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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두가지 인생을 대비한다. 

 

하나는 쫒기듯 사는 인생이다. 

이는 황금새작에 갇힌 인생과도 같다.

무언가를 이루고 성공하기위해 

그것만을 쫓아가는 인생이다.

자기 손 안에 있는 것을 놓치지 않으려고

발버둥친다. 

 

이스라엘의 초대왕 사울이 그랬다.

그는 모든 것을 갖춘 사람이었다. 

첫째는 '부' 둘째는 '외모' 셋째는 '체격'

사람들이 부러워할만한 모든 요소를 갖춘 그는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고!

내면 세계를 계발하기도 전에 

성공하고 말았다. 

너무 빨리 찾아온 성공은 오히려 

그를 실패의 구덩이로 떨어트린다.

 

그는 세상을 정복해야 할 대상으로 보았다. 

블레셋과의 전쟁을 앞뒀을 때 

제사 드려야 할 사무엘을 기다리지 못하고

자신이 직접 제사를 집례한다. 

그는 그저 일을 진행시키려는 조급증에 빠져 있었다.

 

훗날에는 백성의 신망을 얻은 젊은 다윗에게

끊임없이 집착하는데 모든 에너지를 쏟았다.

성경에서는 그의 분노가 폭발하는 장면이 

여러분 나온다. 

그는 쫓겨다니는 인물의 전형이다.

p.75

"안타깝게도 우리 사회는 수많은 사울들, 

즉 재산을 쌓고 인정받고 성취하기 위해

쫓겨다니다가 황금 새장에 갇힌 사람들로 

가득 차있다."

 

이렇듯 세상 대다수의 사람들이 

'쫒기는 삶'을 살고 있다면, 

그 반대편에는 '부름받은 삶'을 사는 

사람들이 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세례요한이다.

세례요한은 

세상적인 표현대로라면 엄청난게 성공한

선지자였다. 

그가 있는 곳 마다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제자들도 여럿이 있었다. 

 

그런데 어느날!

예수라는 인물이 나타났고, 

세례요한을 따랐던 사람들이 

이제는 예수에게로 관심을 옮겼다.

마치 사울에게서 다윗에게로 

저울이 기우는 모양새다. 

이럴 때에!

세례요한은 사울과 달리 행동한다. 

오히려 기뻐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역사상 가장 유명한 고백중의 하나가

이 때에 나왔다. 

 

부름 받은 사람은 

자신이 청지기임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 어느것도 자신의 소유가 아니었다. 

그저 하나님이 잠시 맡기셔서 관리하는

청지기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나의 재물, 목사에게는 교인들, 

심지어 자녀들에이르기까지...

그래서 이러한 것들을 잃었을 때에

심각한 위기에 빠지지 않는다. 

오히려 내면은 더욱 강해지곤 한다. 

 

 

세상의 대다수인 '쫓기는 삶'을 사는 '우리'는

과연 변화될 수 있는가?

 

사도 바울이 그 가능성을 보여준다. 

부르심을 받기 전의 바울은 

자신의 성공을 위해 사는 사람이었다.

출신 가문도 좋았고, 명석했으며, 

좋은 학파에서 공부를 해서 

보장된 성공의 길을 가고 있었다.

그 성공의 길을 가로막는 것이 있다면

수단을 가리지 않고 넘으려 들었다.

그래서 초대교회 기독교인들을 박해했던 것이다.

그랬던 바울이!

어느날 예수님을 만났다. 

그리고 부름받은 삶을 살기 시작한다. 

추구해왔던 세상적 성공의 삶이 

'분뇨'처럼여겨졌다고 한다. 

바울에게 있었던 변화는

우리 역시 기대할 수 있는 변화일 터다. 

 

 

p.121.

"우리 자신의 내면세계를 들여다볼 때 

나는 사울이 될 것인지 

아니면 요한이 될 것인지 

거의 매일 씨름해야 하는 문제라는 것을 

발견한다."

 

 

질문

1. '맡겨진 것'을 '내 소유'처럼 여기는 것이 있나요?

2. '쫒기는 삶'과 '부름 받은 삶'중에 나는 어디인가요?

3. 지금 하나님은 나를 어떤 일로 부르고 계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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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 장이다.

그런데 지금와서 보니까 

전체에서 두번째 장이 아니더라.

총 5부까지의 큰 주제가 있고, 

이 두번째 장은 

'서론'의 두번째 장이다. 

아직 갈길이 멀다는 뜻이다.

 

서론의 두번째 장은

내면세계의 중요성을 보여준다.

 

제목은 '조종실에서 보는 시각'이다.

 

저자는 내면세계를 

핵잠수함의 조종실에 비유하고 있다.

미국 핵잠수함인 오하이오함의 내부

핵잠수함은 종종 여러 어려움에 직면한다.

그럴 때에 

잠수함을 위기에 빠트리는 것은 

외부의 요인들이 아닐때가 많다.

오히려 내부 조종실에 

질서가 잡혀 있지 않고 

지휘계통 등에 혼선이 생기면 

위험에 노출된다고 말한다.

 

외부의 위험 요소들은 

내부에서 잘 파악하여 적절히 대처하면

얼마든지 피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부의 질서가 무너져 있으면

잠수함은 작은 위협에도 

쉽게 무너지고 만다. 

 

48페이지를 보자

"삶에 개인적으로 긴장과 압박이 가중될 때

왜 우리는 삶의 조종실로 가는 대신

 더 빨리 뛰고, 더 강력하게 저항하고,

더 나은 전문가가 되려 하는 것일까?

우리 시대는 내면세계보다는 외적 영역의 

온갖 소소한 데 더 많은 관심을 쏟고 있다.

내면세계만이 우리가 그 어떤 외부의 광풍이라도

헤치고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얻을

유일한 장소인데도 말이다."

 

50페이지

"잠수함의 함장이 무언가 심싱치 않은 일이 

일어나고 있다고 느꼈을 때 어떻게 행동하는가!

그는 곧바로 조종실로 향했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위험에 대처하는데 필요한 모든 역량이

거기에 있다는 것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

그가 지휘하던 잠수함은 

외부 도색이나 속력, 승무원들의 결속력 등을 볼때

미 해군에서 가장 탁월한 잠수함일 수도 있다.

그러나 조종실이 무질서한 상태에 있다면

도색, 속력, 훌륭한 승무원 등 

그 모든 것이 전혀 무의미할 것이다."

 

즉 이런 말이다. 

잠언 4:23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질문들

1. 나는 위기때마다 어디로 먼저 달려가는 편인가?

2. 자신의 내면 세계를 얼마나 돌보고 있는가?

내면세계를 돌보기 위한 시간을 얼마나 내고 있는가?

3. 내면세계를 돌보기 위한 나만의 노하우가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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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은 크리스천과 같은 고향 사람이었다. 

고향 이름이 '멸망의 도성'이었던 것 같다. 

 

믿음은 

크리스천이 이곳을 떠났다는 소문을 듣고 

용기를 내어 뒤늦게 길을 떠나온 사람이다. 

 

여기서 성도의 영향력에 대해서 생각해본다.

우리는 종종 '영향력을 행사해야겠다'는

강박관념에 빠지곤 한다.

이런 조바심이 위험한 것이

스스로를 낙담시키고 

주변의 사람들을 정죄하게 되기 때문이다.

 

존번연의 글은 의미심장하다.

크리스천은!

그저 자신의 구원을 위해 길을 떠났을 뿐이다.

그런데!

죄에서 떠나기 위한 개인의 몸부림을 

지켜보는 사람이 있었던 거다!

같은 고민을 하던 사람이 있었던 거다.

크리스천의 고민과 결단과 행동은!

그를 지켜보던 다른 사람의 결단으로 이어졌다.

'나 자신이 하나님 앞에(코람데오)사는 것'이 

중요하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통해서 

여러 역사를 이루어 가신다. 

 

--- 계속 ---

 

작가가 믿음을 등장시킨 이유가 있다.

믿음 역시도 크리스천과 같은 경로로 

여기까지 이르렀다.

하지만, 크리스천과 같은 경험을 한건 

아니었다. 

 

크리스천은 '낙심의 늪'에 빠져서 고생했지만, 

믿음은 늪에 빠지지 않고 좁은 문에 이르렀다.

 

그 과정에 믿음은 

크리스천이 만나지 못했던 '바람둥이'라는 

여자를 만나서 미혹을 받는다. 

 

크리스천은 곤고산에서 누군가를 만나지 않고

계속 그 산을 올랐었다.

믿음은? 산 중턱에서 

'첫 사람 아담'을 만나서 또 다시 미혹을 받는다.

 

아담의 미혹에 잠시 마음이 흔드렸던 믿음은

이후에 모세에게 붙잡혀서 두드러 맞는다.

마음으로 지은 죄도 죄이기 때문!

모세는 자비 베푸는 법을 알지 못한다며

믿음을 죽일 기세로 공격했다.

 

그 때에 

'손과 옆구리에 구멍이 있는' 사람 즉, 주님께서

모세를 만류하셨고, 

믿음은 계속해서 길을 갈 수 있었다. 

믿음을 때린 사람은 모세였다.

또한 크리스천은 '아름다움'이라는 궁전에서

쉼과 은헤를 받을 수 있었지만 

믿음은 그곳을 낮시간에 지났기에

그냥 지나쳐 갔고, 

 

겸손의 골짜기에서는 

또 다시 미혹을 받는다. 

'불만'이라는 사람이 믿음에게 '돌아가자'고 설득한다.

또, '수치'라는 사람은 종교를 의지하는 이들을 

조롱하며 믿음에게 수치심을 주려 했다. 

 

이처럼!

'믿음'이 지나온 길은 '크리스천'과 같은 경로였지만

그들의 경험은 전혀 달랐던 것을 볼 수 있다. 

그렇다!

신앙의 길은!

모두가 똑같이 가는것만이 아니다. 

이런 사람은 이런 경험을 

저런 사람을 저런 경험을 한다. 

그러나!

전혀 다른 경험을 했음에도!

두 사람은 서로 공감하며 

이야기를 주거니 받거니 한다. 

왜냐고?

신앙의 원리는 똑같기 때문이다!

 

세상에 속하지 말고!

하나님의 편에 서서 가는 것 말이다. 

 

크리스천의 길이 대적들과 싸우며 가는 길이라면

믿음의 길은 계속다가오는 미혹을 이기는 길이었다

 

우리 각 사람이 어떤 모양의 시험을 당할지라도!

신앙의 원칙을 지키며 살아가면 

넘지 못할 산을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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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엔 책의 세번째 파트 '걷다'이다.

사실 이 파트는 읽으면서
크게 감흥이 있지는 않았다.

모든 종교와 철학의 지도자들이
걸으면서 새로운 길을 열었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예수님의 사역 역시도
걸으면서 일어났다고 말한다.
그러고보면
예수님은 스스로를 '길'이라 하셨다.

예수님은 걸어서 사람들을 찾아가셨고
마지막 십자가를 지실 때도
골고다의 언덕 길을 오르셨다.
그런 의미에서!
'어쩌면'
걷는 것이
예수님의 길을 따르는 방편이 되지 않겠는가?

예수께서 걸으면서
만나는 사람들을 고치셨고, 가르치셨고,
회복시키셨다면,
교회 역시도
걷다보면!
교회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또한!
영적인 배고픔을 가진 사람들도!
걸어서 교회에 오고
걸어서 말씀을 배우고
걸어서 심방 하며!
길에
그리스도인의 자취를 남겨야 하지 않을까?

최근 '순례의 걷기'가 유행하는 것도
그런 인간의 본성이
작용하고 있는 건 아닐까?


이로서
'교회는 지금 대사회적 복지'로
'먹다' '듣다' '걷다'의
세가지 동사들을 다루었다.

개인적으로는
'먹다'와 '듣다'는 공감이 되었지만,
마지막 '걷다'에는 마음이 가지 않았다.
그럼에도!
신학을 공부하지 않은 사람이
이렇게까지나 기독교의 핵심을
꿰뚫는 데는 감탄을 금치 못하겠더라.


여기서 나눔을 위한 질문들

1. 얼마나 걸으세요?

2. 걸음을 통해서 효과(효능?)를 본 일이 있나요?

3. 꼭 걸어보고 싶은 길이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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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질문은 '듣다' 파트이다.

기독교의 상징은 하나님의 말씀을 '빵'에 비유한다.
그것이 '빵'이라면 그 말씀을 '먹는 자'가
영생을 얻는다고 한다.

이것을 인간의 실존으로 이야기 해볼까?
'빵'으로 이야기하면 '먹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야기하면
'듣는 것'이다.

교회의 '복지'는
'먹는 것'에 이어서!
'듣는 것'으로 나아가야 할 이유이다.


작가가 먼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듣는 것'이 우선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마르다와 마리아 이야기이다.
마르다는 예수님을 접대하기 위해
열심히 음식을 준비하고 일하는 중이다.
그와중에!
마리아는 앉아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다.
마르다 입장에서는 속상할 노릇이다.
언니는 이렇게 고생하는데
이 동생은 어찌 저리 철이 없단 말인가!
게다가!
고대 사회에서 여자는
앉아서 말씀을 들을 입장에 있지 못했다.
마땅히 음식을 준비해야 옳았다.

마르다는 예수님께 고자질한다.
"예수님! 마르다에게 너도 일좀 하라고
이야기좀 해주시죠!"

예수님의 대답은 무엇인가?
누가복음10:41,42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봉사'와 '듣는 일' 중의 '취사선택'이 아니다.
적어도 '말씀을 들을 때'는
봉사의 일을 내려 놔야 한다는 것이다.
봉사에 치우쳐서
하나님의 말씀을 먹지(듣지) 못하게 되는 것은
영적 기근을 초래하는 일이다.

1. 마르다의 경험을 비추어
요즘 내 마음을 분주하게 하는 일은 무엇인가?
그것이 말씀보다 앞서 있지는 않은가?

2. 요즘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에 들어오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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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인 말씀이 육적인 필요보다 앞서는가?"
이 질문에서 출발해야 한다.
무엇이 영원한 생명이고, 진짜 삶이고,
행복인지 찾아야 한다.
이 질문을 해결하고 출발해야 계속 교회에 나온다.

교회의 복지 역시 이 점을 염두해야 한다.
교회가 사회를 위해 벌이는 많은 사역이
과연 무엇을 위한 것인지 점검해야 한다
(p.111)

교회가 사회를 위해 너무 많은 일을 하려고
들지 않았으면 한다.
우리에게 제일 급하고 중요한 것은
정치 경제가 아니고 생명인 것이다.
생명을 놓치면 세상을 놓친다.
그리스도인의 생명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데 달려 있다.
(p.113)

예수님을 영접한지 얼마 되지 않으신 분이
이토록이나 기독교의 진리를
꿰뚫어 볼 수 있다는게 놀라울 뿐이다.
심지어 신학을 하는 교수들 중에도
교회의 대사회 복지를
'먹는 것'에 방점을 두는데
이분은 진정한 '먹음'인
'말씀 들음'을 말하고 있다.

다시 한 번 감탄해 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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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경건서적 독서모임'으로 준비한 책은
'내면 세계의 질서와 영적 성장' - 고든 맥도날드
이다.
이 책은 어렸을 때?
20대일 때 읽었던 책이고
내용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굉장히 여운이 컸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얼마 안되어서
이분이 성?적으로 어려움을 겪었고
오랜 시간 자숙하다가
어느날 복귀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리고 이번에
경건서적 독서모임을 하려고 알아보니
이 책이 다시금 스테디셀러에 올라 있었다.
'다시 한 번 보면 어떤 느낌일까?' 싶어서
다시금 책을 들었다.


이 책은
'공적 세계' 즉 우리 일상의 삶을 위해서
'내면 세계' 자신의 영혼을 희생하고 있지는
않은지...
스스로 돌아보라고 묻고 있다.
요즘 유행하는 '워라벨'이
'워킹, 라이프 밸런스'라면
이 책은
'스라벨'
'스피릿, 라이프 밸런스'를 묻고 있는 거다!

내면 세계의 질서가 무너지면
'싱크홀'과 같은 문제가 발생한다.
지하수가 사라지면서
지반을 지탱해야 할 공간이 생기고
곧장 지반이 무너지게 된다.
내면세계의 질서가 무너지면
우리가 쌓아놓은 삶의 지반이
역시나 무너지게 된다.

읽으면서 떠오르는 질문들을 기록해보자.

"1장 싱크홀 증후군"

1. 바쁘게 살아오면서 자신의 내면 상태를
깊이 돌아본 기억이 있는가?

2. 내가 되고 싶었던 인생을 지금 살고 있는가?

3. 모든 것이 잘 되고 있는 순간에
불안하고, 공허한 마음이 들었던 때가 있는가?

4. '내면 생활을 정비하는 시간을
규칙적으로 가지고 있는가?'
(양이 아니라 질에 대한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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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4장에서
예수님은 승천할 것을 말씀하시면서
'보혜사'를 보내주신다고 약속하신다.


이 때 예수께서는
16절에서
"또 다른 보혜사"를 주신다고 한다.
여기서 '또 다른'이라는 말은
원래 보혜사가 있다는 것이고,
원래의 보혜사는 예수님이다.

즉, 보혜사이신 성령이 하시는 일은
원래 보혜사이신 예수께서 하셨던 일
이라는 것이다.

이 일에 대해서 몇가지 생각해 볼 것이 있다.

'보혜사'란 무엇인가?
한문으로 풀어보자면
保惠師이다.
'지킬 보, 은혜 은, 스승 사'인데,
지키시고, 은혜 주시고, 가르치시는 분
이라는 것이다.
헬라어로는
파라클레이토스인데
법정용어이고
영어로는 카운셀러로 번역된다.
우리로 치면 '변호사'라고 할 수 있을까?

그러나 오늘날의 일반적인 변호사와는
결이 다르다.
고대사회의 변호사는
변호비용을 받으면 맡은 건만 처리하고
끝나는 변호사가 아니었다.
그야말로 함께 하면서, 지켜주고, 보호해주고
멘탈케어도 해주는 든든한 존재였다.

지키고, 은혜주고, 가르치는
한자에서 말하는 내용들을
한꺼번에 수행하는 존재가 '보혜사'라는 것!

예수께서 제자들과 그렇게 함께 하셨고!
이제 성령께서 믿는 모든 사람과 함께 하신다.

이는 이후 고난 받는 모든 성도들에게
큰 위로가 되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받은 박해는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뿔뿔이 흩어져서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하고
붙잡히면 부당한 재판을 받아
결국 사자의 밥이 되었는데...

그럼에도 그들은 외롭지 않았다.
'보혜사'가 계셨기 때문이다.
함께 하시면서
보호하시고, 은혜로 채우시고,
가르치시는!
그분 안에서
모든 성도는 기꺼이 고난을 이겨낼수 있었다.

여기서 또 한가지!
'또 다른' 보혜사라 함은!
예수님 역시 보혜사이시며,
예수님과 성령님은 한 분임을 나타낸다.
그래서
18절에서는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보혜사 오심을 '내가 오리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바로 앞에 있는
성부와 성자의 관계에 이어져 있어 흥미롭다.
빌립이 '아버지(하나님)'을 보여달라 했을 때,
예수님은 9절에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예수님과 하나님은 한 분 이라는 것!

이로서!
요한복음 14장은!
그 자체로서
'삼위일체'의 진리를 보여주고 있다.
'또 다른' 보혜사라는 말에
엄청난 신학이 담겨 있었던 것이다.

자!
오늘 우리에게도 '보혜사' 성령님이 계신다.
믿어지시는가?
믿어지는 것!
이것 역시 성령의 하시는 일이다.

26절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그러므로!
힘든 세상을 사는 우리는
오늘도 '성령 충만을 구해야 한다'
주님은 약속하셨다.

누가복음 11:13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오늘도 성령 충만을 구하며 살자!
보혜사의 도우심을 입어
일어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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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 지역에서 시작된 교회가 짧은 시간에 유럽 전역으로 퍼져 간 가장 큰 이유는 ‘박해’였다.

[행8:1] 사울은 그가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있어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행8:4]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

놀랍게도 기독교는 박해를 받을 수록 오히려 더 확산되고 커져 갔던 것이다.
카르타고의 교부 터툴리안은 이렇게 말한다.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다”


유다의 박해 때문에 로마로 퍼진 교회는
이번엔 로마로부터 박해를 받게 된다.

그런데!
교회가 박해 받는 이유가 어처구니 없다.

첫째. ‘무신론자’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인정하지 않았다. 어떤 형상도 만들지 않았다. 무엇보다 황제를 신으로 추앙하지 않았다.
수많은 신을 섬겼던 당시 사람들에게, 무엇보다 신격화 되어 숭배를 받던 황제에게!
형상을 섬기지 않는 이들은 그저 정신나간 무신론자일 뿐이었고, 황제 숭배 거절은 체제 위협의 대상이 되었다.

둘째. 근친상간을 조장한다. 이들은 서로를 ‘형제, 자매’라고 불렀다. 동시에! 불신자와의 결혼을 거부하고 신자들간의 결혼을 장려했다.
형제 자매라 부르면서 자기들끼리의 결혼이라니!
그들이 보기에 그리스도인들은 윤리적으로 타락한 자들이라고 판단했다.

셋째. 식인을 즐긴다. 그리스도인들은 모일 때마다 성찬식을 했는데, ‘이것은 내 살’이고 ‘내 피’라는 선언과 함께 먹고 마셨다.
교회 밖에서 듣기에 이러한 선언은 ‘식인을 즐기는 행위’로 비쳤고 이것이 박해로 이어졌다.

무엇보다 ‘네로 황제’가 기독교 박해의 큰 도화선이 되었으니,
주후 64년 로마의 대화제로 도시의 대부분이 소실되었을 때,
황제를 향했던 원망의 화살을!
기독교인에게 돌렸던 것이다.
이로서 대 박해가 시작되었다.

로마 역사가 타키투스의 ‘연대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어떤 자들에게는 짐승 가죽을 입혀 개들에게 찢겨 죽게 했고
어떤 자들은 십자가에 달거나 불태워 죽였고,
날이 캄캄해지자 횃불로 사용된 이들도 있었다…
사실상… 한 사람의 잔인성을 만족시키기 위해 고통을 당했다.”

네로의 박해가 얼마나 끔찍했는지
당시의 사람들은 네로를 요한계시록에서 말하는 ‘짐승의 숫자 666’이라고 믿기까지 했다.
실제로 네로를 ‘게마트리아’라는 문자를 숫자화 한 조합으로 계산하면 666이 된다.

네로 황제의 박해 이후로
기독교인은 공공연히 황제들에게 박해거리가 되었다.
교회사에서는 로마에서 일어난 박해의 횟수를 10회로 간주한다.
‘네로, 도미티아누스,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막시미누스, 데키우스, 발레리아누스, 디오클레티아누스’

도미티아누스 - 자기를 신이라 주장했는데, 그리스도인들은 단호히 황제 숭배를 거절했고,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죽었다.
이 때에 그리스도인들은 ‘지하 무덤으로 숨었는데’ 이를 ‘카타콤’이라 한다.

트라야누스 - 황제 숭배를 강요하며 그리스도인 탄압.
이 때 사도 요한의 제자인 안디옥 감독인 이그나티우스가 순교.
교회 전승에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천국이 이런 어린아이의 것’이라 말씀하셨을 때 친히 품에 안으셨던 아이였다고.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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