하신 이유!

 '십자가 지시는 때'를 나타내기 위함이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신다' 

 물로 상징되는 옛 시대는 막을 내리고, 포도주로 상징되는 새 시대를 여신다.

 

 예수님은 부족한 포도주를 채워주셨다. 

 이로서 예수님이 교회의 신랑되심을 보여주신다. 

 예수님은 마리아를 '어머니'라 부르지 않고 '여자여'라고 불렀다. 

 낮춰 부르는 것이 아니라 당대에 사용했던 '존칭'임에도

 '어머니'에게 쓸만한 표현은 아니다. 

 즉슨!

 이 '첫 표적'을 통해!

 예수님과 마리아 사이에 관계가 재 설정된 것이다. 

 

 가나 혼인 잔치는!

 새 날을 여시는 예수님의 선전포고와도 같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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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과 롯 각자의 재산이 많아지면서 목자간의 분쟁이 되었다. 

이 때에 아브라함은 롯에게 '자신을 떠나라'면서!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겠다'는 말을 한다. 

 

여기서 자칫 오해하기 쉬운 것이...

아브라함이 마치 롯을 내치는 것 처럼 생각한다. 

또는, 누가 더 좋은 땅을 차지할지 눈치 싸움하듯 생각한다. 

그러면 아브라함이 좋은 땅을 양보한 사람으로, 

롯은 어른을 공경못하는 못난이로 여기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만일 롯이 삼촌을 배려하여 반대로 선택했다면?

그러면 아브라함은 소돔으로 가야 했다는 말이 되는 건가?

그럴 수 없다!

 

즉, 아브라함의 제안엔 일반적인 인식을 넘든 의미가 있다. 

히브리 원어에서!

'좌, 우'는 종종 '북, 남'을 의미하곤 한다. 

그러고보면 언약의 땅 가나안은 '남북으로 긴 모양'이다. 

 

무슨 말인가!

아브라함이 제안한 것은 이거다!

"우리가 비록 상황 때문이 나뉘어야 하지만!"

"언약의 땅을 떠나지는 말아라!"

"북쪽이든 남쪽이든... 언약의 땅에 머물러라!"

 

아브라함은 조카를 내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언약의 땅에서 하나님의 복을 함께 누리자고 품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롯은 어땠는가?

롯의 눈은 '소돔' 땅을 바라보고 있었다. 

롯이 보기에 '소돔'은 마치 '하나님의 동산'같았다고 했다. 

하나님의 동산, '에덴'처럼 보였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리로 향했다고 하는데!

여기서 성경은 이렇게 표현한다. 

창세기13:11 "그러므로 롯이 요안 온 지역을 택하고 동으로 옮기니 그들이 서로 떠난지라"

 

'동'으로 옮겼다고?

갑자기 여기서 동쪽이 나온 이유는 뭔가?

 

'에덴'과 '동쪽'이라는 두 단어가 함께 나오는 이유!

 

동쪽은 에덴에서 멀어지는 상징이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여 에덴에서 쫒겨났을 때!

그들은 '에덴의 동쪽'으로 쫓겨났다!

창세기3:24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 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 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그들의 자손 '가인'은 동생 아벨을 죽이고 또 다시 동쪽으로 멀어진다. 

창세기4:16

"가인이 여호와 앞으로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더니"

 

결국 '동쪽'으로 떠난 롯은!

하나님을 떠난 것이다. 

 

아브라함은 롯이 '하나님을 떠나지 않도록 제안했으나' 

롯은 '동쪽으로 향하면서 하나님을 떠나게 된' 이야기가 본문의 주된 내용이다. 

그리고 그 땅에는!

시시각각 멸망이 다가오고 있었으니...

 

나머지 내용은 설교로 확인!

https://www.youtube.com/watch?v=RbYyEHUxUz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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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8:31-34

오늘 말씀 바로 앞 구절에서!
베드로는 예수님에게 교회의 토대가 될 위대한 고백을 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성령이 알게하셨던 이 대답에 예수님은 흡족하셨다.

그러나!
바로 그 다음에!
분위기는 '천당에서 지옥'으로 변하고 만다!

예수께서!
자신이 죽임 당하고, 삼일만에 부활하실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제자들입장에서는 충격이었다.
'삼일만에 살아나리라' 하는 말씀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으리라!

즉시로!
베드로는 예수님을 붙들고 '항변'한다.
여기서 항변은 헬라어로 '에피타민'이라 하여 '꾸짖는다'는 의미이다. 주로 '귀신을 쫒아내거나 폭풍을 잠잠케 하실 때' 사용되었던 단어이다.
베드로가 이토록이나 심각한 표현으로 예수님을 몰아 세운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납득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이제 유대민족을 이끌고 나라의 독립을 쟁취하셔야 한다. 할 수 있다면 저 로마 제국을 무릎꿇게 하셔야 한다. 그리고 그토록 꿈꿨던 예수님 좌우편의 자리를 차지해야 한다. 그들이 이 3년 동안 무엇을 위해 예수님을 따랐다고 생각하는가!'
정신없이 생각하는데...

예수님의 벼락같은 음성이 들려 온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다른 이도 아니고 베드로에게 '사탄'이라 하신다. 지금 그의 생각이 얼마나 그릇된 것인지 이 한 단어로 드러난 것이다.

'하나님의 일'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는 것이다. 이로서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고, 천국의 문을 여시는 것이고, 인류에 소망을 주시는 것이다.
'사람의 일'은 예수님이 죽지 않고 살아서, 민족을 봉기하고, 나라를 일으키고, 제자들을 성공의 자리에 앉혀 주는 것이다.

'사람의 일'
사실 누구나 꿈꾸는 것 아닌가? 예수를 믿는다고 해도 성공을 꿈꾸고 부자가 되기를 바란다. 더 큰 집에서 살고 싶고, 좋은 차를 타고 싶다. 그게 왜 잘못인가? 부자됨이 죄악인가?
그렇지는 않을 터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믿음의 사람들이 부유했던 일은 얼마든지 있어왔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을 제쳐두고! 오로지 '사람의 일'만을 생각한다면, 그래서 예수께서 이루셔야 할 구원의 일까지 별것 아닌 것으로 여기게 된다면! 천국과 영생과 소망과 예배... 이런 것들을 놓치고 '오로지' 성공만이 내 인생의 최 우선 순위요 가치가 되었다면!!!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이 음성은 내가 들게 될 음성이지 않을까?

'제자인가, 사탄인가?'의 분기점이 여기에 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질 때'에야만이 예수님을 따를 수 있다고 하신다.

현대에야 '십자가의 의미'를 알기에 이 말이 은혜롭게만 느껴지지,
이 대화가 오갔던 당시 제자들에게  '십자가의 의미'는 '흉악한 죄악을 저지를 자를 위한 끔찍한 형벌의 틀'이외에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자기 십자가를 지라'니!
예수님이 지고 죽으시는 죄는 다름 아닌 '내 죄'다. 내가 짊어지고 죽어야 할 죄다. 그게 '자기 십자가'이다. 우리가 우리 죄를 아파해야 할 크기, 우리가 가슴을 치며 회개해야 할 크기가! '자기 십자가'이다.

죄와 처절한 씨름 없이!
그저 자기 영달만을 바라고 있는가!

제자가 아닐 가능성이 크다.
제자가 아니라면!
당신은 누구인가?

오늘도 두렵고 떨림으로 자신의 구원을 점검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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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2장 5-12(신약55면)

[막2:5-12]
5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6 어떤 서기관들이 거기 앉아서 마음에 생각하기를
7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신성모독이로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8 그들이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는 줄을 예수께서 곧 중심에 아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것을 마음에 생각하느냐
9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서 어느 것이 쉽겠느냐
10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11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12 그가 일어나 곧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나가거늘 그들이 다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이르되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 하더라

한 중풍병자 걸린 사람이 친구들에 의해 들것에 실려 예수님께 나아왔다.
예수님은 네 친구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신다.
“작은 자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이 말씀에 모인 곳이 일시에 술렁거렸다.
‘신성모독이다! 오직 하나님만이 죄를 사하실 수 있는데 저런 말을 함부러 하다니!’ (7절)

이들의 생각을 아시는 예수님은 그들에게 물으신다.
“중풍병자에게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서 어느 것이 쉽겠느냐?”

자!
어느것이 더 쉽겠는가?

내 입장에서 말해보자면!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라고 말하는게 훨씬 쉽다.
왜냐하면 눈으로 안보이니까!
확인할 길이 없으니까!
그냥 공수표 날리듯이 이야기하면 그만이다.

반면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하는 말은!
내 입장에서는 어려움을 넘어서 불가능한 일이다.

하나님 입장에서 생각해보자!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하는 말은!
쉬운 일이다.
창조의 하나님께 병고침은 어떠한 장애도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은…
‘희생이 필요한 일’이다.
인간의 죄를 사하기 위해!
하나님은 독생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죽음에 내어주셔야 했다.
끔찍하도록 어려운 일인 것이다.

예수님이 물으신 진위는 여기에 있다.
만일!
‘네 죄사함을 받았다’고 선언하신 예수님께서!
중풍병자의 불치병을 고치신다면!

예수님은 능히 ‘죄도 사하실 수 있는 분’임이 증명되는 것이다.
죄를 사하시는 능력이 증명될 때!
서기관들이 했던 말까지 증명된다.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예수님은 ‘죄를 사하시는 하나님 자신’임을 나타낸다.

이 모든 논리를 세팅해두시고!
예수님은 실제 중풍병자의 병을 그 자리에서 고치신다.

이 상황을!
사람들은 어떻게 받아들어야 할지 몰랐다!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려들지 않았기에!
그들은 혼란 스러운 표현을 한다.
12절
“그가 일어나 곧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나가거늘
그들이 다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이르되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 하더라”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안다!
그분은 죄를 사하시는 하나님이시며, 그의 아들이시다.
우리 죄를 사하기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셨다.

그분 안에서
그분을 믿는 우리의 죄는 사함 받았으며!
죄 사함 받았기에!
하나님 나라 그 거룩한 곳에 받아들여졌다.

구원의 확실한 은혜가 오직 예수 안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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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적인 교회는 말 그대로 성경이 제시하는 교회의 상을 가진 교회이다.

그것은 시대상을 반영하는 것도 인간의 필요에 의한 것도 아니다.
성경에서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 의도하신대로 세워지는 것이다.

오늘날 많이 오해되는 것 중 하나는 헌금이다.
많은 사람들이 헌금을 기부행위로 본다. 시대 흐름상 교회가 기부금 영수증을 떼 주고 있는것도 한몫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기부금 영수증을 발급해줄지라도 헌금은 기부행위가 아니다.

헌금은 헌신이다.
믿음이다.

아브라함이 조카롯을 구하고 전리품을 취한 뒤에 멜기세덱을 만나고 그에게 축복을 받고 그에게 십분의 일을 드린다. 이것이 최초의 십일조라 하겠다. 그도 그럴 것이 훗날 성경은 멜기세덱을 예수 그리스도의 표상이라 가르치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은 멜기세덱을 왕 이상의 신적 존재로 인식했고, 그리스도의 모형으로까지 인식했으며 그렇기에 그에 합당한 예물을 드린것인데 그것이 십일조였다. 이것은 승리에 대한 감사였고, 기꺼이 드린 헌신이었다.

훗날 이스라엘 공동체에게 십일조 명령이 주어진다. 12지파가 낸 십일조는 성막을 위해 헌신하는 레위지파의 몫이 되었다. 각 지파는 10분의 9를 사용하게 되었고, 레위지파는 10분의 12를 사용하니 다른 지파보다 부유했다. 또한 레위지파의 십일조는 제사장의 몫이 되었는데, 그렇게 함으로 제사장은 가장 부유한 사람들이 되었다. 이런 재물의 흐름은 이스라엘 공동체의 정체성을 보여준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것"임을 보여주는 것.

이런 원리는 신약에서도 폐지되지 않았다. 예수님께서는 십일조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마23:23)" 라 하셨다. 현대 신학자들이 십일조 폐기론을 주장하지만 정작 그들의 주인이신 예수께서는 그러지 않으셨다.

또한 신약시대에도 헌금의 쓰임은 구약과 크게 다르지 않다. "17 잘 다스리는 장로들은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에게는 더욱 그리할 것이니라
18 성경에 일렀으되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 하였고 또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은 마땅하다 하였느니라
(딤전5:17-18)"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장로를 목사라 한다. 그들은 더욱 존경할 자라 하는데, 그 존경이라는 건 그냥 마음으로나 태도로 하는게 아니라, 마땅히 받아야할 삯을 주는 것이다.

이 모든것이 헌금으로 되는 일이다.
헌금으로 말씀사역자의 생활을 책임지는것이다. 그러므로 말씀 사역자가 교회로 부터 충분한 사례 받는걸 죄악시 해서는 안된다.
또한 사례비를 교인들의 피땀흘린 돈으로 주는 것이라는 인식도 합당하지 않다.
왜냐!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거제로 드리는 모든 성물은 내가 영구한 몫의 음식으로 너와 네 자녀에게 주노니 이는 여호와 앞에 너와 네 후손에게 영원한 소금 언약이니라 (민18:19)"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바친 예물을 성전 사역자들에게 주었는데, 하나님은 그것을 "내가" 주는것이라 하셨다.
즉, 백성들은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돌렸을 뿐이고, 하나님께서는 자기것을 사역자들에게 주신것이다.

이럴진대 헌금이 어찌 기부가 될 수 있겠는가!
현실상 기부금영수증을 뗄지라도 추호도 하나님의 것을 기부했다는 착각은 버려야할것이다.

헌금은 감사와 헌신과 믿음이다.
자기 만족으로 흘러가서는 안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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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106편 15절 

"그러므로 여호와께서는

그들이 요구한 것을 그들에게 주셨을지라도

그들의 영혼은 쇠약하게 하셨도다."

 

출애굽기 말씀을 보면!

광야 이스라엘 백성들은 끊임없이 불평과 원망을 일삼았다. 

 

물이 없으면 물이 없다고, 

먹을 것이 없다고, 

고기가 없다고...

 

없는 것 때문에 속상한 건 알겠지만 

그 때마다 백성들은 꼭 한마디를 더 했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여기서 죽이려 하시는도다!"

"애굽에서 종살이 할 때가 더 나았다."

 

출애굽의 그 엄청난 기적들을 보았으면서도!

10가지 재앙과 홍해를 가르신 기적과!

지금도 그들 곁에 있는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보면서도!

그들의 입술은 서슴치 않고 불신앙의 말을 쏟았다. 

 

신기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어리광을 다 받아주신 것이다. 

물이 없다 하면 물을 주셨고, 

먹을 것이 없다 하면 만나를 주셨고, 

고기가 없다 하니 메추라기를 보내주셨다. 

 

하나님이 백성들에게 끌려 다니는 것 같은 인상이다.

그런데... 그렇지가 않았던 것이다. 

오늘 말씀이 그걸 보여준다. 

"여호와께서는 그들이 요구한 것을 그들에게 주셨을지라도!"

"그들의 영혼은 쇠약하게 하셨도다!"

 

만족하지 못한 마음, 심령... 

그 자체가 그들이 받은 심판이었던 것이다. 

하나님은 그들의 빈 마음을 유기하셨고, 마침내는 40년간 광야에서 쓰러지게 하셨다.

 

고린도전서 10:10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그들과 같이 원망하지 말라"

 

원망과 불평을 그치자.

대신에 힘들면, 뭔가가 필요하면... 

그저 그분께 기도하자!

 

그게 시편106편의 결론이다.

44절 "그러나 여호와께서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실 때에 그들의 고통을 돌보시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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